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모상 [한] ~模像 [라] imago Dei [영] image of God [관련] 인간 창조1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계시하는 수단. 세상에 아무도 그분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오직 그분의 모상을 통하여 알아 볼 수 있을 뿐이다(요한 1:18). 그 분은 전능과 지혜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으나 마침내 자신이 완전한 모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였다. 십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완전한 모상의 강생을 소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뜻도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인 것은 세상의 피조물을 지배하고(창세 1:26) 불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창세 2:2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한 말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교리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한편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 많은 모상이기도 하기에 구약성서의 지혜로 윤곽이 잡히고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바를 필요로 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활동력을 비추어 주는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는 모상”(지혜 7:26)이다. 신약성서는 지혜를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모상임은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는 바울로 서간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모상인 까닭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며(로마 8:29) 불멸성을 지녔고 죽은 자 가운데 처음으로 태어난 자이자 하느님의 계획을 일치시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원리요(골로 3:10) 새로운 창조로 인한 회복의 원리이다. 하느님의 불완전한 모상인 지상의 아담은 부활하신 천상의 아담의 모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1고린 15:49). (⇒) 인간, 창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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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 [라] Verbum Dei [영] Word of God

말의 중요성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에 의하면 말은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신(神)들의 의사를 강제하기도 하고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서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는 말씀으로 계시되었다. 세상의 창조와 보존 및 이스라엘의 역사적 행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힘입은 것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적이며 구원적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시편 147:1).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서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예언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내용이 특징을 이루며(예레 1:9-, 이사 6:1-, 에제 2:8-), 그 전달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를 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창조하고(1열왕 17:1), 새 계약을 체결하며(예레 31:31-, 이사 54:10), 새로운 생명을 주고(에제 37:1-, 시편 119:50),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의무짓는다(신명 6:4, 이사 7:13).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구약성서의 개념은 신약성서에서도 계승되어 구약의 모든 계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르고(마태 1:22, 로마 15:10), 예수님의 입술을 거쳐 나온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 사건을 일으키는(루가 5:1, 8:11) 능력을 나타낸다고 한다(마태 7:28-). 한편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며(마르 8:38),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전해졌고(히브 1:1-),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다(요한 1:1-). 그리스도한테서 강생한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 존속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봉사자인 사도들이 전하는 것은 교리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 도래한 구원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 혹은 ‘주님의 말씀’(사도 13:46-, 1고린 14:36, 골로 13:16)은 단순히 주님의 메시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인간적인 언어 가운데 성령의 작용으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길이 설교되어야 하므로 사도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계승할 말씀의 봉사자를 선발하였고 그 직무는 구두의 설교뿐 아니라 서한을 통하여 이행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도래한 구원을 기록한 것을 복음이라 부른다(마르 1:1, 14:9, 마태 24:14, 26:13).

초대 교회에는 기록된 사도들의 설교 혹은 기록된 구약과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한편(로마의 주교 글레멘스), 비유를 써서 성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살과 피이고(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로고스의 완전한 몸이며(오리제네스) 영혼의 약이라(요한 크리소스토모)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말씀을 영원한 구원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았고 성서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생존한다고 하며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태어난다”고 함으로써 말씀과 성사를 결합시켰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서와 이에 대한 설교는 구원의 효과를 내는 수단이라 하여 설교자는 천국의 왕을 위한 새 자녀를 탄생시킨다(알퀸)고까지 하였으나 수도원 생활의 영성화(靈性化)로 인하여 하느님의 행위와 은총의 신비적인 차원을 주목하게 되면서 성서의 설교가 어떻게 구원을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지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은총의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토마스 아퀴나스). 한편 성사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설교의 구원적 기능을 소홀히 여기게 되기도 했으나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며 성서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씨앗이라는 믿음(보나벤투라)에는 변함없었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하여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그 말씀에 대한 신학적인 탐구는 인간 언어의 철학적인 해명에서 도움을 받는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앙과 은총이 필요하나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역사와 언어로 표현되는 말씀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역사의 절정에 달하였고 교회 내에 말씀의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영감을 받은 것이므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계시헌장 24). 그러나 성서의 문헌은 설교 도중에 말씀의 새 생명에 이르게 하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오늘의 설교에서 과거의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의 원(原)생명이 재생하는 것이다. 성서는 또한 사도와 초대 교회가 계시를 증거한 것이며 이 인간적 증언은 신앙 안에서 말씀에 대하여 응답한 내용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성서를 증언으로 이해할 때 성서는 바로 계시가 아니고 계시를 표시하는 것이며 그 표시하는 상징(즉 증언)을 또한 지니므로 마치 성사적인 방법으로 증언하는 바를 재현시킨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설교에서만이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날 인간 설교자를 통하여 충만한 실재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설교자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의해서 파견되며(로마 10:15), 설교는 성서에 표현된 계시와 그 증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구원 사건으로서의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와의 관계에 대하여 양자는 구원행위의 불필요한 중복이 아님과 동시에 어느 하나를 결하고는 완전할 수 없다. 말씀과 성사는 쌍방적인 움직임이어서 전자는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것이요 후자는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이며(O. Semmeloth), 양자는 말과 행위의 단일성으로 묘사되고(G. Sohngen), 성사는 효과를 발생하는 말씀의 최고 구현형태인 것이다(K. Rahner).

[참고문헌] Leo Scheffczyk, Word of God,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69 / D.M. Crossan, Word of God,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14, McGraw-Hill, 1967 / 계시헌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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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능력 [한] ~能力 [라] Potentia Dei [영] Power of God [관련] 구원 창조1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시편 115:3) 하느님의 속성의 하나.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사도신경).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의 간섭에서, 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느꼈는데 강생하신 말씀 안에서 그 능력이 나타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특히 출애굽사건에서 야훼는 천지간에 야훼 홀로 전능하신 분임을 계시하였고(신명 4:32-39) 결약의 궤를 수단으로 당신 전능의 현존을 일깨웠다(2사무 6:2). 이스라엘인의 능력은 역사상 야훼의 능력에서 왔기에 시편은 이를 노래한다(144:1). 야훼가 역사를 통하여 천지간에 전능한 것은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창세 2:4). 그의 능력으로 산들은 뛰고(시편 114:4) 하늘이 기울어지고(시편 144:5) 바다가 마른다(시편 107:33). 하느님의 능력은 이를 믿는 자를 위하여 발휘된다. 아브라함이 축복받은 것도(창세 22:16-) 유딧이 공을 세운 것도(유딧 9:12-) 전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를 불신했으므로 죄를 범하였다. 인간 구원을 뜻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은 강생하신 말씀을 통하여 발휘되었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써 그의 생애를 의미 있게 하고 구원사업이 성취되었다. 하느님의 능력은 성령을 통하여,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행사된다. 아버지께서 성자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신다는 약속은, 신앙이 기도하는 자를 전능하게 만드는 일면이 있다(마르 9:23, 10:27). (⇒) 창조1,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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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계명 [한] ~誡命 [관련] 십계명

⇒ 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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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 [라] Deus Pater [영] God the Father

독생성자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의 계시를 준비하기 위하여 구세사는 인간사회의 아버지 개념을 점차적으로 영성화시켜 갔다. 하느님의 권위와 사랑은 구약성서를 통하여 가정 안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가정을 사랑으로 완성시키는 아버지와 남편의 모상으로 계시된다. 횡적 인간사회에서 아버지라 불린 사람은 가정의 아버지(창세 20:3),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 임금(이사 9:5), 사제들(사사 17:10), 예언자(2열왕 2:12) 등인데 이들의 활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도록 준비한다. 종적 인간사회에서 아버지는 자손이 생겨나는 원천이고 혈통이 이어지는 열(列)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아브라함의 선택과 축복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듯이 한 부족의 장래는 아버지들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선조들이 혈연으로 선택된 백성의 조상이 된 것은(로마 4:1) 영신적이고 우주적인 아버지가 되기 위한 잠정적인 조건이다. ‘하느님의 이스라엘’(갈라 6:16) 가운데는 유태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에페 3:6).모든 이는 만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신앙을 내세우므로 이 선조의 자손이 되고(로마 4:11-18) 세례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구성되는 약속의 정신적 새 민족이 탄생한다(갈라 3: 27-).

이스라엘인이 조상들과 하느님을 동시에 아버지로 부른 것은 유배 중이었을 때인데 이는 체험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계시된 것은 출애굽 때였고,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선택하심으로써 아버지가 되셨다는 주제를 개발하고 있다(이사 45:10). 다윗왕 이후로 야훼는 임금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2사무 7:14, 시편 2:7). 이는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성자라는 계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임금들의 모상 안에는 벌써 메시아의 윤곽이 떠오르고 있다.

하느님은 예수를 통하여 유일한 아들의 아버지로 자신을 계시한다. 예수는 하느님이 특별한 의미에서 당신 아버지이심을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나의 아버지’(마태 7:21)와 ‘당신들의 아버지’(루가 12:32)를 구분하고 자신을 ‘아들’(마르 13:32)로 지칭하며 부자간의 밀접한 일치를 드러낸다(마태 11:25). 하느님은 신비로운 아버지이시기에 자기와 동등한 아들을 낳는다. 신약성서의 편저자들은 공관복음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마 15:6, 2고린 1:3, 11:31, 에페 1:3, 1베드 1:3)를 밝히고 있다. 사람이 되신 아들은 한편 아버지에게 예속되어 있다. 비록 예수는 아들의 신분으로는 하느님과 동등하지만 아버지는 그 특권을 그대로 지닌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자신은 하나라 하고(마태 18:25) 그들의 형제로 자처하며(마태 28:10) 그들과 더불어 ‘아들’(마태 17:26)이라 하였다.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노예의 속박에서 해방하여 자녀로 만들었는데 이는 세례를 통하여 얻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그의 모든 자녀들인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1요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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