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권 [한] 李太權

이태권(1781~1839).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1791년 포졸에게 잡혀 수감되었다가 배교로 석방되었다. 이 때 아버지 이무명은 동생 이여삼과 함께 전라도 금산(錦山)으로 피신하였으나, 금산에서 1801년초 잡혀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 때 이태원도 다시 체포되어 그들은 공주감영으로 다시 이송되어 아버지는 전라도로 유배되고, 이태권과 숙부 이여삼은 석방되었다. 1810년 전라도로 유배된 아버지는 1804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이태권은 공주로 갔으나 그 곳에서 다시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렇듯 그는 심약하여 배교로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 뒤로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켰다. 1827년 그는 세 번째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투옥되었는데, 이번에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리하여 10여년에 걸친 옥중생활을 이겨 나가 1839년 5월 29일 58세로 평소에 바라던 참수치명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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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원] Italy

지중해 중앙부, 북서에서 남동으로 약 1,200㎢에 걸친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두 섬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공화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면적은 30만 1,225km2, 인구는 약 5,674만명(1982년 추계)이다. 57년 혹은 59년에 로마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는 네로의 박해가 극심하여 교회는 지하교회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313년 그리스도교가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으며 로마의 주교들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뒤 로마는 서방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로 그 권위를 확고히 다졌다. 중세의 이탈리아는 교황, 황제, 국왕, 도시국가간의 제휴와 대립 속에서 성장해 왔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등지에 개혁교회가 세워졌으나 가톨릭개혁과 예수회의 활동으로 그레고리오 13세 때에 다시 가톨릭국으로 복귀하였다. 근대에 발생한 국가 통일운동은 ‘자유국가에 자유교회’라는 구호 하에 가톨릭의 비국교화를 주장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가톨릭 교회는 1871년 레오 13세의 회칙으로 그들의 반대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라테란조약에 의해 가톨릭은 다시 국교로 인정되고, 이탈리아정부는 바티칸시국의 주권이 교황청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282개의 교구가 있으며 국님의 98%인 약 5,532만 2,000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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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훈 [한] 李致薰

이치훈(?~?). 이승훈(李承薰)의 아우. 서울에서 이동욱(李東郁)의 2남으로 태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 조정에 천주교 탄압의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자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천주교인인 형 이승훈에게 배교를 강요, 이승훈을 배교시켰다. 그러나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이 일어나자 천주교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승훈과 함께 체포되어 거제도(巨濟島)에서 유배 중,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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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체 [한] 李杕

이체(1840~1911). 중국인 예수회 신부. 원명은 호연(浩然), 세례명 라우렌시오. 자는 문어(問漁). 호는 대목재주(大木齋主). 중국 강소(江蘇)에서 태어났다. 상해(上海)의 서가회공학(徐家滙公學)에서 공부한 후 1862년 예수회에 입회, 1872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예수회 선교사 조톨리(Angelo Zottoli, 중국명 晁德菈) 신부를 도와 ≪진교자증≫(眞敎自證) 간행에 참여하고 이후 6년간 전교활동에 종사하였다. 1878년부터 상해의 예수회 신학교에서 라틴어를 강의하면서 1879년 <익문록>(益聞錄), 1887년 <성심보>(聖心報) 등의 교회잡지를 창간하는 한편 교회서적과 종교 · 철학에 관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1906년 진단학원(震旦學院)의 힘쓰다가 1911년 사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이굴≫(理窟), ≪신경역의≫(新經譯義), ≪철학제강≫(哲學提綱) 등이 있고 편저로 서광계(徐光啓)의 문집인 ≪서문정공집≫(徐文定公集)이 있으며 이외에 60여종의 저술을 남겼다.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香港公敎眞理學會, 香港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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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본당2 [한] 利川本堂

수원교구 소속 본당. 이 본당은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주보로 1941년 남곡리본당에서 분할되어 그 해 7월 4일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박동헌 신부는 남곡리본당에 재임 중 신자가 불과 몇 명밖에 안 되던 이천읍을 왕래하며 천주교를 개척, 그의 열성으로 교세가 늘어가자, 교구에서는 1940년 장래에 대비하여 이천읍 중리(中里) 241-1번지에 740평의 교회부지를 사 놓았다. 박 신부는 부임하던 해 11월에 성당대지 안에 있는, 수백년 전부터 이천부자와 군수가 살던 한옥을 사서 성당으로 개조하여 임시본당으로 삼았다.

본당 창설 당시의 관할지ㅣ역은 이천국과 광주군 도척면(廣州郡 都尺面) 일부로 공소는 12개소에 신자 총수는 812명이었다. 본당회장은 홍숙(洪塾, 마르코). 1941년 12월 24일 제1차 회장피정이 개최되고 청년회도 조직되었다. 1944년에는 1,072명으로 교세가 신장하였다. 이 본당은 기초를 다진 박동헌 신부가 1948년 2월에 떠난 뒤,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부임하여 그해 4월에 성당을 증축하였다.

교세의 확장으로 1950년 4월에는 여주본당이 여기에서 분할 독립하고, 6.25동란으로 성당이 전소되어, 1953년 2월 창전리(倉前里) 산 9의 3번지에 새 부지를 마련, 성당과 사무실을 신축하였다. 사제관은 1954년 1월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여 지었다. 1958년 6월에는 광주(경안)본당이 이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1959년에 창전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전되고, 현 성당의 낙성기도 가졌다. 1963년 신원식(申元植, 루가) 신부가 파견되었으며, 본당 사제관도 완성되었다. 1980년에는 두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본당 사제관도 완성되었다. 1983년 현재 신자총수는 1,527명이며 공소는 14개소.

초대 본당신부인 박동헌 신부 이후 이 본당을 맡아 온 신부는 다음과 같다. 2대 장금구, 3대 이계선(李啓先, 레오), 4대 김유룡, 5대 박지환(朴址煥, 요한), 6대 정욱진(丁旭鎭, 토마스), 7대 신원식, 8대 장근실(張根實, 비오), 9대 하한주(河漢珠, 요한), 10대 백명기(白明基, 마르코) 신부, 그리고 현주임신부로 있는 11대 윤석원(尹錫元, 요셉)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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