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일 [한] 尹有一

윤유일(1760~1795).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여주(驪州) 출신. 권일신(權日身)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예비신자였던 1789년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이승훈(李承薰), 권일신의 밀서(密書)를 전달하기 위해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여 북경으로 들어가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이듬해에 또다시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 로(Raux) 신부로부터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북경주교로부터 견진성사도 받았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할 때에는 지황(池璜)과 더불어 의주(義州) 변문으로가 그의 입국을 도와 12월 24일 무사히 서울까지 안내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인도한 죄로 1795년 6월 28일(음 5월 12일) 체포되어 그날로 옥중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가족 또한 그를 본받아 모두가 열렬한 신자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1801년 3월 16일 그의 아버지가 임자도(荏子島)로 유배된 것을 비롯하여 그의 숙부, 아우, 누이 등이 모두 순교하였거나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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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오 [한] 尹有五

윤유오(?~1801). 순교자. 세례명은 야고보. 경기도 양근(楊根) 출신. 윤유일(尹有一)의 사촌동생. 1791년경에 체포되어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끝끝내 신앙을 지켰다. 1800년에 다시 양근에서 그를 비롯해 7명의 신자가 잡혔는데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오만이 끝까지 배교치 않으므로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양근으로 이송되어서 1801년 4월 25일(음 3월 13일) 참수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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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운혜 [한] 尹雲惠

윤운혜(?~1801). 순교자. 세례명은 루시아. 정광수(鄭光受)의 처. 윤유일(尹有一)의 사촌동생, 동정순교자 윤점혜(尹占惠)의 동생. 경기도 양근(楊根) 출생으로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으로 입교, 결혼 후 1799년 상경하여 살다가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3월(음 2월) 체포되어 5월 14일(음 4월 2일) 정철상(丁哲祥)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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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하 [한] 尹龍河

윤용하(1922~1965). 작곡가. 세례명은 요셉. 황해도 은율(殷栗)에서 윤상근(尹相根, 가롤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평북 비현(批峴)으로 이주하였다가 12세 때 다시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주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19세 때 만주작곡가협회 회원, 봉천 조선인합창단장, 신경(新京) 가톨릭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여 음악의 신동(神童)으로 불렸고 간도 사범학교에서 음악을 강의하였다. 8. 15광복 후 귀국하여 잠시 함흥 영생여고에 재직하다가 상경, 교향곡 <투쟁과 승리>, <농촌 풍경>과 교성곡 <조국의 영광> 등을 작곡 지휘하였다. 6.25동란 이후 가톨릭음악가협회 부회장, 한국작곡가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구산후생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 동북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한편 신당동본당 성가대, 인천답동 본당 성가대 등을 지휘하였다. 또한 동요도 200여곡을 작곡, 1960년 자작동요 ‘100곡 발표회’를 열기도 하였다. 작품은 <보리밭>, <광복절의 노래>, <도라지꽃> 등 수십 곡의 가곡과 200여곡의 동요가 있는데, 대체로 격이 높고 소박하고 단정하며 낭만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1965년 7월 23일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사망, 금곡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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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욱 [한] 尹承旭

윤승욱(1915~?). 조각가. 수원(水原)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에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한국 근대 조각 개척에 공헌하였다. 작품 활동으로 1938~1942년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출품, 입선하였으나 그 후에는 일제(日帝)의 식민지 정책 미술전을 외면하였다. 한편, 가톨릭 신자로서의 그는 1939년에 동경에서 개최된 로마 전시를 위한 종교미술 공모전에 <그리스도 입상>을 출품한 적이 있고,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복자 김대건 신부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했던 사실이 확인돼 있다. 그러나 앞의 작품기록에서 현존하는 것은 1941년의 조선 미술전 입선작인 <피리부는 소녀>(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뿐이다. 광복 후에는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1949년의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 때에는 조각부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의 공산군 남침 때 납북당한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現代美術史 彫刻編, 국립현대미술관, 1974 / 世界文藝大辭典, 上 · 下, 成文閣,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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