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 조직화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조직신학이라는 특정분과 학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초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 등 분과들을 포함하는 분류용(分類用)개념이다. 실천신학에 대조되는 개념이다.
조증이 [한] 趙曾伊
趙曾伊(1782∼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바르바라. 성인 남이관(南履灌)의 처. 경기도 이천(利川)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6세 때 남이관과 결혼했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친정아버지와 시부모가 순교하고 남편이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친정인 이천에 내려가 10여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 후 30세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丁夏祥)을 도와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보필하고 공소(公所)를 세우는 등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그 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남편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함구하고 신앙을 지켜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조종국 [한] 趙鍾國
조종국(?∼1951?). 명동본당 청년회장, 6.25 피랍자. 서울에서 출생. 계성(啓星)학교를 졸업하고 한의약계에 투신, 10여년을 화평당약방에 근무한 후 약방 주인 이응선의 사위가 되어 화평당의 운영을 맡았고 그 뒤 조선매약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전무를 거쳐 사장에 취임하였다. 광복 후 1946년 대한약행을 설립하고 이어 보인당 제약회사를 인수, 명실공히 한의약계의 왕자로 군림하였고 그뿐 아니라 교회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명동본당 청년회 회장으로서 박병래(朴秉來), 송경섭(宋璟燮) 등과 함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6.25동란 중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1년 9월 16일 명동본당 총회장 정남규(鄭南奎), 청년회 부회장 송경섭, 경향잡지사 총무 김한수(金翰洙), 김정희(金貞熙) 등과 함께 북한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아무도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조조 [원] Jozeau, Moyse
Jozeau, Moyse(1866∼1894). 한국명 조득하(趙得夏).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1889년초에 한국에 도착하여 곧 경상도 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약 1년간 계속하다가, 1890년에 부산지방의 교회창립사업을 맡았다. 신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그 곳에 교회를 세우고, 여러 곳의 벽촌과 섬을 순회하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한 결과, 3년 후에는 약 2,000명의 신자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정력과 굳은 신념 때문이며, 교우들뿐만이 아니라 이교도들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893년 그는 부산을 떠나 그와 같이 젊고 정력적인 인물을 필요로 하는 전라도로 전임케 되었다. 그의 거처로 된 배재마을은 곧 모범적인 마을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이 때 불행히도 동학(東學)의 일파가 그의 관할 구역을 습격하자, 그는 용감하게 이와 맞서 싸웠으나 정세가 점점 불리해졌으므로 구원을 청코자 서울로 올라갔다. 도중 전주를 거쳐 공주에 다다랐을 때 청(淸)나라 군사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1894년 7월 29일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조제 [원] Jaugey, Joseph
Jaugey, Joseph(1884∼1955).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한국명 양수춘(楊秀春). 프랑스의 랑그르(Langres)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6월 사제로 서품 되었으며, 곧 조선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해 8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경기도 양평(楊平)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중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징집되어 프랑스로 돌아갔고, 전투 중에 포로가 되었으나 종전 후 석방되어 1919년 다시 한국에 입국, 원주(原州)본당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그 뒤 1924년 서울교구 당가로 임명되어 1942년까지 서울교구의 재정과 사무를 처리하는 한편 <경향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서울교구가 방인(邦人)교구가 되자 당가직에서 물러났고 1948년 대전교구가 지목구(知牧區)로 설정되면서 대전교구 당가로 임명되었다. 1955년 1월 8일 대전교구 주교관에서 급성폐염으로 선종, 대전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