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biest, Ferdinandus(1623∼1688).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중국명은 남회인(南懷仁), 자(子)는 돈백(敦伯). 164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벨기에, 스페인, 로마 등지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선교사로서 미국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했으나 1657년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659년 동회 선교사 마르티니(Martini 또는 Martin, 街匡國)와 함께 중국에 입국, 섬서(陝西) 지방에서 전교하였다. 1660년 청(淸)의 강희제(康熙帝)의 명으로 북경에 들어가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을 도와 천문역산류의 책을 편찬, 강희제에게 등용되어 공부좌시랑(工部左侍郞), 중국성구회장(中國省區會長),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1월 28일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교요서론≫(敎要序論, 北京 1669), ≪성체답의≫(聖體答疑), ≪도학가전≫(道學家傳, 北京 1686), ≪고해원의≫(告解原義, 北京1730), ≪곤여전도≫(坤輿全圖, 北京 1674), ≪곤여도설≫(坤輿圖說, 北京 1672), ≪의상지≫(儀象志, 14권), ≪의상도≫(儀象圖, 2권, 北京 1673)외 다수가 있다.
페루 [원] Peru
페루는 북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 브라질과 볼리비아, 남쪽으로 칠레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면적 128만 5,216㎢에 인구 약 1,823만명(1982년 추계)이다. 가톨릭은 스페인 내란이 종식되기 전(1537∼1554)에 이 나라에 들어왔다. 여러 수도단체에서 이 나라의 포교를 담당했지만 그 방법은 엇비슷하였다. 인력이 부족하여 스페인말을 할 줄 아는 인디언을 고용하여 사제일을 돕도록 하였다. 교회의 선교사업에 도덕적 또는 경제적으로 국가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어린이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성인들에 대한 포교는 대단히 어려웠다.
페루 교회를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주교회의이다. 모두 8차나 열린 회의 중에서 첫째(1551∼1552년), 둘째(1567∼1568년), 셋째(1582∼1583년), 여섯째(1772∼1773년)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개연성(蓋然性)에 관한 문제였다.
페루 자국민으로 하여금 사제 일을 맡도록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지배적이지만, 또 사실 인디언들이 그리스도교 관습에 잘 적응하고 여러 방면에 재능도 뛰어나지만 아직도 원주민이 사제가 되는 데 대하여 이상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 인디언 출신의 사제로는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가톨릭 신자는 1982년 현재 약 1,685만명에 1,201개소가 넘는 본당을 거느리고 있다.
페롱 [원] Feron, Stanislas
Feron, Stanislas(1827∼1903).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페로시 [원] Perosi, Lorenzo
Perosi, Lorenzo(1872∼1956).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직자, 작곡가. 1895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 성가대장에 임명, 1898년에는 시스티나 성당 성가대장이 되어, 그 곳에서 가톨릭 교회의 전례음악을 고전적 정신에 의해 정비하였다. 이것이 성 비오 10세가 발표한 교황자의교서(Motu proprio, 1903)의 발표동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1905년 성 비오 10세의 칙명으로 종신 ‘교황 성당 악장’이라는 최고지위를 받았다. 그는 많은 수난곡과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는데, 그것들을 전례적(典禮的)인 라틴어 성서에 의한 대화라기보다는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적인 스타일에 의한 것이며, 더구나 단순하고도 장엄한 합창과 독창을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로써 정리한다는 그 특유의 새 수법에 의한 것이다.
페레올 [원] Ferreol, Jean Joseph
Ferreol, Jean Joseph(1808∼1853).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여 어떤 큰 불행이 일어났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에까지 왔으나 그 곳 요동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 관할권이 넘겨짐에 따라, 이를 시기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그 곳 신자들에게 프랑스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이었다.
서만자에 돌아온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大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생해로 달려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모진 풍파를 헤쳐 간신히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만인 1845년 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끝내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