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 [한] 主敎 [라] episcopus [영] bishop

1. 정의 : 하느님의 제정하심에 따라 성령을 받아 사도들의 지위를 계승하는 주교 즉 감목(監牧)은 교회 안에서 세워진 목자들로서 교리의 스승들이요 거룩한 예배의 사제들이며 통치의 봉사자들이다(교회법 375조 ①).

2. 명칭 : 신약성서에 주교를 일컫는 대표적인 단어로 그리스어 프레스비테로스(presbuteros)와 에피스코포스(episkopos)이며 공동번역에서는 ‘원로’(장로)와 ‘감독자’로 각각 번역되어 있다(디도 1:5-9 참조) epischopos(라틴어로 episcopus)는 ‘감독하는 자’, ‘관리자’, ‘지도자’ 등을 의미하며 그러한 직책을 가진 세속의 공직자를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초대 교회에서 ‘사도의 후계자’들을 뜻하는 용어로 채용되었다. presbuteros(라틴어 presbyter)는 유태인 공동체의 집단 지도자를 뜻하는 단어였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산앙공동체의 집단 지도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사도의 후계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2세기말부터 ‘사도의 후계자의 보조자’를 뜻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사제(司祭)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교를 파파(papa)라고도 불렀다. 이는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며 원래 ‘사도의 후계자’와 자치 수도원의 원장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5세기 이래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되었다. 이밖에 주교를 가리키는 용어로는 ‘윗자리에서 지도하는 자’(antistites, praesules, principes, praepositi), ‘사제들 중 최상급자’(sacerdotes primi ordinis, summi sacerdotes, sacerdos Magnus), ‘다리 놓는 자’(pontifices), 목자(pastores), ‘가르치는 자’(doctores) 등이 있다.

처음에는 집단 지도체제였던 교회가 2세기부터 단일 지도체제로 되었는데 이때부터 사도의 후계자로서 지역단위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이를 에피스코푸스(eposcopus)라고 부르는 것이 정식 호칭이 되었고, 마침내 교회법전의 공식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를 일본에서는 사교(司敎), 중국과 한국에서는 주교 또는 감목이라 한다. ‘감독하는 목자’ 또는 ‘감목이며 목자’라는 뜻을 지닌 감목은 에피스코푸스를 적절히 번역한 단어이다. 이는 마테오 리치 신부시대(1600년경)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사용되어 왔으나 한국에서는 1960년 이후 사용례가 줄어들고 있다. 한편 ‘주교’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약 400년간 사용해 왔으나 에피스코푸스를 나타내기에 부적합한 말이다.

3. 사도들의 후계자 선정 :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세상 종말까지 지속될 것이다(마태 28:20). 그러기에 사도들은 자기들의 후계자를 선정하고 후계자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제도를 마련해 두었다(교회헌장 20). 사도들의 사명을 계승하여 수행한 여러 직무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집사와 원로와 감독이다. 집사(diaconos)는 ‘부제’(副祭)라고도 불리며 교회의 살림을 맡아보도록 사도들의 안수를 받아 선정된 사람의 직책을 후대에 계승한 것이다(사도 6:1-6). 원로와 감독은 지역교회를 지도하도록 사도들에 의하여 선정된 사람이다(사도 14:22, 15:2, 20:17, 1디모 4:14, 5:17, 디도 1:5, 1베드 5:1, 1요한 1:1). 성서에서 집사는 원로와 감독에 대하여 분명히 구별되나 원로와 감독 상호간의 구별은 뚜렷하지 않다. 즉 바울로는 원로들에게 고별 연설을 하면서 그들을 감독들이라 부르고(사도 20:17- 35), 디도에게 원로를 선정하라고 명하면서 감독의 자격 요건을 말하고 있다(디도 1:5-9). 더욱이 모든 성도와 감독과 부제에게 인사하면서 원로에 대한 언급이 없고(필립 1:1), 감독의 자격을 설명하고 나서(1디모 3:1-7) 원로에 대한 언급없이 부제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1디모 3:18-13).

4. 원로(장로)와 감독 : 그러나 원로와 감독이 동의어(同義語)인 것은 아니다. 유태인 출신의 그리스도 교인 공동체에는 유태교 전통에 따라 장로들이 집단적으로 교회를 지도한 반면, 이교도 출신의 그리스도 교인 공동체에는 그리스 · 로마적 제도의 영향으로 감독들이 단일 지도체제로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당시의 관습상 일반적으로 장로는 신분을 가리키고 감독은 직책을 말한다. 그러므로 장로의 신분으로서 감독의 직책을 가질 수 있었다(1디모 1:17). 사도들과 사도의 보조자들은 지역교회에서 신앙 깊고 덕망 있는 신자들을 장로로 뽑았고 장로들 중 학덕이 뛰어난 사람에게 그곳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직을 맡겼다. 1세기 후반에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이 별세하기 시작하면서 장로단의 단장격인 감독의 권위가 커지고 마침내 이들이 사도들의 사목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5. 성령과 안수 : 감독과 장로와 부제는 민중에 의하여 선출되기도 하고(사도 6:3) 사도들이나 그 후계자들이 임명하기도 하였지만(디도 1:15), 언제나 성령의 은총을 주는 안수로써 그 직무를 수여받았고(1디모 1:18, 4:14, 5:22, 2디모 1:6, 디도 1:5),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당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사도 20:28, 1베드 5:2). 이 안수의 예식은 단순한 축복의 뜻만 가진 것이 아니고 실제로 성령의 은총을 주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부터 인정해 오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도 디모테오 후서 1장 6-7절을 신품성사의 근거로 명시하고 있다(Denz. 1766). 여기서 가톨릭 교회의 교계제도가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신품권(神品權)을 가진 제도임을 알 수 있다.

6. 사도들과 주교들 : 사도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사도들의 모든 직능을 계승하지는 않는다. 사도의 직능 중에는 복음을 선포하여 교회의 토대를 구축하는 직능과 이 토대 위에서 교회를 사목하는 직무이다. 전자는 사도들 자신의 생애에 한정된 것이나 후자는 세상 종말까지 계승된다. 후자는 즉 사목직은 신앙교리를 권위 있게 가르치고(1고린 5:15-17, 1디모 3:2, 디도 1:9) 성사를 집전하며(1고린 11:33-34, 1디모 2:1-15) 신자공동체를 다스리는 일이다(1디모 3:5, 2디모 2:14, 4:1-5, 1베드 5:1-14, 교회헌장 20). 한편 주교는 개인적으로 어는 특정 사도의 후계자인 것이 아니다. 주교는 단체로서의 사도단을 계승하는 주교단에 속하여 있는 까닭에서만 사도의 계통을 잇는 것이다.

7. 교황과 주교 : 주교직 자체가 하나이요 갈림이 없는 것이 되도록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 위에 두시고 그 안에 신앙의 일치와 상호 교류의 볼 수 있는 원리와 기초를 마련하셨다(교회헌장 18, 19, 마태 16:18, 에페 2:20 참조). 주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하나의 사도단으로 조직하셨다. 이와 같이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되어 주교단을 이룬다(교회법 330조). 주교단 안에 사도단이 영구히 존속하므로 주교단은 단장과 더불어 세계 교회에 대한 최고전권의 주체이다. 그러나 단장 없이는 권한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단장의 동의 없이는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교회헌장 22, 교회법 336조).

8. 주교단 : 주교단은 신품권과 교도권과 협의의 사목권에 있어서 사도단을 계승한 단체이며 그 안에 사도단이 존속하므로 전체 교회에 대하여 권한을 가지고 의무를 진다(교회헌장 22, 주교교령 4, 교회법 336조). 주교는 성사적 서품을 받고 주교단의 단장 및 그 단원들과의 교계적 친교로써 주교단의 단원이 된다(교회헌장 22, 주교교령 4). 주교는 안수와 성성(成聖)의 예절로써 성령의 은총을 받고 거룩한 인호가 박히며 성화하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임무를 받는다(교회헌장 21). 다만 이 임무는 본질적으로 주교단의 단장 및 단원들과의 교계적 친교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교회법 375조 ②).

9. 주교의 권리와 의무 : 지역교회의 사목 책임을 맡은 주교는 교황의 권위 밑에서 정상적으로 직접 교회를 돌보는 목자로서 교도직(敎導職)과 사제직(司祭職)과 사목직(司牧職)을 수행함으로써 주의 이름으로 자기 양들을 양육한다(주교교령 11). 교도직을 통해서 주교는 만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신앙에로 불러들이거나 그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한다. 또 그리스도를 알기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하느님을 현양하고 그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도록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길도 가르친다(주교교령 12). 사제직을 통하여 주교는 담당 지역교회를 상화시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의 의의가 빛나게 한다. 신품성사의 충만을 지니며 하느님 신비의 으뜸 관리자이자 전례생활의 감독자요 수호자이다(주교교령 15). 사목직을 통하여 주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알도록 하고 참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양떼를 보살핀다. 이러한 사목적 노력에 있어서 신자들도 적절히 교회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신비체 건설에 능동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의무와 권리를 인정한다(주교교령 16).

10. 교구장 주교와 명의(名義)주교 : 교구의 사목을 맡고 있는 주교를 교구장주교(episcopus dioecesanus)라고 하고 그 외는 명의주교(episcopus titularis)라고 한다(교회법 376조). 예를 들면 교황대사, 부(副)주교, 보좌(補佐)주교는 모두 명의주교이다. 명의주교가 생기게 된 것은, 7∼8세기 및 13세기에 중동과 소아시아 및 아프리카와 스페인이 이슬람교도들의 지배아래 들어가자 그곳 주교들이 서방 교회의 주교들에게 피난가서 보좌주교가 되는 동시에 광복의 그날을 고대하며 과거의 교구 명칭을 고수한데서 비롯한다. 그 명칭은 후임 보좌주교들이 계승하여 왔는데 광복의 꿈은 십자군 원정 때 잠시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러한 보좌주교를 ‘미신자들에 대한 주교’(episcopus in partibus infidelium)라고 불렀으나 교황 레오 13세는 이를 ‘명의주교’로 개칭하였다(1882년). ‘명의’란 지금은 소멸되었으나 과거에 존재했던 교구의 이름이다. 따라서 명의주교는 그 명의로 되어 있는 교구에 대하여 아무런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역대 교황은 명의주교의 제도를 응용하여 전교지방의 대목구장(代牧區長, Vicarius Apostolicus), 관리구장(管理區長, Administrator Apostolicus), 교황청 근무의 고위 성직자, 교황대사 등을 임명하였다.

11. 교구장 계승권이 있는 보좌주교와 없는 보좌주교 : 계승권이 있는 보좌주교와 계승권이 없는 보좌주교는 교구장 주교를 보필하는 명의주교란 점에서 같으나 전자는 교구장 계승권을 지니고 후자는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교회법 403조). 계승권이 있는 보좌주교는 주교좌의 공석이 있을 때 즉시 교구장주교가 되므로(교회법 409조 ①) 박해시대에는 계승권이 있는 보좌주교를 임명해두는 것이 상례였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조선대목구(代牧區) 시대에는 모든 교구장이 계승권이 있는 보좌주교를 거닌 분들이다. 이와 달리 계승권이 없는 보좌주교는 주교좌의 공석이 있어도 관할권자가 달리 정하지 않는 한, 새 교구장 주교가 법적 취임을 할 때까지 전임교구장 재임시에 총대리나 감목대리로서 가지고 있었던 권한만 보존한다. 또 교구장 직무 대행직에 지명되지 않은 계승권이 없는 보좌주교는 법률상 부여된 자기 권리를 교구장 직무 대행의 권위 아래 행사한다(교회법 409조 ③).

12. 교구과 관구: 유일한 가톨릭 교회는 다양한 지역 단위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교회들은 주로 교구이다(교회법 368조). 교구는 주교가 사제단의 협력을 받아 사목하는 하느님 백성의 일부이다(교회법 369조). 교구장 주교는 교황의 임명이나 인준을 받은 자로서(교회법 377조 ①). 만 75세 된 교구장 주교는 사표를 제출한다(교회법 401조 ①). 인접 교구들의 지역적 사정에 따라 공동사목 활동을 증진시키고 교구장 주교들의 상호결속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일정 지역을 관구로 통합한다(교회법 481조 ①). 관구의 설정, 폐지, 변경은 교회 최상권자의 권한에 속한다(교회법 481조 ③). 관구장 주교는 담당 관구의 대주교(Archiepiscopus)요 지휘자이다. 관구 산하 교구들에 대하여 신앙과 교회의 규율이 정확히 준수되도록 감독하고 혹시 남용이 있으면 이를 교황에게 보고하는 의무와 관구 관한 주교가 법정 순시를 게을리 하는 경우 이를 대신하는 권한 및 교구장 직무 대행이 법정 기일 안에 선출되지 않을 때 이를 임명하는 권한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그 밖의 통할권은 가지지 않는다. 다만 관구 내 모든 성당에서 그 성당의 본 교구장처럼 전례를 집전할 수 있다(교회법 436조 ①, ③). 총대 주교(Patriarcha)난 수석 주교(Primas)의 칭호는 라틴 교회에서는 명예 특권 외에는 아무런 통할권도 수반되지 않는다(교회법 438조). (鄭鎭奭)

[참고문헌] K. Rahner, Bishops: Their Status and Function, tr. E. Quinn, London 1974 / H.W. Beyer, epischopos, TWNT Ⅱ, 1935 / F.C. Baur, Uber den Ursprung des Episcopats in der chrislichen Kirche, 1838 / H. Kung, Structure of the Church, 1965 / J. Lecuyer, tudes sur la collegialite episcopale, 1964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981 / 鄭鎭奭, 敎階制度史, 1978.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주 [한] 主 [라] Dominus [영] The Lord [관련] 야훼

하느님의 칭호로서 성서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주 혹은 스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돈(adon)은 왕, 남편 등 우월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경칭으로, 또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인 야훼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하느님의 경칭으로 사용된 경우 그것은 하느님의 권력과 지배의 최고성을 표현하였는데 그 예로는 ‘주’(출애 23:17, 이사 1:24, 시편 4:13) ‘온 세상의 주권자’(미가 4:13) ‘모든 주인들의 주님’(시편 136) 등을 들 수 있다. 저작가 예언자 시대에 이 경칭은 야훼의 거룩한 이름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아모스서에 19번, 에제키엘서에 122번이나 나온다. 예루살렘도 솔로몬 궁정도 폐허가 되고(기원전 586년) 근동으로 이산된 상황에서 유태인은 회당(synagogue)에서 성서를 읽고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나 성스럽게 여긴 나머지 감히 부르지 못하여 아도나이(adonay, 나의 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하였다. 유배기 이후 야훼라는 이름에 대한 존경은 엄격하여 이 시대의 작품인 욥기, 전도서, 에스텔기, 역대기, 시편의 제2, 제3결집에는 ‘야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도나이라는 이름조차 부르기가 황송하여 하늘, 하늘의 아버지, 그 이름 등으로 하느님을 부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세기의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은 아도나이를 기리오스(주, kyrios, 호격은 kyrie),로, 라틴어 번역본에는 도미누스(주)로 각각 번역되었다. 이러한 호칭의 대체현상에서 신약성서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기리오스’가 지닌 의미가 특히 중요하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호칭 ‘주’가 쓰여졌다. 바울로와 예수 자신은 창조주 성부를 ‘하늘과 땅의 주인’(마태 11:25, 사도 17:24)이라 불렀다. 하느님에 대한 명칭으로서 ‘주’는 ‘야훼’ 대신 쓴 경우가 가장 많은 데 정관사를 쓴 경우(마르 5:19, 루가 1:6 등)로 쓰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른 경우(마르 13:20, 사도 7:49 등)가 있다. ‘주의 천사’(마태 1:20), 주님의 영광(루가 2:9), 주님의 종(루가 1:38) 등의 표현에는 야훼 대신 쓴 경우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가 주라고 불린 것은 꼭 한번 뿐이다. 4복음서에서 호격인 ‘기리에’가 가끔 쓰여지나 이는 단순히 ‘선생님’을 의미하였다. 루가는 ‘주(okupios)’를 15번이나 썼지만 이 사용법은 복음 전승상 후기시대 즉 성신강림 오래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지상생활을 회고하면서 예수를 호칭하던 데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4복음서에서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은 주로 부활 후의 사건을 서술할 때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의 대답은 부활하신 사람의 아들을 주님으로 긍정하는 외침이며 요한복음의 교의가 절정에 이르는 대목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스승’, ‘선생님’으로 불려졌고 부활하신 후 비로소 주님이라 불려진 것이다.

성 바오로에 의하면, 예수님이 주님의 지위를 획득하신 것은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기 때문이다(필립 2:8-9). 여기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 이름은 ‘예수’가 아니라 야훼를 대신하여 부르는 ‘주님’이다. 부활로써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승리자요 세상의 왕자가 되었으므로 부활 이전의 사람의 아들 메시아, 선생님, 예언자 등의 호칭은 하느님에 대하여 높이 올려지신 새로운 차원에서는 어울릴 수 없었고 강생 이전에 성부와 함께 누리시던 영광을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님이라 불러 마땅했던 것이다. 부활의 빛을 받아 제자들은 그분이 진실로 주님이시며 구약성서에서 야훼에 관하여 언급된 구절이 그분에게 적용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사도 2:34-36와 시편 110, 1고린 10:9, 민수 21:5, 사도 1:14-41). (⇒) 야훼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죄종 [한] 罪宗 [관련] 칠죄종

다른 죄의 근원(根源)이 되는 죄로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다른 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는 측면에서 최종이라 부른다. 예컨대 죄종의 하나인 교오(驕傲)에서 이기주의, 고집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교만하고 오만한’ 교오 그 자체도 죄이지만, 그에 의해 파생된 이기주의 등도 죄인 것이다. 죄종에는 교오, 간린(慳吝), 미색(迷色), 분노(忿怒), 질투(嫉妬), 해태(懈怠), 탐도(貪饕) 등 일곱 가지가 있다. 이를 칠죄종(七罪宗)이라 부른다. (⇒) 칠죄종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죄인 [한] 罪人 [라] peccator [영] sinner

광의적으로는 법률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인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한 사람을 지칭하는데, 특히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의 영원법(永遠法)에 반하는 생각, 말, 행동, 소망, 방심(放心) 등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하며, 성서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반드시 멸망할 사람을 가리키며, 또한 원죄(原罪)로 말미암은 모든 인류를 말한다. 하느님의 영원법이란, 하느님의 이성의지(理性意志)이며, 이는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 가운데, 또는 인간의 정신 가운데, 이성 및 양심 가운데에 빛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은 자연질서에 반한 행동, 자기의 이성이나 양심에 반한 행동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로마 2:15, 14:23).

죄인에는 대죄(大罪, mortale, peccatum grave)를 저지른 사람과 소죄(小罪, veniale, peccatum leve)를 지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하느님의 은총을 상실하게 된 자로, 영혼에 초자연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중죄인이며, 우상숭배, 살인, 간통 등이 이에 해당되며, 이 죄인은 교회에서 파문(破門)되어 왔다. 후자는 참회하고, 속죄행위를 하여 용서를 얻을 수 있는 죄인으로서, 영혼 속에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자를 말하나, 이 소죄를 거듭할수록 대죄에 떨어질 위험이 커진다는 논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 마음이 범행을 되풀이함으로써 일정 종류의 죄에 지향적인 경향을 띠며, 그 때문에 쉽게 또는 자주 같은 죄에 빠지는 사람 즉 재범자(再犯者, recidivus 또는 consuetudinarius)의 경우, 1회적인 결의 곧 통회나 결심에 의해서는 안되고, 격정(激情)을 극복하며 그런 성향을 뿌리째 없애도록 노력함으로써 보증된다고 본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이상의 구별을 견지해 오고 있으나,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자 또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자를 죄인으로 보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죄 [한] 罪 [라] peccatum [영] sin [프] peche

죄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모든 시대의 철학과 종교는 인간존재의 기본적 체험에 속하는 이 ‘신비’를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구원의 역사는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 편에서의 끊임없이 반복된 시도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의 충만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죄의 충만한 실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서 나오는 기쁜 소식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서는 ① 성서에 나타난 죄의 개념, ② 죄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고찰, ③ 신의 거부로서의 죄, ④ 사죄, 중죄, 소죄, ⑤ 결론의 순서로 고찰한다.

1. 성서에 나타난 죄의 개념 : 죄와 죄책(罪責)에 대해서 성서는 명료하고 완전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해도 의미심장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의 가장 심오한 본질은 하느님의 솔선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의 거부로 나타난다.

① 구약성서 : 구약에서는 죄를 하느님의 율법과 원의에 대한 침범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죄는 규율의 회피이고 침범이다.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불순명이다(신명 28:15-68). 창세기 3장은 낙원에서의 아담과 에와의 죄는 하느님 명령의 의식적인 침범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느님께 거역하는 그들의 반란은 신이 그들에게 준 것보다 더 소유해야 하겠다는 추정적인 원의에서 나온 것이다. 죄에 대한 구약의 가장 특징 있는 기술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죄는 계약의 신을 망각하는 것으로 고찰된다(호세 1:3, 에제 16:1-9).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이탈과 배은망덕으로도 고찰된다(이사 1:24, 아모 3:2).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은혜와 은총을 주시며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에게 당신의 계명에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 계명에 순명치 않고 계약을 파괴하였다.

② 신약성서 : 신약성서에서는 인간이 참회를 하고 그의 마음과 방향을 바꾸도록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죄는 주님께 대한 배은적인 도피로 고찰된다(루가 15:11-32, 탕자의 비유). 사도 요한과 바울로는 죄는 빛의 부인(요한 3:19, 8:12, 1요한 2:8-11, 에페 5:18-14), 진리의 부인(요한 8:44, 로마 1:18)으로, 고찰된다. 따라서 어둠과 거짓말과 상통한다. 사도 바울로는 그의 편지에서 죄의 성서적 개념에다 몇 가지 관점을 더 첨가하고 있는데, 인간의 나약으로, 하느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의 거부로 보고 있다(로마 1:18-32). 그는 또한 죄인은 하느님을 거슬러 증오 속에 살고 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로마 8:7-8, 5:10 참조, 에페 2:14, 골로 1:21).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느님 나라로부터 제외된다(1고린 6:9, 갈라 5:21). 또한 죄는 인간 자신의 몸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인간의 몸은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이다. 이 성전은 죄악으로 파괴된다(1고린 3:16, 6:19).

그리스도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야훼의 종이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인들의 구세주(마태 9:13, 루가 15:19)로 나타내시고,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는 하느님의 교양으로 나타내신다(요한 1:29). 만일 인간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긴다면 신앙과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정복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이 세상에서 아직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을 회심과 포기와 사랑에로 계속 초대하시며 이 같은 일을 교회에 위촉하셨다. 그리스도(지금은 당신의 교회)와 사탄, 빛과 어둠,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은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2. 죄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고찰 : 범죄의 가능성은 인간이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 인간의 자유의지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은 그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에서 필연적으로 선을 얻으려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과 부(富)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고 충동한다. 인간은 이 선과 부를 추구하는 데 전념하며 악을 행할 때에도 선의 가면 하에서 행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일시적이고 무가치하고 영구적인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래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진실되고 영구적인 선은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영광, 역사 안에서 하느님 계획의 실현, 인간과 세상의 구원에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죄는 인간의 참된 임무와 소명으로부터의 이탈과 탈선이다. 인간은 단순히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공동업무의 성취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고 생활한다. 따라서 모든 죄는 세 가지 불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 하느님을 거스르는 불의, ㉯ 인간 공동체와 이웃을 거스르는 불의, ㉰ 죄인 자신을 거스르는 불의이다. 이 말은 인간이 모든 죄에 있어서 이상 세 가지 침범에 대해서 심리적인 경험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직 신학적 차원에서 이 같은 불의가 항상 초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신의 거부로서의 죄 :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하느님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관점을 강조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에 대한 종교적 차원의 감각을 대부분 상실하였으며, 종교로부터 죄를 분리시키고 종교를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인들은 죄를 악이 아닌 하나의 불완전한 것으로 고찰한다. 이 같은 생각은 확실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이다. 죄는 확실히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은 다른 차원들의 기초가 되고 이 종교적 차원에서 다른 차원들은 그들 가치의 본연의 규범을 이끌어 낸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유래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고유한 임무와 목표를 부여해 주셨다. 그런데 죄인의 범죄행위는 하느님의 계획을 배척하고 그의 취향에 따라 다른 목표를 지향한다. 따라서 죄인들이 하느님과 그의 도움을 배척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기본적인 관계를 혼란시키고 이를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범죄로써 하느님께 자신의 예속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속의 거부는 최고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순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인간은 신이 창조물의 본성에 심어 주신 질서와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① 죄의 사회적 차원 : 현대인들이 죄의 사회적 차원에 대해서 갖는 의식은 매우 민감하다. 특히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하느님 사랑과의 관계가 적절히 표현되어야 한다. 이의 적절한 예가 사도 요한의 편지에 표현되어 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그 이유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1요한 4:20). 우리의 많은 죄는 이웃과 동료들에게 손해를 줄 뿐 아니라 악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같은 일은 불의와 악한 표양과 악한 협조 같은 죄에서 특히 잘 표출된다. 이 같은 범주에 사회의 건전치 못한 풍토의 조성과 묵인, 악에 오염된 주변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결여와 소홀 등이 포함된다.

한편 대부분의 개인적 특성을 갖고 있는 죄들도 사회적 차원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죄는 공동체의 최종임무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죄인은 자신의 모든 죄를 통해서 이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취향대로라는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개별적으로도 신비체의 회원이다”(1고린 12:27 참조).

그리고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은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만일 한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다른 지체들도 고통을 받는다(1고린 12:26 참조). 따라서 죄로 인하여 병중에 있는 지체들은 은총의 생활을 해치며 다른 지체에 도움을 줄 수 없을뿐더러 신비체 건설에 해를 가져온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비체에 있어서 죄의 결과는 본질상 사회적 차원을 갖는다.

② 죄의 개인적 차원 : 죄인이 자신의 죄로써 자기 자신을 추구하고 보다 용이한 길을 선택한다 하여도, 그의 마음의 심오한 곳에는 교활하고 정신적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며 그의 참된 행복과 그의 최종목적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서 지정되기 않은 목적에서는 자신의 행복과 목적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범죄로써 자신이 선택한 다른 목적으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신의 최종목적을 거부하게 된다. 죄는 또한 인간의 완전한 성숙과 발전을 방해하고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죄는 병든 인격의 증상이고 정신적 혼란과 질병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의 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으로 묘사된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이사 53:5, 1베드 2:24).

4. 사죄(死罪), 중죄(重罪), 소죄(小罪) : 인간은 가벼운 죄와 중죄, 단점들, 사소한 반칙과 범죄행위를 쉽게 구별한다. 또한 실천적 판단을 내릴 때, 누구든지 모든 죄가 다 같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반에서 행동한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죄의 서로 다른 중대성에 대한 신학적 설명은 몇 가지 논쟁과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 죄의 상이한 단계 : 구약성서에 어떤 죄들은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가져오고 그의 은총을 상실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죄들은 신명기의 저주에 나열된 죄들이다(신명 27:15-26). 신약성서는 몇 가지 심각한 죄와 죽음에 해당하는 죄(로마 1:28-31, 1요한 3:14), 혹은 하느님 나라로부터 제외되는 죄(1고린 6:9, 갈라 5:19-21, 에페 5:3-5, 묵시 22:15)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죽음의 죄라고 부르는 이 죄는 가장 큰 죄의 종류이다(1요한 5:16). 한편 가벼운 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 같은 죄들은 의인(義人)들에 의해서도 자행될 수 있는 죄들이다. 이처럼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하고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잘못에 관한 것이다(마태 6:12).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소죄’, ‘대죄’라는 구체적인 개념과 용어가 신약성서에 제시되지 않았어도 이와 같은 개념을 암시해 주는 표지들이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과 교회공동체를 거스르는 작은 결점과 중대한 잘못을 항상 뚜렷이 구별해 왔다. 사죄와 소죄의 구별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되었다. 모든 대죄는 그 수와 종류대로 고백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그러한 죄가 있는 사람들은 분노의 자식들이며 하느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소죄에 대해서는 고백의 의무가 없지만, 속죄를 장려한다. 소죄는 은총의 상태를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다(Denz, 1537). 사죄와 소죄의 두 범주는 윤리신학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윤리법칙의 모든 침해는 이 두 범주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윤리신학자들은 죄를 사죄·중죄·소죄의 3단계로 구별하려고 시도한다. 유죄적인 행위들의 분류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 구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죄와 소죄는 죄인의 주관적 조건의 단계이다. 즉 유죄행위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은총의 상태를 상실했느냐, 혹은 은총의 상태를 상실하지 않고, 다만 영성생활의 힘을 감소시켰느냐에 달린 것이다. 중죄와 가벼운 죄는 최종목적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객관적 질서에 초래된 손상의 관점에서 취한 단계이다. 윤리적 질서에 대한 객관적인 중대한 침해는 보통으로 사죄의 표지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 이유는 완전한 인식의 결여나 자유의지의 부족은 사죄의 근원을 주관적으로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객관적 윤리질서의 가벼운 침범은 보통으로 소죄의 표지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가벼운 침범이 때로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의식적인 반역과 반란의 기회가 될 때 사죄가 될 수 있다.

㉯ 사죄와 소죄의 본질 : 모든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소죄는 사죄처럼 하느님의 뜻에 직접적이고 완전한 거부를 가져오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게으르게, 불성실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윤리신학은 행위의 주관적 불완전성을 이차적 이유로 생각하고, 사물의 객관적 중대성에서 첫째 이유를 찾는다. 우리는 중대한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법을 침범하거나, 중대한 일이지만, 완전한 인식과 자유의지가 없이 하느님의 법을 침범할 때이다. 오늘날에는 소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행위의 주관적 불완전성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 이유로서 이때에는 ‘최종적 결정’이나 ‘기본적인 선택’을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사죄는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올바른 목표에 반대되는 ‘최종적 결정’을 하기 때문에 사죄가 성립된다. 이때에는 죄스러운 결정과 심각한 무질서에 대한 명백한 인식과 자유의지의 충분한 동의가 전제된다. 인간의 전 생애 중 사죄는 최종적이며, 취소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다. 인간이 생존하는 동안에는 참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종결정은 죽음의 순간에만 될 수 있다. 또한 사죄는 보통으로 중대한 대상에 의해서 야기된다. 다만 예외적으로 작은 대상이 사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죄와 소죄의 본질과 조건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활에 자신을 맡기기를 결정할 때 사죄를 범한다. 여기에는 항상 충분한 인식과 의지의 완전한 동의를 전제로 한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채우는데 있어서 단순히 소홀히 할 때 소죄를 범한다. 이 같은 일은 중요치 않은 일에 이어서 하느님의 법을 침범하는 것이다. 혹은 중요한 일이지만 불완전한 인식과 의지의 불완전한 동의로써 하느님의 법을 침범할 때이다.

5. 결론 : 오늘날 신자들의 교리교육과 사목의 쇄신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죄의식의 교육이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히 자비하신 사랑으로 회개가 실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죄의 그 중대성의 의식은 신앙의 차원이다. 죄인은 구세사적 차원에서 볼 때 계속 정화되어야할 것이다. 또한 죄와 죄의 결과에 대한 고찰은 교회에 부여된 화해성사의 차원에서 이해되도록 지향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성사적 화해는 죄인인 인간에게 전 구세사의 요약이다. 즉 그리스도의 승리에로의 참여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으심과 당신의 가장 완전하신 사랑과 순명의 행위로써 세상의 죄에 대해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兪鳳俊)

[참고문헌] Giannino Piana, Peccato, Dizionario Teologico interdisciplinare, vol.II, Marietti Roma, 1977 / C. Henry Peschke, Christian, Ethics vol.I, C. Goodlife, Neale, Alcester and Dublin 1978 / Bernard Haring, Free and Faithful in Christ, vol.I, St. Paul Publications, Middlegreen, Slough 1978 / 유봉준, 기초윤리신학, 가톨릭출판사, 서울 1978.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