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렐리 [원] Signoreli, Luca d’Egidio di Ventura de’

Signoreli, Luca d’Egidio di Ventura de’(1445?~1523). 이탈리아인 화가. 움브리아파(派)의 대표적인 프레스코벽화가. 일명 Luca da Cortona. 코르토나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같은 움브리아파의 거장 프란체스카(Pietro della Francesca, 1420?~1492)의 제자로 일컬어지는데, 그의 구성에 대한 당당한 어프로치와 진지한 스타일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일찍부터 피렌체파 화가이자 조각가인 폴라이월로(Antonio Pollaiuolo)와의 접촉으로 해박학 지식을 흡수하였다. 그는 회화표현의 방편으로 나체인물상을 사용한 최초의 이탈리아 화가였다. 대표적인 프레스코 벽화로는 <세계의 종말> 및 <최후의 심판>(오르비에토 대성당, 1499-1503년), <모세의 생애>(바티칸궁전의 시스틴 성당>, <성 바울로의 귀의>(로레토 성당) 등이 있다. 이 벽화는 그가 특출한 재능을 가진 도안자임을 말해 준다. 그의 만년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의 명성에 가려진 바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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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드 [영] synod [독] Synode [라] synodus

어원은 그리스어의 ‘sunodus'(회의)로 주교관할권 하에 있는 교리, 규율, 전례의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교회의 권위 하에 열리는 교회회의를 말한다. 현재 시노드란 참석자들이 의결권을 갖지 않는 공청회적인 성격의 교구회의나 갖가지 규모의 주교회의에 사용되고 있다.

초기 교회 이후 수세기 간 ‘시노드’와 ‘콘칠리움’(concilium)은 서로 동의어로 엇바뀌어 쓰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서로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 이후 교회일치를 위한 큰 규모의 교희 회의에는 ‘콘칠리움’이 배타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것은 우리말로는 ‘공의회'(公議會)로 번역되었다. 비록 성격이 다른 지역공의회가 있으나 시노드는 한 교구나 관구, 그리고 그 이상의 규모로 한 교구의 주교와 성직자, 여러 교구의 주교들과 성직자, 혹은 주교들만이 모여서 여는 교회회의로 공의회와 다른 점은 참석자들 모두가 의결투표권을 갖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트리엔트 공의희(1545~1563년) 이후 시노드는 교구 주교가 소집하며 입법적 결정권은 소집한 주교 한 사람만이 갖는 교구 시노드(Synodus dioecesana)를 뜻하기도 하였으나 새 교회법에서는 교구 시노드 뿐 아니라 주교 대의원회(혹은 주교 시노드)를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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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고가 [라] Synagoga [영] Synagogue [관련] 회당

그리스어로는 집회라는 의미를 갖지만, 성서에서 시나고가라고 표현할 때는 유태교의 회당을 가리킨다. 유태인들은 여기서 예배를 보며 재판을 열기도 하였다. 그 뒤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유태교라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 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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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과경 [한] 時課經 [관련] 성무일도

성무일도를 위해 정해진 시간의 기도문. ⇒ 성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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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한] 時間 [라] tempus [영] time

어느 시점에서 시점까지의 운동의 간격. 고대 튜톤(Teuton)어에서는 연장(延長)의 뜻으로 쓰이고, 그리스와 로마의 시간개념은 ‘빛’과 ‘연소’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연유한다.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시간을 변화(變化)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엘레아학파의 제논(Zenon)은 시간을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보기도 하였다[飛天不動].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는 그의 고백록(confessions)에서 “시간이란 무엇인가?” 자문(自問)하고 나서, 아무도 묻지 않을 때에는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수수께끼’라고 한다. 아비첸나(Abicenna)는 시간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운동의 경과를 측정한 것으로 보고 관찰자는, 마음속으로 그 끝없는 유행(流行)의 어느 부면을 단절하여 순간적으로 그 존재성을 부여하게 된다고 한다. 뉴톤(Sir Isaac Newton)도 시간을 지속적 경과(持續的經過)로 파악하였으나 라이프니츠(G.W. Leibniz)는 이에 반대하였다. 칸트(Kant)는 현재시간(absorbute time)의 개념을 인간의 감성(感性)에 있다고 본다. “뉴톤적 시간은 그것 자체가 지각(知覺)외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존재하게 된다. 공간과 달리 시간은 계기(繼起)의 연속(continuum)이고 직접 내적 지각을 형성하는 형태이다. 만약 전(前)과 후(後)와 동시(同時)가 시간의 내용이라면, 그것은 이미 그러한 상태를 예정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누군가 시간을 대상과 떼어서 생각한다거나 대상을 목적과 떼어서 생각한다면, 시간은 일종의 선험적 직관이다. 그러나 절대시간의 가정은 스스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절대질량(absolute quantity)은 유동(流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벤트(events)와 단절된, 시간은 앞뒤가 뒤바뀐 공허(空虛)한 것이다. 운동의 지각은 시간의 지각보다 선재(先在)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자연과학적 시간 개념을 배격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시간을 파악하였다.

성서 중에서 시간을 공식적으로 다룬 특이한 책으로 전도서가 있다. 전도서 3장 l절에서 8절까지에 나타나 있는 구절들은 히브리인의 신학적 사고체계를 통해서 올바른 해석을 할 수가 있다. 히브리인들은 구체적인 언사(言辭)로 사고하였고 추상적 사념을 배격하였다. 성서 연구에 있어서 주도적 사상은 유태인들이 자기 민족의 역사를 하느님이 자신과 그분의 사랑을 자애로운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나타내는 과정으로 보았다. 하느님의 자기현시(自己現示)는 선민(選民)을 부르고, 모으고, 약속하고, 구한 섭리적 사건들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야훼는 출애굽기 속에, 시나이에, 예인가 속에 방주 안에, 그리고 신전에 항상 현존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그들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사상은 유태인들의 굳은 신념이었다.

히브리인들의 구체적 사고경향 때문에 성서에는 시간의 철학적 정의 같은 것은 없다. 시간을 ‘기간’ 이나 ‘지속’의 의미로 쓴 성서는 출애굽기(12:40), 열왕기(6:2), 루가복음(2:46), 사도행전(9:9) 등이다.

[참고문헌] New Catholic Encyclopedia, McGraw-Hill, l967 /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Mcmillan and Free Press, l980 / J. Barr, Biblical Words for Time, London 1962 / J. March, The Fullness of Time, New York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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