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의 [한] 李在誼

이재의(1785~1868). 세례명 토마스. 이승훈(李承薰)의 손자. 강원도 정선(旌善) 출신. 정하상(丁夏祥)과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교리를 배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복사로 일하면서 주교를 도왔다. 김대건(金大建) 부제(副祭)가 입국할 때 의주(義州) 변문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인도했고, 김 부제가 중국 상해로 건너갈 때 동행하여 그 곳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리를 더욱 깊이 연구한 뒤 페레올(Fereol, 高) 주교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홍주(洪州)로 피난하여 화를 면했으나 1846년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1868년 4월 3일(음 5월 25일) 그는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국내로 인도해 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28일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61세의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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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언 [한] 李日彦

이일언(1766~1839). 순교자. 세례명 요셉.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입교 연도는 미상이나 1801년 박해 때 체포된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열심히 신앙을 지켰던 것 같다. 체포된 그는 경상도 안의(安義)로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다시 체포되어 10년간 옥중 생활 끝에 1815년에 체포되었다. 1826년 5월까지 안의에서 살다가 전라도 임실(任實) 어느 외딴 마을로 이사해 살았는데, 1827년에 박해가 다시 있자, 또다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곧 집행되지 않고 12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고생하다가 1839년 5월 29일 순교 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가족들이 울려 따라 오는 것을 보고, 그는 “내 여러 해 동안을 옥에서 고생하다가 이제야 천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슬퍼말고 나의 행운을 기뻐하라. 그리고 너희들도 훌륭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고요히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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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덕 [한] 李仁德 [관련] 이영덕

이인덕(1818~1840).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세례명 마리아. 성녀 이영덕(李榮德)의 동생.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인인 외할머니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모친 조 바르바라,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6월 기해(己亥)박해로 모친,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堂峴]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 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 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 이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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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한] 李瀷

이익(1681~1763). 이조 중엽의 실학자(實學者). 자(字)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일생을 학문에 전심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많은 장서를 토대로 경전(經典) 정주학(程朱學)을 설립하고 이황(李滉)의 글을 탐독하여 사회현실을 역사적으로 고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실증적, 비판적 태도로 학문에 접근해야 한다는 이론을 세웠으며, 모든 학문은 사회에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두어 유학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편견없이 이를 소화 소개 하였다. 즉 이익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李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발문(跋文)을 지은 바 있는데, 천주교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를 비슷한 것으로 보았고, 또한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판토하(Pantoja, 龐-我)의 저서인 ≪칠극≫(七克)에 대한 비판을 하는 가운데 ≪칠극≫의 ‘七’자는 유학의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기(己)를 풀이한 각주(脚註)인 것이라 하여, 유교의 윤리와 천주교의 윤리가 비슷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익은 순수한 학자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 소개하였고, 지리학(地理學) · 의학(醫學) 등에 있어서도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수립 이를 연구하여 보급시켰다. 저서로는 ≪성호사설≫, ≪성호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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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명 [한] 李頤命

이이명(1658~1722). 문신. 자는 양숙(養淑), 지인(智人). 호는 소재(疎齋).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 이경여(李敬與)의 손자. 대사헌 이민적(李敏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숙부 이민채(李敏采)에게 입양되어 성장하였다. 1680년(숙종 6년) 별시 문과에 급제, 홍문관의 정자(正字) · 박사(博士)를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고 다시 16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이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가 1692년 다시 남해(南海)로 이배되었다. 2년 후인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유배에서 풀려나와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재등용되어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대사간을 역임했으나 1698년 형 이사명(李師命)의 죄를 변호하다가 다시 공주(公州)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다시 유배에서 풀려나 형조참판 · 예조판서 · 대사헌 · 이조판서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05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720년 숙종이 사망하자 고부사(告訃使)로 청(淸)에 가서 당시 북경(北京)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쾨글러(Kogler, 중국명 載進賢)와 수아레스(Saurez, 중국명 蘇林)를 만나 이들과 서학(西學)에 대해 담론하며 친교를 맺었고, 이듬해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갖고 귀국하여 서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국내에 이를 소개하였다.

1722년 왕의 병을 조작해서 발설하고 왕제(王制)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케 했다는 죄목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목호룡(睦虎龍)의 무고를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영조(英祖) 즉위 후 신원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소재집≫(疎齋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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