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주 [한] 洪秉周

홍병주(1798∼1840).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성인 홍영주(洪永周)의 형. 세례명 베드로.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조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부친을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주, 그 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9월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준 사실이 탄로나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하고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판서에게 직접 신문을 받지 않았지만 형조판서로부터 배교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형리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견뎌 내어 1840년 1월 31일 6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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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한] 洪大容

홍대용(1731∼1783). 실학자.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홍지(洪之), 본관은 남양(南陽), 역(櫟)의 아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 북학파(北學派)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군국(軍國)과 경제(經濟)에 관한 학문에 전심하였다. 1765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가는 숙부 홍억(洪檍)을 수행, 북경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均), 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문물을 견학하는 한편 예수회 선교사로 당시 흠천감정(欽天監正)이던 할레르슈타인(Hallerstein, 劉松齡)과 부감(副監)이던 고가이슬(Gogeisl, 鮑友官) 신부들을 만나 서구 과학기술과 천주교에 대해 토론한 후 여러 서학서를 갖고 귀국하였다. 1775년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을 거쳐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 감찰(監察),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역임하고 1780년 영주군수(榮州郡守)가 되었다. 지구의 자전을 설파했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한 경제정책과 8세 이상의 모든 아동들을 취학시켜야 한다는 교육제도를 주장했으며, 또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등 간쟁기관(諫爭機關)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어야 할 것과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정이 노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 봉건적 신분제도의 타파를 부르짖었다. 또한 서학 수용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적인 서학의 기적 측면(器的 側面)은 수용하되 윤리적인 이적측면(理的 側面)은 배격하는 북학파 고유의 이원론적(二元論的) 입장을 고수하였다. 저서로 ≪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으며 편저로 ≪건정필담≫(乾淨筆談), ≪의산문답≫(毉山問答), ≪유포문답≫(劉鮑問答), ≪주해수용≫(籌解需用),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삼경문답≫(三經問答), ≪심성문≫(心性問), ≪계방일기≫(桂坊日記), ≪항전척독≫(抗傳尺牘) 등이 있다.

[참고문헌] 熱河日記 / 儒敎淵源 / 文一平, 實事求是派의 學風, 湖岩全集, 권2, 1939 / 金聖七, 燕行小攷, 歷史學報, 1960 / 朴鍾鴻, 韓國에 있어서의 近代的인 思想의 推移, 大東文化硏究, 1963 / 千寬宇, 洪大容, 韓國의 人間像, 제4권 / 趙珖, 洪大容의 政治思想 硏究, 民族文化硏究, 第14號,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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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낙임 [한] 洪樂任

홍낙임(1741∼1801). 문신. 천주교인, 세례명은 미상. 자는 숙도(叔道), 본관은 풍산(豊山), 영의정 봉한(鳳漢)의 아들. 176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고 그 뒤 정언(正言), 문학(文學), 사서(司書)를 거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윤행임(尹行恁)의 권유로 입교,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제주도(濟州島)로 유배되었으나 곧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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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낙안 [한] 洪樂安

홍낙안(1752∼?).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풍산(豊山), 후에 희운(羲運)으로 개명, 경북 안동(安東)에서 홍복호(洪復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이듬해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이 일어나자 공서파(功西派)의 선봉에 서서 신주(神主)를 불사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을 고발하는 장서(長書)를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올리는 한편, 진산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에게 사건의 전모를 수사하게 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시키게 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서 권일신(權日身)을 사학(邪學)[천주교]의 교주라 고발하고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학서(西學書)를 반촌(泮村)에서 강습(講習)한 사실[丁未泮會事件]을 고발하여 권일신과 이승훈을 체포케 하였다. 아들 원모(元謀)도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김순성(金順性)과 결탁하여 많은 천주교인을 고발, 처형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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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낙민 [한] 洪樂敏

홍낙민(1740∼1801). 순교자. 세례명 루가. 충청도 예산(禮山)사람으로 일찍이 진사(進士)고시에 합격하여 서울에 이사하여 살고 있으면서, 이승훈, 정약용 등과 가까이 지내는 가운데 1784년에서 1785년 사이에 입교하였다. 그는 교리에 밝은 교우로 이름이 나, 1791년 정조(正祖)의 강압에 못 이겨 한때 배교했으나, 그 뒤 계속 기도를 드리고 대소재(大小齋)를 드려 1795년에 체포되어 15일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바 있었다. 1797년에 정조에게 천주교에 대한 보고를 올릴 때, 그 보고가 모호하다는 책망을 들은 뒤, 천주교를 모함하고 교인들을 가혹하게 처단해야 한다는 소(疏)를 다시금 올렸다.

그러나 1801년 대박해로 모든 천주교인에게 역률죄(逆律罪)를 적용하여 체포토록 하니, 홍낙민에게도 2월 9일 체포령이 내려 금부(禁府)에 수감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무수한 고문을 받았지만,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를 달게 받았다. 그는 이러한 고문과 죽음을 전날의 배교에 대한 벌로 기꺼이 받는 듯했으며,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이제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4월 8일 이승훈(李承薰), 최창현(崔昌顯), 정약종(丁若鍾), 홍교만(洪敎萬)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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