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수녀회 [한] ∼修女會 [라] Bnedictinae [프] Benedictines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6?)의 수도회칙(修道會則)을 준수하는 여자수도회. 성 베네딕토 생존 당시 그의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St. Scholastica)가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을 따라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창설자로 알려져 있다.

창설 초기에는 지방주교와 절충된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이 사용되었는데 7-12세기에 걸쳐서 원래의 회칙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1세기에는 클뤼니의 개혁으로 전례를 강조하였으나, 그 후 베네딕토의 정신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사도회의 영향으로 영성적 깊이를 더하였다.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Olivetan St. Renedictine Sisters)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훨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on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 몬테 올리베토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I년 9월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母院)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母院)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칭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1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①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 데 있다. 1931년 당시 연길(延吉)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 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龍井下市)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淸州)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兪乙濬)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草梁洞)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했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廣安洞)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副川), 소사(素砂)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東自洞)에 성 분도 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 · 대구 · 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욕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 교포사목 등 특수 사목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72년 12일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林南薰)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I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金芝尙) 수녀가 피임되었다. 1983년 12월말 현재 324명의 회원들이 부산 · 서울 · 대구 · 마산 · 울산 · 진해 · 미국의 뉴욕 등지에서 의료 · 전교 · 특수 사목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 이탈리아 · 필리핀 등에 학생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 △ 원산교구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칭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의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priory)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M. Mathilde Hirseh)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초등학교, 해성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1936년에 신설된 회령(會寧) 분원에서는 본당활동, 약방, 보통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1933년에 신설된 고산(高山) 분원에서는 본당활동, 해성 유치원, 해성보통학교, 약방, 농장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咸興)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선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淸津)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홍남(興南) 분원에서는 본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 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척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의 습격 및 체포로 모든 수녀들이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 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흥(崔德弘)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南山洞)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新巖洞)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5년 3월 남한에서의 첫 지원자가 입회하였고 1955년 11월부터 북한에서 활동하던 독일인 수녀들도 다시 내한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7월 29일 대구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般若月)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 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 시내 3개 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星州), 상주(尙州), 김천(金泉), 경산(慶山), 함창(咸昌), 경남 마산(馬山) 각각 분원과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베네딕토회의 체제는 관구체제가 아니라 본원의 원장이 해당 본원과 그에 속한 분원을 관할하면서 본원의 직접 장상이 되며 총원과 유기적 관계를 갖는데 1983년말 현재 한국의 대구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장으로는 장피아 수녀가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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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2 [라] Benedictus

베네딕토 2세(?~685). 성인. 교황. 축일은 5월 7일. 로마 태생. 요한네스(Joannes)의 아들이다. 교황 레오 2세가 683년 6월 서거한 직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황제의 승인이 늦어지는 바람에 684년에야 공인되었다. 그는 서유럽 교회로 하여금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년)를 승인케 하고,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을 거부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재위 중 역대 교황표에 의하면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재위 : 668∼685)는 새로 선출된 교황이 황제의 승인을 기다렸다가 축성될 수 없다고 보았었다. 따라서 교황 공인권은 장기간의 공위(空位)를 방지하기 위해 라벤나의 태수(太守)에게 위임되었다.

베네딕토 14세(1675~1758). 교황(재위 : 1740-1758). 볼로냐(Bologna)의 귀족 출신. 신학 및 법학 박사. 교황 글레멘스 11세와 인노첸시오 13세 밑에서 시성 · 시복 등 교회의 주요 입법에 관여하였고 이때 ≪De servorum Dei beatificatione et canonizatione≫를 집필하였다. 베네딕토 13세 하에서 추기경과 대주교를 거쳐 174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 역대 교황의 난제였던 교회와 세속 국가와의 분쟁을 타결짓기 위해 1741년에는 사보이(Savoy) 및 나폴리(Naples)와, 1753년에는 오랜 공방전 끝에 스페인과 차례로 협상을 체결하였다. 교황령(敎皇領) 주민의 생활을 개선시켰으며 1742년과 1744년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중국인과 인도의 말라바르인의 이교적 전례를 금지시키는 교서를 발표, 오랜 논쟁을 종결시켰다. 동시에 중국의례에 대해서도 금지령을 내렸다. 적응주의에 대한 이 근본적 단죄는 근시안적인 유럽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부아시아 포교지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이어 중국에서 박해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또한 바티칸 궁전에 박물관을 신설하고 로마 및 다른 도시의 대소 성당을 복원하는 등 역사적 유물 및 건축물의 보존에 노력하였다. ‘학자들의 교황’으로 지칭될 정도로 가장 학식이 풍부한 교황의 한 분이었던 그는 교회와 로마 역사를 연구하는 4개 학술원을 설립, 로마 대학을 진흥하고 출판사업을 활성화하였으며 또한 바티칸 박물관을 위해 필사본과 고서(古書)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고대 그리스도교의 유적을 보존하거나, 교회사와 교회법을 연구하는 많은 학회(學會) 창립과 함께 그는 스스로도 전례 없는 많은 사적(私的) 기록을 남겼으며 간소한 생활, 겸손 및 관용의 모범을 보였다.

베네딕토 15세(1854~1922). 교황(재위: 1914-1922). 제노바 교구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 선천적으로 허약했으므로 어려서부터 사색과 공부에 힘썼다. 제노바와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 1878년 서품을 받고 1882년에서 1887년 사이에 추기경 람폴라(Rampolla)의 비서로서 스페인에 머무르며 교황청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87년 교황청 대사가 로마로 소환되었을 때 같이 돌아왔으며 1907년 볼로냐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직후 성 비오 10세가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대전 중에는 교황청의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평화통첩을 교전국에 보냈으나 거절당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 포로와 그 가족의 접촉을 위한 국제 사무소를 바티칸에 설치하고 결핵으로부터 포로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유럽이 승자와 패자로 분열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또 베르사이유 조약을 시인하지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전쟁 후 바티칸 주재 외교사절의 수가 25개국으로 증가하였고, 그 중에는 일본 · 네덜란드 · 영국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도 있었다. 1917년 ≪새 교회법전≫의 간행(1918년 발효)은 대내외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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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1 [라] Benedictus [관련] 베네딕토회

Benedictus(480?-550?). 아빠스. 성인. 서구의 수도회, 특히 베네딕토 수도회 창시자. 축일은 7월 11일.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ursia) 출신.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로마에서 수학. 시대의 방종을 목격하고 20세에 수비아코(Subiaco)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때 부근 수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수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너무 엄격한 규칙으로 불만을 사서 독살당할 위기에서 탈출하였다고 전한다. 수비아코에 다시 돌아오자 각기 12명의 수사들로 구성된 12개의 수도원을 각지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지역적 시기심 때문에 525년경에는 소수 수사들과 함께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로 옮겼다. 누이동생인 성 스콜라스티카(St. Scholastica, 480-547)와 같은 무덤에 묻히기까지 거기서 살았다. 바로 여기서 유명한 수도원 개혁안 및 수도규범을 제정하였는데, 그가 참조한 것은 이전의 성 요한 카시아노(St. John Cassianus)와 성 바실리오(St. Basilius)의 규칙들이었다. 그는 서품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지적되며 그의 ‘수도규칙’은 외곬이고 침착 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몬테 카시노에서 자신의 수도원을 위해 지은 베네딕토회칙은 수많은 남녀 수도회의 규범으로 아직까지도 준수되고 있다. (⇒) 베네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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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긴회 [한] ∼會 [영] Begines

12세기 네덜란드 지방에서 창립된 여신자(女信者)들의 단체. 신체장애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교육활동에 종사한다. 수도생활과 비슷한 생활을 하지만 수도회는 아니다. 재산의 사유(私有)도 가능하고, 세속생활로 돌아가는 것도 완전히 개인의 자유다. 베긴회란 명칭은 창립자 베그(L. le Begue)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2-3인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주거지는 beguinage라고 부른다. 이 주거지는 경제적으로 독립된 단위이고,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다.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도, 그들을 관할할 원장도 없었으나 그들 중 일부는 프란치스코 제3회의 규칙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베긴회는 교육활동과 자선사업을 통하여 교회의 발전을 윙해 상당한 기여를 하였지만 당시 유행했던 오류와 이단에 빠져 빈 교회회의에 의해 배척당하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거의 소멸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내려온 회원들도 있다. 이들은 병자를 간호하고, 레이스를 짜면서 생활비를 조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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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친조당 [한] 法親阻擋 [관련] 혼인장애

금지장애 중의 하나. 민법상 양자관계에 의하여 혼인이 불가능한 경우 동일하게 혼인을 금하는 교회법적인 조건. ‘법정친족장애’라고도 한다. (⇒) 혼인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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