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주교구 화산본당(현나바위본당)의 초대 주임 베르모렐(Josephus Vermorel, 張) 신부가 1907년 설립한 초등 교육기관으로 한때 폐지되었다가 1930년 다시 문을 열었다. 1937년 다시 폐교되었다. 태극계명학교라고도 불렀다 (⇒) 화산본당
② 계성학교의 여학생부를 한때 계명학교라고 불렀다. (⇒) 계성학교
① 전주교구 화산본당(현나바위본당)의 초대 주임 베르모렐(Josephus Vermorel, 張) 신부가 1907년 설립한 초등 교육기관으로 한때 폐지되었다가 1930년 다시 문을 열었다. 1937년 다시 폐교되었다. 태극계명학교라고도 불렀다 (⇒) 화산본당
② 계성학교의 여학생부를 한때 계명학교라고 불렀다. (⇒) 계성학교
계급투쟁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동을 휘몰아칠 목적으로 제창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변증적적 이론을 역사에 응용해서 ‘일체의 모든 사회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공산당 선언의 서두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 견해는 물질적인 힘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 내면적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한 유물사관(唯物史觀)의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유도하는 계급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곧 공산주의의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의 핵심이며 또한 이론의 실질인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는 인간을 귀속돼 있는 계급적 상태에 의해 형성된다고 가정하는 동시에 계급투쟁을 기본적인 정치적 실체로 가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말하는 계급이란 빈부의 차 즉 재산이 많다 적다든가 하는 수입의 다소에 의해 구별되는 것도 아니며, 수입원으로서의 임금 · 이윤 · 지대(地代)에 따라서 임금 노동자, 자본가, 지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의 체제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생산수단에 대한 그 관계가, 사회적 노동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 사람들과 다른 큰 집단을 계급이라고 말한다. 생산의 전체에 대해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구별된 것이 계급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산에 있어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자본가이며, 지휘되는 입장에 있는 자가 노동자라는 말이다. 즉 지휘하는 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지휘되는 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써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 계급에 있어서의 공통 자각이 없으면 서로 대립하는 일이 없으므로 계급의식이 수반되어야 투쟁적인 계급의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계급이란 생산수단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 그리고 그와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느냐 어떠냐에 의하여 구별된 인간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이론은 별 도리 없이 양극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기에 마르크스는 사회의 계급을 두 계급 즉 자본가(부르좌)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두 계급으로 환원하게 마련이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좌(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의 두 계급 사이의 필연적 투쟁을 잉여가치설(剩餘價値設)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에 입각하여 법률 위에서는 자유로우나 생산 수단을 갖지 않는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생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자본가는 공장이나 기계, 원료 등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기에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서 임금을 지불하고 이익을 올린다. 자본가는 상품의 대량 생산에 의해 경쟁을 심히 하고, 많은 큰 부분을 프롤레타리아에게로 전화케 한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단지 노동자의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화할 뿐 아니라 노동력도 역시 상품으로 전화하는 것이며 그것이 잉여 가치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은 모든 물건의 가치가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량 즉 노동 비용에 의하여 정해진다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設)을 도입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된다. 노동자는 그 노동에 의해 자기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자본가나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 의하여 생산된 부(富)의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소유로 빼앗긴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부채질하기 위해서 ≪자본론≫(資本論)의 제1권에서 잉여가치를 논급하고,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로부터 무상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그 착취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본가는 많은 잉여가치를 빼내며 따라서 보다 많은 이윤을 획득하게끔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본가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높이고 계급투쟁을 격렬하게 전개 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참을 수 없는 부정의 희생이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과연 가치가 노동량 내지 노동 비용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일까. 물건의 가치라는 것은 노동으로부터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수요 공급의 관계 즉 그 유용성과 희소성(稀少性)에 의해서 정해진다. 노동이 만드는 것은 생산물의 가치 결코 그 자체는 아니다. 노동가치설은 상품이 반드시 그 가치대로 곧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자본론≫ 제3권에서 마르크스는 수급 관계에 의해 정해지는 바 평균 이윤율에 의하여 가치와도 일치하지 않는 가치가 성립되는 것을 인정하고, 현실의 가격이 가치 곧 상품에 포함되는 사회적 필요 노동량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여 노동가치설의 모순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이 노동가치설의 동요는 당연히 이 이론에 의거한 잉여가치설까지도 동요시키고 더욱이 착취론(搾取論)까지도 불명확한 것으로 한다.
착취라는 것은 노동자가 그 노동에 의해서 제공하는 가치보다도 임금으로 받는 가치가 적다는 것일진대 노동자의 노동이라는 것이 그가 받고 있는 임금보다도 많은 가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증명이 노동가치설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스스로도 말하듯이 “그 물건이 무용(無用)하다면 그 안에 포함되고 있는 노동도 역시 무용한 것이며, 노동에 시간이 얼마 걸렸든 간에 그 물건은 하등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노동의 양(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유용(有用) 즉 필요에 있다.”
계급투쟁은 어쨌든 착취론을 기조로 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좌지 전체와 아울러 정부 전체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투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 정치투쟁이란 정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며 공산당 선언에서는 “모든 종래의 사회 조직을 강력히 뒤엎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박멸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이 존속하는 한 계급투쟁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가 반드시 종말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견에서 끌어 낸 것을 포함한 계급투쟁에 대한 견해와 아울러 다른 견해들이 사회 계급들 사이의 화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 자체가 지니는 그 성격 때문에 화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도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도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것이긴 하나 인간은 단지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모든 노동자가 굳게 일치 단결해서 부르좌 사회의 타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잉여가치에 그 기초를 두고 자본가의 발전과 그에 수반한 노동자의 필연적 빈곤화를 가정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런데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의 여러 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제반 조건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현상을 마르크스는 지하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노동의 보수는 각 자의 임무와 생산성, 기업의 상황과 공동선(共同善)을 고려해서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시적 생활을 품위있게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정도의 것이라야 한다”(사목헌장 67). “자본주, 고용주, 지배인, 노동자 등 각자의 직무에 따라 업무상 필요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적절히 규정된 방법에 의하여 모든 이가 기업 운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촉진해야 하고, 노동자들을 진실로 대표하여 경제 생활의 올바른 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권리와 아무런 보복의 위험 없이 조합 활동에 참여할 권리는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돼야 할 것이다”(사목헌장 68). “개인의 권리와 각 민족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정의와 평등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 내지 사회적 차별 대우와 결부돼 가끔 증대해 가는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제거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겠다”(사목헌장 66)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과연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교회는 더욱더 노동자의 세계에 대해서 사목적 배려를 끊임없이 하고 계급투쟁이 아니라 정의 복음으로 사랑과 화해에의 일치 운동을 조정할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 계급의식 (梁漢模)
[참고문헌] N. 베르자예프 原著, 鄭容燮 譯, 그리스도와 階級鬪爭, 大韓基督敎書會, 서울 1977 / 金南洙 譯,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서울 1969.
계급의식의 정의를 내리려면 그 이전에 계급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계급이란 마르크스의 설명에 의하면, 생산 과정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 관계에 의해 각 개인이 생산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다름으로써 서로 구별되는 인간 집단을 말한다. 계급 의식은 계급 사회에 있어서 어떤 계급이 자신이 속한 상태, 대립하고 있는 다른 계급과의 관계, 그 계급에 있어서 바람직한 사회 발전의 방향,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계급의 태도 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 내용을 말한다. 또 어떤 계급의 구성원이 스스로 그 계급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위와 같은 의식 내용을 자기의 것으로 할 때, 그 사람을 계급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계급의식은 객관적인 세계가 계급적 이해를 통하여 왜곡? 과장되기도 하며, 혹은 반영 · 체계화되어 형성된다. 즉 계급 의식에는 항상 계급적인 이해가 첨예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 진보의 객관적 방향에서 이익을 발견하는 계급의 계급 의식이, 사회 진보의 방향이 불이익으로 되는 계급의 계급 의식보다 객관적인 세계를 바르게 반영할 가능성이 커진다. 계급이 항상 계급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급 의식에 도달하기 전에도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불명확하고 부분적인 의식을 가진다. 이것을 즉자적(an sich) 상태라고 하며, 계급이 고유의 정당과 강령(綱領)을 가질 때 대자적(fur sich) 상태로 된다.즉 계급 의식을 가진 계급이 된다. 그 후 계급 의식은 계급의 구성원 가운데 강령에 대한 지지자가 증가하고, 실천적 경험과 과학적 연구에 의해 진보하고, 발전한다.
계급 의식에 대한 주장은 루카치(Lukacs)와 루다스(Ludas)의 논쟁이 유명한데, 루카치는 계급 의식을 관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계급 의식을 계급에서 분리시켰고, 긴스버그(C.D. Ginsberg), 워너(Warner), 센터스(R. Centers) 등 사회 심리학에 입각한 계급 의식론은 계급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또한 계급 의식을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이성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는 계급 의식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을 배격한다. 계급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상대적이다. 마르크스의 가장 현저하고 비 인간적인 허위는 인간을 초월하여 계급을 보는 일이다. 사회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사회 문제가 해결하려는 것은 곧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은 지나가는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 반면에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이것만이 하느님 앞에 설 수가 있다. 결국 인간을 한 계급의 구성 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도 하느님도 부정하는 일이 된다. (⇒) 계급투쟁
[참고문헌]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한용희, 가톨릭시즘의 공산주의 비판, 숙명여대 정치경제연감 논문집, 1981 / R. Centers, The Psychologt of Social Classes, 1961.
경험론은 이성(理性)보다 경험이 지식의 원천이라는 이론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대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주장은 강조점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됨으로써 다양한 유형의 경험론이 나타나게 된다. 경험론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 ’empeiria’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 라틴 번역어인 experientia에서 다시 영어 experience라는 말이 나왔다. ‘경험’이라는 말의 가장 좁은 의미는 색깔, 소리, 냄새 등에 대한 감각 지각이며, 보다 넓은 뜻으로 이해될 경우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때로는 경험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체험을 뜻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그것은 일상 용어법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기는 하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경험은 감각 지각과 그에 대한 기억의 산물이라고 말한 이래 철학사에 있어 경험의 공통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감각적 지각이라 할 수 있다.
경험론이라는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쓸 경우, 그것은 감각이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의 지식을 제공한다는 약한 주장으로서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 같은 특정한 지식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한 거부하기 어려운 입장이며 과학 내지는 상식에 의해 대변되는 일상적인 유형의 사고방식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경험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나 그것을 보다 극단적인 유형으로 발전시킬 경우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보다 강한 주장의 경험론이 성립하게 되는데, 근세 철학사에 있어서 대륙의 합리론과 대립했던 영국의 경험론은 바로 이러한 특정한 입장을 가리킨다. 이런 입장에 의하면, 경험 이외에 인간 지식의 다른 원천은 존재하지 않으며, 경험과 상관없이 그 진위를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선험적(先驗的)이라고 불리는 수학적인 명제만을 제외한다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보고이거나 그로부터의 추론에 의거해서 그 진위가 판명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경험론은 밀(J.S. Mill)과 같이 수학적 명제까지도 경험으로부터 고도로 확증된 일반화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경험론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대륙의 합리론뿐만 아니라 영국의 경험론도 지식 이론에 있어 회의주의(懷疑主義, skepticism)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경험론은 감각 경험에 의거함이 없이 이성만으로 지식이 성립한다는 가정을 거부하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의 확실성에 도달하는 대안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점에서도 합리론에 대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합리론과 경험론은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확실성이 요구된다는 생각에서 일치하나 그러한 확실성의 원천이나 그로부터 다른 일반 지식을 도출하는 방법에 있어서 각기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론은 기하학을 방법적 모형으로 하여 의심할 수 없는 최초의 공리(公理)로부터 엄밀한 연역 논증에 의해 여타의 지식을 도출하고자 하나, 경험론은 당시의 경험과학적인 모형을 이용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감각의 기본 요소로부터 다른 지식 체계를 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경험론의 창시자는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말할 수 있으나, 경험론의 역사에 있어 그의 지위는 불분명하다. 최초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힌 경험론자는 감각이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한 에피쿠로스(Epikuros)였다. 동시에 그는 극단적인 원자론자(原子論者)이기도 하여 감각 지각은 영혼의 원자와 물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영상간의 접촉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경험론적인 지식 이론의 맥락은 다시 중세의 아퀴나스에서 발견된다. 물론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논리적 논증이라는 방식에 의해 증명된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전한 경험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의 내용이나 소재는 경험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먼저 감각 속에 없던 것은 지성 속에도 없다고 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경험론은 17,18세기 영국 철학의 전통을 이어간 로크(J. Locke), 버클리(G. Berkeley), 흄(D. Hume)에서 전개된다. 경험론자로서 로크의 주요 과제는 인간 지식의 기원, 확실성 그리고 범위를 고찰하는 일이었다. 지식의 확실성에 언급하고 있음은 데카르트와 유사하게 회의주의를 극복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의 감각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날 때부터 타고난다는 관념, 즉 데카르트의 생득관념(生得觀念)의 이론을 공격하는 데 있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타고난 정신은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는 백지(tabula rasa)나 암실과 같다고 했으며, 후천적(後天的)으로 경험을 통해서 지식의 재료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지식의 소재로서 관념은 외적 지각으로서 감각과 이에 대한 내적 지각으로서 반성이라는 두 개의 원천을 가지며 이를 통해 받아들여진 관념이 단순 관념들이고 이들을 반복, 비교, 결합함으로써 인간 정신은 다양한 복합 관념들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크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관념들간의 관계, 즉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지각에 불과한 것이며, 이로부터 확실성의 정도를 달리하는 세 유형의 지식, 즉 직관적 지식, 논증적 지식, 감각적 지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직관지(直觀知)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지(論證知), 그리고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감각지(感覺知)를 가지는데 앞의 두 유형은 확실성을 가지는 선험적 지식이며 따라서 세 번째 유형과 구분된다. 로크는 감각적 지식이 선험적 지식과 같은 확실성을 갖지는 않으나 일종의 지식이라고 생각했으며, 외적 사물의 존재에 대한 엄밀한 의미의 증명은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단순 관념의 원인으로서, 그리고 감각들의 일관성을 통해서 외적 대상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사물의 성질을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하는 제1 성질과 이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의 감각 속에만 나타나는 제2 성질로 구분하고 있으나, 로크의 경험론에 충실할 경우 사물의 존재와 제1 성질은 근거를 대기 어려운 하나의 난점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경험론자인 버클리의 관점은, 로크의 철학에 있어서 경험론에 합치하지 않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일에 있었다. 그는 우선 외적 사물의 존재, 즉 물체의 실체를 부인하고 제1 성질과 제2 성질의 구분이 불가능함을 보임으로써 제1 성질도 제2 성질과 같은 주관적 성질로 환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 사물의 존재는 지각됨(esse est percipi)이라 하여 그것은 지각됨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고 정신의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의 정신과 그 산물인 관념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관념론은 주관적 관념론 혹은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의 난점을 야기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난점은 그로 하여금 결코 인간의 감각 경험에 주어지는 적이 없는 신의 정신이라는 개념에 의거함으로써 해결하게끔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하나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즉 만일 정신으로서 나만이 존재한다면 유아론과 같은 괴이한 이론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타인의 정신과 신의 존재를 가정할 경우 ‘esse est percipi’라는 경험론의 기본 원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 경험론자인 흄은, 관념에 대한 로크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버클리의 학설에서 비경험적 요소를 제거하는데 주력함으로써 경험론을 극단에까지 전개해 갔다. 그는 로크의 관념 이론을 더욱 세분하여 생생한 직접적 지각으로서의 인상(印象)과 퇴색한 인상이 상상에 의해 재현된 것으로서 관념을 구분하였다. 그도 관념을 감각에 의한 관념과 반성에 의한 관념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으로 갈랐다. 흄은 버클리와 더불어 인상의 배후에 어떤 존재가 있음을 부인했으며 모든 단순 관념은 그에 대응하는 인상의 모사일 뿐이며 따라서 인간 정신도 이러한 한계 속에서만 국한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경험론을 물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나 정신이라는 실체에까지도 일반화하여 인간의 정신도 결국 인상이나 관념의 행렬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회의론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흄은, 우리의 관념들은 임의적으로 상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일정한 방식과 규칙이 있다고 하였으며 유사성, 공강적인 근접성, 시간적인 인과성이라는 세 원칙을 관념 연합, 즉 연상의 법칙으로서 제시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근거로 해서 그는 종래의 인과율, 실체 등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 사이네 필연성이 있다는 종래의 생각은 근거 없는 것이며 우리의 직접 경험 즉 인상에 주어지는 것은 두 사건간의 시공적 근접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성은 필연적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두 관념을 결합한 데서 생긴 상상의 산물이요, 반복적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습관에 의한 신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실체도 결코 인상에 주어지는 적이 없으며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개개의 성질이나 상태일 뿐이며 우리의 습관적 연상 작용이 성질들을 결합해서 그것들을 떠받들고 있는 어떤 기체(基體, substratum)가 있을 것으로 상상함으로써 실체의 관념이 형성될 뿐이라고 한다. 물질적 실체뿐만 아니라 정신 현상들을 통일적으로 지지하는 자아, 영혼, 인격 등 심적인 실체 역시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의 필연성과 실체의 존재까지 부인함으로써 드디어는 신의 존재도 경험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게 되며 결국 전통적 형이상학의 근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에 있어서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의 확실한 논증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수학이었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적 전통, 특히 버클리나 흄의 저술이 갖는 치명적인 결과는 그 뒤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는 버클리나 흄의 결론을 수정하여 절충적인 지식 이론을 전개하려는 시도로서 경험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지식에 있어서 합리론적인 요소를 인정하는 길이다. 흄에 의해 독단의 잠을 깨게 되었다는 칸트에서 비롯해서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가 갖는 지식의 확실성도 보장하면서 동시에 흄의 회의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 지식 이론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길은 지식에 대한 보다 완벽한 경험 이론을 전개하는 것으로서, 19세기의 밀이나 현대에 와서 논리 실증주의 혹은 논리적 경험론은 이러한 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경험론자들은 일반적으로 논리학, 수학에서 발견되는 필연적 진리와 다른 영역에서 발견되는 경험적 진리를 엄밀히 나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필요성은 논리학과 수학에만 국한되고 모든 다른 진리들은 우연적인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상의 이유 때문에, 다른 편으로는 현대 논리학이 철학적 문제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인해서 20세기 경험론자들은 자신들을 논리적 경험론자(logical empiricist)들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으며, 논리 실증주의와도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반적으로 20세기 경험론은 지식의 소재 문제보다도 지식의 경험적 기초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전자의 문제를 고찰할 경우에는 영국 경험론과 같은 심리학적 고찰을 반복하거나 의미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하면, 인식론적으로 의미를 갖는 모든 명제는 논리적 명제와 경험적 명제로 나누어지는데, 수학이나 논리학의 명제들과 같이 필연적인 진리를 내포하는 논리적 명제는 용어의 정의나 의미에 의해 참임이 증명되는 것이나 그것은 세계에 관해서 아무런 내용도 전달하지 않는 것이다. 논리적 명제를 제외한 모든 명제는 우연적인 진리에 관한 것으로서 감각 경험에 기초한 것이며 따라서 감각 자료에 관한 기본 명제로 직접 간접적인 환원을 통해서 검증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경험적 언어들은 보다 기본적인 다른 경험적 언어에 의해 정의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예시적(例示的)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표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최종적으로는 경험에 직접 관련해서 그리고 경험에 의거해서만 처리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시적 정의란 어떤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서 용어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다른 이해 방식이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기본적인 경험 명제는 감각 자료에 관한 명제로서 경험의 직접적인 기록이며 예시적 정의가 가능한 용어, 즉 감각 자료의 이름으로 구성되는 명제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경험론은 지식의 확실성이 직접적인 경험에서만 발견되며 모든 지식은 이러한 경험에 입각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론이 이러한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크게 성공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18세기 경험론이 결국 회의주의에 봉착했으며, 20세기 경험론의 환원적 방법이 일반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최근에 와서는 지식이 과연 그런 종류의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인지, 회의주의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제시함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하는지 등의 문제들이 일상 언어 철학적 관점에서 검토되고 있다. (黃璟植)
[참고문헌] F.C. Copleston, Contemporary Philosophy, Westminster, Md. 1965 / J. Collins, A History of Modern European Philosophy, Milwaukee 1954 / G. Faggin, EncFil 1:1878-94 / E.H. Gilson, Elements of Christian Philosophy, New York 1960 / S.H. Hodgson, The Metaphysic of Experience, 4v., NewYork 1898 / G.P. Klubertanz, The Philosophy of Human Nature, New York 1953 / G. de Santillana and E. Zilsel, The Development of Rationalism and Empiricism, Chicago 1941 / Eisler 1:334-336.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발간되는 월간지. 1906년 10월 9일 창간된 <경향신문>의 부록 <보감>(寶鑑)이 그 전신이다.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1911년 1월 15일부터는 <경향잡지>라는 제호 아래 주간지에서 격 주간으로 바뀌어 복간(復刊)되었다. 창간 당시 발행인 겸 편집인은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로 국판 8면의 크기였다. 애국 계몽적인 ‘법률문답’의 내용이 가장 두드러지며, 그 밖의 논설과 교회에 대한 지식 등을 수록하였다. <경향잡지>로 제호가 바뀌면서는 24면으로 증면되고 계몽적인 성격보다는 교리 지식의 전달 등을 주로 한 내용이 부각되었다. 일제(日帝)의 탄압과 물자 난 속에서도 어렵게 간행하였으나 결국 1945년 5월 15일 폐간되었다. 그 뒤 1946년 8월 1일 월간 18면으로 복간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또다시 폐간되었다. 휴전이 된 후 다시 복간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주로 순교자 현양과 반공주의(反共主義)로 그 내용이 일관되다가 1959년 간행과 편집이 서울교구에서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로 이관된 이래 공의회 문헌 해설 등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문제를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잡지가 한글 전용과 새 맞춤법을 사용하여 한글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은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이다. 이 잡지는 한국 현대 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이 잡지의 일부(1906~1941년)가 한국 교회사 연구소의 편집에 의해 한국 교회사 연구 자료 제11집으로 1984년에 영인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