최해성 [한] 崔海成

최해성(1813∼1839). 순교자. 세례명 요한.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교교육을 받았으므로 성격이 온순하고 남을 돕기를 즐겨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강원도 산골인 ‘서지’라는 곳에 가 살면서 신앙생활을 지켰다. 1839년 강원도 원주 포졸에게 잡혀 원주진영(原州鎭營)으로 압송되어 갖은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신앙을 지켜 1839년 10월 6일 26세의 나이에 참수형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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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 [한] 崔漢綺

최한기(1803∼1879). 이조 후기 실학자. 자는 문로(-老), 호는 혜강(惠崗) · 패동(浿東) · 명남루(明南樓). 본관은 삭녕(朔寧).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의 15대 후손. 1825년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고, 70세 때인 1872년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高宗)의 시종이 되자 시종신부(侍從臣父)로 검지중추부사(檢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조선조 전기 실학(實學)이 ‘경학(經學)의 실학’ 차원에 머무른 데 비해 최한기는 ‘과학(科學)의 실학’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로서 그 철학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기(氣)철학을 계승, 발전시켜 독창적인 ‘운화기(運化氣)’ 이론 위에 자연과학적인 세계상(世界像)을 이룩하였고 선진 실학자들이 들여온 서학서(西學書)를 연구하여 서학의 과학기술적인 면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직업교육을 제창하였고 또한 외국과의 통상을 우해 개항, 개화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잇는 가교자로서 역할을 해 냈다.

주요 저서로는 ≪농정회요≫(農政會要), ≪육해법≫(陸海法), ≪청구도제≫(靑丘圖題),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 ≪신기통≫(神氣通), ≪심기도설≫(心器圖說), ≪우주책≫(宇宙策), ≪지구전요≫(地球典要), ≪인정≫(人政), ≪명남루집≫(明南樓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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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제 [한] 崔必悌

최필제(1769∼1801).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서울의 중인(中人)계급 집안에서 출생하여 1790년 이존창(李存昌)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종형 최필공(崔必恭)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고 그 뒤 냉담한 생활을 하다가 1793년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교회일에 참여, 황사영(黃嗣永)이 지도하는 명도회(明道會)의 한 조직에 가입하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 1월초(음 1800년 12월 19일) 주의 봉헌 축일을 지내다가 오현달(吳玄達)과 함께 체포되었고, 재옥(在獄) 중 아버지가 사망하자 임시 석방되어 부친의 장례를 치른 뒤 옥으로 돌아와 사형선고를 받고 5월 14일, 정철상(丁哲祥)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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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공 [한] 崔必恭

최필공(1745∼1801). 순교자. 세례명은 토마스. 서울의 중인(中人)계급에서 출생. 1790년 입교했고, 이듬해 신해(辛亥)박해로 체포되어 형조(刑曹)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모든 고문과 유혹을 물리쳤으나 숙부(叔父)와 동생의 간청으로 배교, 정조(正祖)가 그 보상으로 집을 마련해 주고 장가를 들여 주었다. 그러나 곧 신앙을 다시 찾아 1799년 8월(음) 형조에 불려 들어가 신문을 받던 중 신앙을 고백하였고, 정조 앞에서 천주교가 참된 진리임을 강론(講論)하였다. 정조는 극형을 주장하는 형조의 요청을 무시하고 석방시켜 주었으나 이듬해 정조가 죽고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1800년 12월 17일(음) 맨처음으로 체포되어 1801년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薰)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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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흡 [한] 崔昌洽

최창흡(1787∼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베드로. 일명 여칠. 성녀 손소벽(孫小碧)의 남편. 성년 최영이(崔榮伊)의 부친. 서울의 중인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입교했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이복형인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30세 경 결혼한 뒤 아내와 함께 새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아내와 함께 대세(代洗)를 받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사위 조신철(趙信喆)이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발견되어 이 때문에 포청(捕廳)에서 7회의 신문과 함께 주뢰, 주장 각각 7차, 태장 150도로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刑曹)로 이송되어서도 3차의 혹독한 형문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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