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염 [한] 鄭鐵艶

정철염(1817∼1846).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가타리나. 경기도 수원(水原)의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해서 포천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양반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주인 가족의 한 사람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20세 되던 해 동짓날 주인으로부터 미신적인 동짓날 행사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주인에게 혹독한 매를 맞았고 이듬해 봄에 다시 그런 사태가 일어나서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았다. 그 후 1845년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가정부로 들어가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고,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되자 현석문(玄錫文)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던 중 7월 11일 현석문, 김임이(金任伊), 이간난(李干蘭), 우술임(禹述任)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한결같은 신앙으로 이겨내고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몸으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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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상 [한] 丁哲祥

정철상(?∼1801). 순교자. 세례명은 가롤로. 정약종(丁若鍾)의 장남.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부친에게 천주교를 배워 부친의 모범을 따라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20세경인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부친이 체포되자 감옥 근처에 머무르며 부친을 봉양했고 이해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자마자 이 날로 곧 체포되어 5월 14일(음 4월 2일) 최필제(崔必悌), 정인혁(鄭仁赫)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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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한] 鄭鎭奭

정진석(1931∼ ). 주교. 제2대 청주(淸州) 교구장. 세례명 니콜라오. 서울 수표동에서 출생. 계성보통학교와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입학했으나 6.25동란으로 서울대를 중퇴하고 1954년 성신대학(聖神大學)[현 가톨릭大學]에 입학, 1961년 동(同)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중림동본당 보좌신부, 성신중 · 고등학교[소신학교] 교사를 거쳐 1962년 서울대교구 법원 서기, 1964년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1965년 서울 대교구장 비서 겸 상서국 부국장, 1966년 상서국장, 1967년 성신중 · 고등학교 부교장 등을 역임한 후 1968년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원에 유학, 1970년 동 대학원에서 교회법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고 귀국하자 곧 공석 중이던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3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현재 청주교구장으로서 청주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고 있으며 이외에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사목주교위원회, 200주년 주교위원회 등의 위원과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담당 주교 및 평신도사도직 전국단체인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한국레지오마리에 등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 ≪교회법 원사(源史)≫(분도출판사), ≪교계제도사≫(성 바오로출판사, 1974), ≪목동의 노래≫(가톨릭출판사), ≪라디오의 소리≫, ≪라디오의 메아리≫, ≪성년 마리아 고레띠≫(譯), ≪억만인의 신앙≫(가톨릭출판사), ≪칠층산≫(譯, 성바오로출판사), ≪질그릇≫(가톨릭출판사) 등이 있다.

[참고 : 정진석 대주교는 1998년 5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현재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사목중이다. 그리고 현재 청주교구 제3대 교구장은 1999년에 착좌한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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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한] 鄭芝溶

정지용(1902∼1950). 시인. 세례명 프란치스코. 아명은 池龍.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忠北 沃川郡 沃川面 下桂里)에서 부(父) 정태국(鄭泰國)과 모(母) 정미하(鄭美河)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뒤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2세 때인 1913년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하였다. 1918년 휘문고보(徽文高普)에 진학,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12월 문학지 <서광>(曙光) 창간호에 소설 <삼인>(三人)을 발표하고 김화산(金華山) · 박팔량(朴八亮) · 박제경(朴濟瓊)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만들어 사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4년 휘문고보의 장학생으로 일본 교오또(京都)의 도오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 때 영세 · 입교하였다. 1926년 교오또의 유학생 문학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 <슬픈 인상화> · <파충류 동물> 등 모더니즘적인 시를 발표하면서 공적인 문학활동을 시작, 이후 1929년 도오시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의 시 전문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 일어로 된 많은 시들을 발표하여 당시의 일본의 대표적 시인 가따하라(北原白秋)의 호평을 받았다. 1929년 도오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명동본당 청년연합회 회지 <별>의 편집에 참가하여 장면(張勉) · 박준호(朴準鎬) 등과 청년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30년〈시문학〉(詩文學)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발히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가톨릭청년>이 창간됨과 동시에 편집고문이 되었고, 창간호에 <해협의 오전 2시>를 발표하고 이후 계속해서 <가톨릭청년>지에 <임종> · <별> · <갈릴레아바다> · <승리자 김 안드레아> 등 많은 종교시들을 발표하였다. 그 뒤 <조광>(朝光), <조선문단>(朝鮮文壇), <삼천리>(三千里) 등 유수한 문학지에 서구(西歐) 모더니즘적인 성향을 탈피한 독특한 동양적 모너니즘의 시들을 발표, 시인으로서 한국문단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 박목월(朴木月) · 박두진(朴斗鎭) · 김종한(金鍾漢) · 이한직(李漢稷) · 박남수(朴南洙) 등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시켰고, 광복이 되자 휘문고보 교사를 사임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 이화여대의 전신) 문과과장으로 대학 강단에 서서 라틴어와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1946년 <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경향신문 주간(主幹)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이듬해 이화여대에 복직하는 한편 서울대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1948년 대학 강단을 떠나 녹번동의 초당에서 독서와 서예로 소일하였다. 6.25동란 중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이광수(李光洙) · 계광순(桂光淳) 등 납북 인사 33인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유엔군의 폭격으로 폭사당하였다.

정지용은 최초의 모더니즘 시인으로, 그리고 그것을 자기 세계 안에 융화시켜 동양적 · 목가적 모더니즘의 세계를 창출한 시인으로서 아울러 가톨리시즘을 추구했던 시인으로 한국문단사에 있어서 최대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 時文學社, 1935), ≪백록담≫(白鹿潭, 文章社, 1941), ≪지용시선≫(芝溶詩選, 乙酉文化社, 1946) 등을 남겼고, 이외에 시론집 ≪지용문학독본≫(芝溶文學讀本, 博文出版社, 1949)과 산문집 ≪산문≫(散文, 同志社, 1949)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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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수도회 [한] 定住修道會 [관련] 수도회

⇒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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