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사윤음 [한] 斥邪綸音 [관련] 척사위정론

조선시대에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 그를 배척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던 윤음 즉 임금의 유시(諭示)이다. 18세기말 천주교의 수용 이후 조선왕조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 탄압했고 박해를 전후해서 법적 효력을 갖는 척사윤음을 반포했는데, 척사윤음은 1801, 1839, 1866, 1881년 등 모두 네 번에 걸쳐 반포되었다. ① 1802년 1월 25일(음 1801년 12월 22일) 반포된 <신유척사윤음>(辛酉斥邪綸音)은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것으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내용은 유교의 근본이념과 신유박해의 상황 및 결과가 약술되어 있다. ② 1839년 12월 16일(음 10월 18일) 반포된 <기해척사윤음>(己亥斥邪綸音)은 기해박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검교제학(檢校提學) 조인영(趙寅永)이 지은 것으로 태조(太祖) 이후 역대 임금들의 교서 · 교훈 · 격언 등을 근거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토론하고 있다. ③ 1866년 9월 12일(음 8월 3일) 반포된 <병인척사윤음>(丙寅斥邪綸音)은 병인박해와 제너럴 셔먼호(號)사건으로 인해 내려진 것으로 예문제학(藝文提學) 신석희(申錫禧)가 지었으며, 역시 척사위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④ 1881년 8월 7일(음 7월 10일) 반포된 <신사척사윤음>(辛巳斥邪綸音)은 천주교와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전국 유생(儒生)들의 격렬한 상소(上疏) 때문에 내려진 것으로 여기에는 한문으로 된 원문 뒤에 한글 해석이 첨부되어 있다. (⇒) 척사위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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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사위정론 [한] 斥邪衛正論

유교(儒敎)에서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定道)를 옹호하는 이론을 말하는데 이 말은 척사론(斥邪論), 척위론(斥衛論), 벽사위정론(闢邪衛正論), 벽위론(闢衛論), 벽사론(闢邪論), 벽이단론(闢異端論) 등의 용어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척사위정은 유교의 행동규범 속에서 진리를 옹호하고 사악함을 배척함으로써, 또 사상적으로는 반(反)유교적 사상들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타파함으로써 진리 곧 유교를 수호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척사위정은 유교이념의 실현을 위한 사상적 체계이지만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하던 봉건시대에 있어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사회와 지배이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때로는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고 고착된 규범체계에 순종만을 강요하는 부정적 기능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유교이념과 유교사를 통해서 볼 때 척사위정의 이념적 출발은 중국 요 · 순(堯舜) 시대에서 시작되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당대(唐代)의 한유(韓愈)를 거쳐 송대(宋代) 주자(朱子)의 ≪변이단류≫(辨異端類)에서 이념적 체계가 확립되고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주자학과 양명학(陽明學) 두 학파의 대립에서 정통성 논쟁에 대한 척사위정론이 발생하며 그 뒤 17∼19세기까지 그리스도교와 서양사상에 대한 척사위정론이 대두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고 조선왕조가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하여 창건되면서 벽불숭유(闢佛崇儒)의 척사위정론이 발생했고, 이어 18세기말 천주교가 수용된 후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구과학기술을 수용하여 타락한 지배체제를 개혁하려는 실학운동과 천주교를 신앙하는 서학운동이 발생하자 천주교와 서양을 배척하는 척사위정론이 발생했는데, 19세기말에 이르러 척사위정론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 위협 속에서 수구파(守舊派)의 이념적 배경이 되어 민족의식의 발생을 자극하는 한편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어난 유생(儒生)들의 항일무장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배척의 척사위정론은 17세기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에서 처음 보이는데, 여기서 이익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 끝에 천주교는 사람들을 미혹에 빠지게 하는 종교라고 배척하고 있다. 이외에 17∼18세기의 문헌으로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 신후담(愼後聃)의 ≪서학변≫(西學辨), 이헌경(李獻慶)의 ≪천학문답≫(天學問答), 홍정하(洪正河)의 ≪증의요지≫(證疑要旨) 등에서도 천주교 교리에 대한 유교적 비판 내용이 담긴 척사위정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항로(李恒老)의 ≪벽사록변≫(闢邪錄辨), 이정관(李正觀)의 ≪벽사변정≫(闢邪辨正), 김치진(金致辰)의 ≪척사론≫(斥邪論), 김평묵(金平默)의 ≪벽사록≫(闢邪錄), 황필수(黃必秀)의 ≪척사설≫(斥邪說) 등의 척사위정론들은 학문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서양세력에 대한 배척적 증오감에 우러난 것이며 이 때문에 이후의 척사위정론은 편협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이러한 척사위정론을 근거로 조선시대에는 1801, 1839, 1866, 1881년 네 번에 걸쳐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었는데, 이는 곧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천주교 박해는 척사위정론을 사상적 근거로, 또 척사윤음을 법적 근거로 해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洪以燮, 朝鮮儒家의 斥邪論에 대하여, 白性郁回甲論集, 東國大學校, 서울 1959 / 琴章奉, 조선시대 유학의 정통이념과 이단비판, 儒家와 韓國思想,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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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사론 [한] 斥邪論 [관련] 척사위정론

⇒ 척사위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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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한] 蔡濟恭

채제공(1782∼1799). 문신.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본관은 평강(平康),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응일(膺一)의 아들. 1743년(英祖 19년) 정시문과 병과(庭試文科丙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이어 수찬(修撰) · 교리(校理)를 거쳐 1753년 호서 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가 되어 균역(均役), 염세(鹽稅)의 실시에 대한 민의(民意)를 파악, 왕에게 보고하였다. 1758년 도승지(都承旨)로 ≪열성지장≫(列聖誌狀)의 편찬에 참여한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예조참판,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1771년 호조판서 재직시, 동지사(冬至使)로 청(淸)에 다녀와 평안도 관찰사, 예조,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77년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벽파(僻派)의 모반음모를 여러 차례 적발, 1780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권을 붕괴시킨 뒤, 정조(正祖)를 보필하여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국정을 시행케 하였다. 1788년 우의정, 1789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1791년 신해(辛亥)박해가 일어나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서 공서파(攻西派)에 맞서 천주교인을 옹호하여 그 결과로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좌의정에 복직되었고,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 뒤 천주교의 신봉을 어는 정도 묵인하는 온건적 정책으로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여러 번 사직, 또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그 때마다 정조의 신임으로 복직되었다. 사후(死後)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로 말미암아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관직을 추탈당했으나 1823년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저서로 ≪번암집≫(樊巖集)이 있다.

[참고문헌] 崔珖, 樊巖 蔡濟恭의 西學觀硏究, 史叢, 제17, 18집, 高麗大史學會,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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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한] 創造主 [라] creator [영] creator [관련] 창조1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신, 즉 하느님에 대한 칭호이다. 창조주로서 하느님은 무에서(ex nihilio)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하느님의 창조행위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무엇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창조는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 교회는 가장 오래된 라틴어의 사도신경에서 이미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임을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통하여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표명하고 있다. (⇒) 창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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