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0월 22일 양화진 절두산(切頭山)에 설립된 한국 순교자 기념 박물관. 한국 천주교 순교자현양회에서 1956년 5월 20일 양화진 절두산을 매입한 후 1962년 순교자기념탑과 노천제대가 설치되었다. 1967년 한국 순교자 기념성당과 박물관이 준공되면서 기념탑과 노천제대는 철수하였고, 서울 교구 운영상 양화진본당 병설로 박물관이 운영되었다. 1969년 11월 가스 적외선히터 난방장치를 완비하고, 1970년 3월부터는 ‘절두산성지 종합개발사업’을 착수하여 김대건 동산 건립 · 김대건 석상건립 · 순교자상 건립 · 성모동산 · 조경사업 · 박물관 소장 유해 약품처리작업 등을 하였다. 1978년에는 박물관과 아울러 성당 보수공사를 시작, 1980년에 완공되었고, 1980년 9월에는 남종삼(南鐘三) 동상 · 사적비가 제막되었다. 한편 1979년에는 박물관 관리수녀가 부임되면서 양화진본당과 분리 운영하게 되었는데 1981년 8월에는 본당으로서의 양화진성당은 폐쇄되어 양화진 순교자박물관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 명칭은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이다.
양형 영성체 [한] 兩形領聖體 [영] communion under both species
성체를 빵과 포도주 두 형상으로 영하는 것.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받아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다”(마태 26:27 · 28) 하신대로 초대 교회에는 양형 영성체를 실천하였다(DTC 3, 1:554-555). 다만 성당 바깥에 있는 환자나 수감자 등에게는 포도주 형상의 성혈을 영해 주는 예외가 인정되었다. 양형 영성체는 신자들의 증가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실천되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의 방식 그대로 두 형상을 따로 영하되 축성용 성작과는 달리 영성체용 성작을 사용하여 이를 기울여 마시거나 튜브를 사용하여 마시는 방법이다. 로마에서 생긴 관습이다. 다른 하나는 빵을 포도주에 적시어 영하는 방식인데 손으로 빵을 적시어 주거나 적시어진 빵을 숟갈로 떠주었다. 이의 기원은 불확실하나 9세기 이래 동방전례에서 일반화되었다.
후자의 양형 영성체 방식이 11세기 서방교회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자 이는 성혈을 받아 ‘마시는’ 것이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소리도 높았다(파스칼 II).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양형 영성체는 구원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양형론(Utraquism)의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 로마가 빵의 형상만으로 성체를 영하는 관습의 발생을 묵인하여 넘긴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 이단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한 형상 안에 전체로서 계신다는 교리(Concomitantia)가 나타난 것도 이 때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로마는 빵만의 영성체를 규정하였고 콘스탄츠 공의회(1415년)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를 확인하였다.
오늘날의 경향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체성사의 현의를 충분히 나타내도록 양형 영성체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교회법에서 영성체는 빵의 형상만으로 함을 원칙으로 하고, 전례법에 따라 양형으로 하거나 필요한 경우 포도주의 형상만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925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는 교황청이 규정할 경우 주교는 양형 영성체를 허가할 수 있게 하였고(55항), 예부성성의 교령(1965. 3. 7)에 의하면 양형 영성체의 방식은 네 가지 즉 잔을 기울여 마시거나 튜브를 사용하거나 숟갈을 사용하거나 빵을 포도주에 적시는 방법 중 하나를 택할 수 있게 하였고, 주교가 양형 영성체를 허가할 수 있는 경우를 나열해 두었다.
양평본당 [한] 楊平本堂
주보로 ‘예수성심’을 모시는 이 본당은 1943년 오연희(吳然喜, 마티아)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되었다. 위치는 경기도 양평군 양근3리(楊根三里). 양평 땅에서 본당이 먼저 설정된 곳은 양평읍이 아니라 용문(龍門)이었다. 1908년 조제(J. Jaugey, 楊秀春) 신부가 용문면 덕촌리(龍門面 德村里, 退村)에 주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평과 용문은 겉으로는 한쪽이 본당이요, 다른 쪽은 공소이긴 했으나 한 본당이나 다름없었는데도 양쪽 교우들은 서로 본당신부를 자기 지역에 주재시키고자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1943년에 이르러 본당이던 용문은 양평공소가 되고, 용문본당의 공소이던 양평은 본당이 되었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의 양평 초대 본당신부는 오연희 신부였는데, 처음에 용문에 부임하였던 오신부가 전임 신부들의 뜻을 따라 양평읍에 주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 신부 재임시에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하고, 1947년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 1948년에는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여 2년간 사목하였다. 1949년 9월 이계중(李啓重, 요한) 신부가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서 6.25동란이 나고, 본당은 일시 부산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쟁으로 말미암아 양평 성당은 파괴되고, 주임인 이계중 신부는 군종 신부로 입대하니, 얼마동안 공백기를 겪기도 하였다.
1952년 12월 김정진(金正鎭,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활기를 되찾은 이 본당은 용문까지 관할하면서 1954년 4월에는 양평 유치원도 설립하였다. 또 이 해 11월 18일에는 1,000평의 대지에 85평의 성당도 낙성하였다. 또 1956년 12월에는 용문성당도 짓게 되고, 그 해의 신자총수는 용문공소를 합하여 1,600명에 달하였다.
1957년 3월 김정진 신부는 가톨릭대학 조교수로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평양교구 출신인 강현홍(姜賢洪,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그의 재임 중인 1958년에 용문공소가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어 독립하였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그 관할로 편입되었다. 현재 본당주임은 최충렬(崔忠烈, 마태오) 신부이며, 성가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나와 있고, 신자총수 1,547명에 6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양천본당 [한] 良川本堂 [관련] 노안본당
1904년 설립된 양천본당은 1927년부터 현재의 노안(老安)본당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 노안본당
양지양능 [한] 良知良能 [영] synderesis(syneidesis) [그] synderesis(syneidesis)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쓰여 온 용어로서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사물을 알고 행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synderesis’ 즉 ‘양심의 번뜩임’(spark of conscience)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양심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인데, 이 경우의 양심이란 기본 원리를 알고 있고, 특정의 인간적인 행동의 선악(善惡)을 판단하고 이를 구체적인 행동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양지양능’이란 용어를 좀 더 확실하게 정의하자면 도덕률(道德律, moral law)의 기본적인 여러 원리, 즉 실천면에서의 보편적인 제일차적인 원리를 아는 습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행위의 기준, 즉 도덕적인 행위의 규범이 되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도덕률 또는 도덕법칙이라고 하며, 이는 다시 말을 바꾸자면, 도덕에 있어서의 당위(當爲)의 원리인 것이며, 현실적인 행위 일반의 원리와는 원칙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실천면에서의 보편적인 가장 중요한 원리를 아는 습성이라는 것은 본능이나 욕구에 대립되는 이성이나 신을 근본에 앉혀 놓은 입장에서 도덕의 원리를 아는 습성이라고 해석된다.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에 의하면, ‘양지’[량지]는 ① 이성, 지능, 분별력을 말하거나, ② 선의(善意), 선의의 사고(思考), 좋은 의도를 뜻하며, ‘양능’은 ① 이성, 지능, 분별력 ②용기, 박력, 능란한 솜씨, 재능을 뜻한다. ‘양지’와 ‘양능’이 합하여 된 ‘양지양능’이라는 말은 타고난 지능 또는 지혜를 가지고서 사물을 알고 행함을 지칭한다고 보겠다.
일찍이 정하상(丁夏祥)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하는 사물의 ‘네 원인’[質 · 貌 · 作 · 爲]을 들어 “만유(萬有)를 통하여 주재(主宰)가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지적, ‘천지의 작자’(作者)가 있음을 증명하였는데, 이 ‘아는 것’을 ‘양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입장은 만물과 ‘양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경서(經書)를 통한 즉 양명학(陽明學)에서의 ‘양지’가 마음의 본체(本體)이고, 지의 수행[致良知]과 행위를 바루는 격물(格物)과는 동일행위의 양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주장도 인용하여 ‘천지의 주재’를 증명하였다. 또한 정약종(丁若鐘)의 경우, ‘양능’을 “인심이 천주계심을 아느니라”로 풀이하였다.
[참고문헌] 崔奭佑, 天主實義에 대한 韓國儒學者의 見解, 東亞硏究, 제3집, 西江大學校 東亞硏究所, 1983.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