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신학교 [한] 彼南(濱榔)神學校 [프] College Generale de Pinang

파리 외방전교회가 1807년에 세움 신학교로 말레이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Penang 혹은 Poulo-Pinang)에 있었다. 방인성직자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1665년경부터 당시 샴왕국의 수도였던 유타이어(Juthia)에 신학교를 설립, 운영해 왔으나 박해와 전쟁으로 베트남, 인도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807년 페낭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페낭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박해로 인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버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사제수업을 받았다.

마카오에 유학시켜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를 양성하는 데 성공한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가 비교적 완화된 철종(哲宗)시대에 이르러 다시금 신학생 파견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854년 메스트르(Maistre) 신부는 이(李) 바울리노, 임(林) 빈첸시오, 김(金) 요한 등 세 사람을 선발, 페낭으로 유학보냈고, 1858년에는 다시 세 사람을 파송하였다. 그 뒤 병인박해(1866년)로 정세가 긴박해지자 신학생파견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키로 하고 1882, 1883, 1884년의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유학보냈다. 이 가운데 강성삼(姜聖參), 강도영(姜道永), 정규하(鄭圭夏), 한기근(韓基根), 김성학(金聖學), 이내수(李廼秀), 김원영(金元永), 홍병철(洪秉喆), 이종국(李種國), 김양홍(金洋洪), 김문옥(金紋玉), 김승연(金承淵) 등이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들은 인종과 풍습이 다른 10여 개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4∼9년 동안 교양과정, 철학과정, 신학과정을 공부하였고, 이 중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12명은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가 다른 페낭에 유학한 신학생들은 기후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고, 심지어 병사(病死)하는 경우도 있었다.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교활동의 자유가 허용된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학교를 설립한 한국 천주교회는 페낭신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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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부 [한] 八部 [라] Octava [영] Octaves

축일을 지내고 나서도 그 분위기가 지속되는 팔일간(八日間)을 말하며, 이는 축일 당일도 포함시켜 계산한 기간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팔부를 지내는 축일이 대단히 많았으며 팔일 동안 매일 미사와 성무일도에서 그 축일을 연장하여 기념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를 개정한 결과 예수성탄 대축일과 예수부활 대축일만 팔부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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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움 [라] pallium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경우에 따라 다른 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제의(祭衣) 위에 목과 어깨에 둘러 착용하는 좁은 고리 모양의 양털띠. 흰 모직천으로 만들어지는데 특히 성 아녜스 교회에서 아녜스 축일에 축성되는 어린 양의 털로 만들어 진다. 띠의 폭은 5센치 정도. 두 개의 늘어뜨린 장식과 함께 검은 색의 작은 십자가가 6개 장식되어 있다. 어깨 둘레에서 고리 모양으로 놓여 져 핀으로 고정되어 끝부분이 가슴 아래로 드리워진다. 팔리움의 초기 역사는 모호하나 황제의 휘장(徽章)에서 유래된 듯하다. 처음에는 로마 교황청과 아무런 연관없이 즉, 교황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과 상관없이 대주교가 착용하였다. 후대에 교황 자신이 팔리움을 착용하게 되고 특별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고위 성직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팔리움을 보내 주게 되었으며, 교황으로부터 팔리움을 받는 것을 점차 원하게 되었다. 9세기에는 모든 교구들이 팔리움을 받고자 하는 청원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각 교구는 대주교 성성식(成聖式) 후 3개월 이내에 팔리움을 위한 청원을 교황에게 해야 한다. 이 청원이 허락되어 대주교가 장엄 주교미사에서 팔리움을 착용함으로써 비로소 관할구역 내에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팔리움을 ‘주교 임무의 충실성’(plenitude of the pontifical office)과 교황 권위에 참여함을 상징하고, 교황청과 일치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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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티회 [한] ∼會 [라] Pia Societas Missionum, Pallottini [영] Pallottines

빈첸시오 팔로티(Vincenzo Pallotti, 1795∼1850)가 1835년 로마에서 창설한 회. 수도회가 아닌 이 회는 처음에 ‘가톨릭사도회’라고 불렀으나, 1854년 포교성성으로부터 ‘포교의 거룩한 회’(Pia Societas)라는 공석명칭을 받았다. 교구에 속한 성직자나 수사로서 포교사업에 뜻을 둔 사람에게 봉사에 대한 열성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을 규합하여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가톨릭 이민(移民)의 신앙심을 북돋아 주고, 외국의 선교에 힘쓴다.

원래 이 회는 세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즉 ① 공동생활을 하는 사제와 수사 ② 공동생활을 하는 수녀(여자 팔로티회) ③ 성직자나 신자에 대한 협력자(무상의 협력, 기도 또는 헌금에 의한 협력)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후 회칙이 변경되었다. 본시 베네딕토회에 속하였던 이 회의 창설자인 팔로티는 실행력과 목적의식이 투철했던 인물로, 팔로티회를 오늘날의 ‘가톨릭 액션’과 비슷한 활동방향으로 이끌어 갔기 때문에 교황 비오 11세는 1923년에 팔로티를 액션의 개척자로 불렀다. 팔로티 회원은 인내 · 복종 · 정결 · 청빈 · 공동생활의 다섯 가지를 서약한다.

팔로티회는 이탈리아, 독일, 영국, 미국 등 여러 관구를 설치하였으며 특히 미국과 남미(南美)의 이탈리아 이민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자 팔로티회’는 팔로티가 로마에서 프란치스코 제3회로 창설하였는데 고아를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 회는 사제를 도와서 전도와 교사로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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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티나 [원] Palestina

요르단과 이스라엘 두 나라에 걸쳐 있는 지방으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 약 2만 6,300㎢의 지역을 가리킨다. 동쪽은 요르단강, 남서쪽은 시나이 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하고 있다. 지중해안을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펼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가 된다. 이 지역의 동쪽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라고 부르는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서 비는 적게 온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가 되어있다.

팔레스티나는 유태인이 살았던 지역 전체에 적용되고, 또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가나안은 이스라엘 나라였다. 그리스도교의 처음 3세기의 역사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곳이기에 팔레스티나는 역사상으로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향토로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비롯된 정신적 세력은 이스라엘의 후예인 유태인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전세계 속에 생동(生動)하며,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팔레스티나는 ‘성지’(聖地)인 것이다. 또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유태교와 그리스도교로부터 성스러운 인물과 가르침을 그 종교에 끌어들인 결과, 성지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 있어서도 성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팔레스티나는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의 다른 어떠한 곳보다도 종교적인 순례의 목적지이며 유태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 신자 모두가 방문을 동경하는 성지인 것이다. 팔레스티나라는 명칭은 펠레세트(Peleset, 서남쪽의 해안평지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기원전 450년경 이 명칭을 쓴 역사가 헤로도투스 이래로, 이 이름은 대체로 유태인이 사는 전 지역에 적용되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가나안이나 이스라엘국으로 불렀다. 지리적으로 팔레스티나는 3대륙의 교차점을 이루고, 옛날에는 서로 다투던 대국(大國)간의 완충국가이기도 하였다. 몇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강대한 민족들의 대상(隊商), 서남 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세계 정복자의 군대가 이곳을 지나갔다. 이집트인과 로마인, 비잔틴인과 페르시아인, 십자군 정복자와 터키인들이 이 땅을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만들었다.

이 전쟁들은 그 때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새 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유대 산지(山地)에 있는 좁은 지역은 인접 국가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독립을 지키고, 지중해 연안 민족들의 교통로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들 고유의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팔레스티나는 하느님이 보내 주신 그리스도의 강생지(降生地)로서 또 그리스도교의 발상지로서 가장 적합했던 곳이다.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변(江邊)의 거대한 나라에 비하면 왜소한 나라요, 서남 아시아 민족들 중에 아주 작은 부분이자만 구세사상(救世史上)에 갖는 중요성에서는 실로 지구의 ‘중심’이다.

성지요 약속의 땅인 팔레스티나는 이미 구약성서에서부터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이스라엘인에게 약속된 땅이며 하느님이 계시한 특별한 땅이다. 예수와 마리아, 사도들이 태어난 땅이요 고난을 겪은 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고대 팔레스티나는 인류의 거의 반수에 속하는 일신론적(一神論的) 3대 종교인 유태교,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고향이다. 그래서 이 땅은 국제적 이해관계와 격렬한 종교 투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포교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에 잘 서술되어 있다.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14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1:22에 유대의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는 이곳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얻지 못하였다. 베스타시아누스 및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인이 유태인과의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투쟁은, 이 땅이 아직 유태교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도 박해를 당하여 국외로 쫓겨났다. 성 베드로가 팔레스티나를 떠나 로마에 가 전교를 시작함으로써 팔레스티나는 그리스도교의 성장에 대한 그 사명을 마쳤다.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티나 전체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유태인과 그리스도교 신자 및 이교도 간의 끊임없는 투쟁은 성지의 쇠퇴와 고립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6세기라는 긴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 성지들을 신자를 위하여 모범적으로 지켜온 것은 프란치스코회의 큰 공적이었다.

3대 일신교의 복합적인 종교적 ‘숙명’을 배경으로 636년 이슬람교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티나는 오스만터키 시대(1516∼1917년)를 포함하여 이슬람교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 동안에도 12세기에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일시 그리스도교 세력이 이 지역까지 떨친 적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티나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는데 이 지역의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모순된 정책을 취함으로써 아랍과 유태인 간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태인의 팔레스티나 이주(移住)와 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여 1948년에는 이스라엘국을 건국하였다. 팔레스티나 전쟁과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과 이집트령(領)이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 지역과 가자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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