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영 [한] 李福永

이복영(1905~1958). 서울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 요셉. 충북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忠北 丹陽郡 丹陽面 下坊里)의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은 그의 17대 조(祖)이고, 1801년 순교한 이윤하(李潤夏)는 그의 12대 조가 된다.

1917년 당시 용소막본당 주임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신부의 권유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 1930년 10월 26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서품 후 안성본당 보좌로 첫 성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교구장 비서(1932-1933년), 소신학교 교사(1933-1936년), 안성본당 주임(1936-1942년), 교구당가(1942-1946년) 등을 거쳐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속간에 관여하며 경향신문사 총무로 활약하였다. 1948년 수원본당(현재의 북수동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어 사목하던 중 1958년 8월 25일 서울 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선종,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와 동창신부로는 노기남(盧基南) 대주교, 윤형중(尹亨重) 신부, 방유룡(方有龍) 신부, 양기섭(梁基涉) 신부 등이 있으며, 교회음악가로 명성을 날렸던 이문근(李文根) 신부는 그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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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명 [한] 李福明 [관련] 리델

리델(Ridel) 주교의 한국명. ⇒ 리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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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환 [한] 李普煥

이보환(1893-1944). 서울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 요셉. 황해도 수안군 사창리(社倉里)에서 태어났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6월 21일 사제로 서품되어 주교관에 설치된 시복조사회(諡福調査會) 비서관으로 재직하였다. 그 뒤 강원도 원주(1922~1923. 5), 황해도 은율(1923. 5~1928. 5), 신계(1928. 5~1933. 5), 강원도 횡성(1933. 5~1937. 7), 강원도 사창리(1937. 7~1941. 6), 송화(1941. 6~1942. 5) 등지에서 본당신부로 사목했고, 1942년 5월부터 강원도 평강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중 1944년 3월 9일 황해도 재령본당의 해성병원에서 지병인 심장성 천식으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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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현 [한] 李步玄

이보현(1768-1795). 순교자. 세례명 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唐津郡 古德面) 출신. 어려서부터 부친을 잃었기 때문에 무궤도한 생활을 하다가 24세 때 황심(黃沁,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후부터는 전과는 전혀 사람이 달라져 단정한 처신과 온화한 생활을 하여 모든 사람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의 신심은 날로 굳어져 보속과 고행을 통해 이를 더욱 다졌다.

1788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리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1795년 3월 15일 드디어 잡힌 몸이 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배교치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를 그들에게 설교하였다. 마침내 고향인 해미(海美)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배교치 않으므로 1795년 12월 15일(음) 장살(杖殺)되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며칠 뒤 그의 시체를 거두어 보니, 고문으로 받은 상처는 간 데 없고, 웃음을 띤 온화한 모습에 이를 본 외교인들은 크게 감동되어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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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한] 李檗

이벽(1754∼1786).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덕조(德操), 혹은 벽(蘗)이라고도 하며, 호는 광암(曠菴),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權哲身) · 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윤리서(倫理書) 등을 함께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 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이벽은 이 때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천주교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1783년 정약전 · 약종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존재와 그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면성, 후세에서의 상선벌악(賞善罰惡) 등의 철학적 논제(論題)에 대해 토론하였다. 초보적인 지식 속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던 이벽은 178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것을 받아든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 통해 이벽은 종교의 진리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고, 중국과 조선의 미신에 대해 철저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 연구하였다. 이벽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水標橋)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전파에 나섰다.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김범우(金範禹), 지황(池璜) 등의 중인계급과 마현의 정약전 · 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림(儒林)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중 이가환(李家煥)은 “서교(西敎)가 비록 명설(明說)이긴 하지만 정학(正學)은 아니다”고 하면서 이벽을 토론으로써 설득하려 했으나 이벽의 정치한 논리와 장하(長河) 같은 웅변에 오히려 설득당했다 한다. 이기양(李基讓)도 이벽과 토론했으나 이벽이 세상의 기원,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영혼의 본성, 후세의 상벌과 조화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785년 중인 김범우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화로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태학생(太學生) 정숙(鄭淑)은 천주교 신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통문(通文)을 돌려 천주교인들과는 완전히 절교하라고 권고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벽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배교만을 강요하였다. 이벽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이벽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배교적(背敎的) 행위에 대하여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교회사적으로 보아 이 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의 선구자로 위치 지을 수 있다. 물론 이벽 이전에도 천주교에 접한 사람은 많았다. 조선 후기 사회적인 모순이 누적되면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불과한 주자학에 대해 심한 반발을 느낀 많은 학자들이 서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학자들은 서학의 과학기술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만은 이단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학을 학문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종교로서 받아들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 약종 형제,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 천주교 창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 이벽이다. 그는 1777년 이래 주어사, 천진암에서 있었던 수사학(洙泗學)적 분위기의 강학을 그리스도교 진리 탐구와 실천적인 분위기로 바꿨고,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여 중국에 가 영세를 받게 함으로써 1784년 많은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하게 하였다. 한국 천주교가 이 해를 천주교 창설의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달리 짧았던 생애와 박해로 인한 유작(遺作)의 부족으로 이벽의 사상을 자세하게 알기가 어렵다. 이벽의 작품으로 주장되는 것은 ≪만천유고≫(蔓川遺稿) 속에 수록되어 있는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요지>(聖敎要旨)에 불과하나, 이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와 사료 비판이 계속 요청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정약용의 ≪중용강의≫(中庸講義) 세주(細註)에 언급된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벽의 서학사상도 다른 남인신서파(南人信西派)와 같이 전통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경서(經書)에도 박학다식했던 이벽은 주자학을 선유(先儒)들의 사상에 비춰 비판하면서 진유사상(眞儒思想)인 수사학적인 사상체계에 도달하였고,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補儒論)을 흡수하여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이 싹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보유론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주장한 것으로 중국의 근세사상계에 큰 파문을 던진 것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남인신서파의 복고주의적인 사상체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벽은 ≪천주실의≫와 함께 ≪칠극≫(七克), ≪영언여작≫(靈言蠡勺),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을 접하면서 신의 존재, 원죄, 영혼불멸, 사후(死後)의 세계, 서양의 신학에 대한 이해 등의 사상 폭을 넓히고 깊게 하였다. 이로써 이벽은 유교사상과 천주교 사상을 접맥시켜 한국의 천주교가 꽃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인물로 기록될 수 있게 된다. 이벽의 사상체계와 지식은 정약용에게 전달, 수용되었다.

[참고문헌] 홍이섭, 이벽-한국 근세사상상의 그 위치, 사회과학연구회, 사회과학, 3권, 한국교회사연구논문선집 I에 재수록, 1960 / 홍이섭, 서학사상상의 이벽,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 샤를르 달레 原著,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분도출판사, 1979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릭출판사, 1979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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