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학교 [한] 啓星學校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초등 교육기관. 1836년부터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교회에 대한 박해 때문에 활발한 교육 사업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가 1822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됨에 따라 조만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것을 예견한 블랑(Blanc, 白圭三) 주교가 종현 언덕을 사들이고 이 곳에다 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계성의 전신이다. 즉 부지를 마련한 블랑 주교는 학교를 세우게 하고 한문, 국어, 교리 등의 초등교육과 신학교에 들어갈 사람들을 위한 예비 교육을 실시케 하였다.

이 학교의 학생 중 최초의 신부는 김성학(金聖學) 신부였다. 그는 1883년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여 1897년 서품되었다. 그 뒤를 이어 1884년에는 정규하(鄭圭夏), 한기근(韓基根), 최 바오로, 문 바오로 등 4명이 페낭으로 유학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1886년의 뮈텔문서는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40여명이었음을 알려 준다. 1895년 약현학교가 개설되기 전까지 이 학교는 ‘종현서당’, ‘한문학원’, ‘종현학원’ 등으로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종현학원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후 약현학교의 개설과 함께 약현학교를 문밖학교, 종현학교를 문안학교라 부르기도 하였다.

1906년부터는 성 바오로수녀회를 초청하여 교육에 박차를 가하였고, 1909년에는 정식으로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수업연한 4년의 ‘계성학교’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남녀학생을 구별하여 남학교를 ‘계성’, 여학교를 ‘계명’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수업연한 6년의 계성보통학교로 교제와 명칭을 변경하였고, 1926년 늘어나는 학생으로 인하여 학교를 증축하였다. 1931년에는 계성심상소학교로, 1938년에는 계성국민학교로 교명이 각각 변경되었다. 1944년 현재의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를 병설하였다. 발전을 거듭해오던 계성국민학교는 6.25동란중인 1951년 25회 졸업생을 배출시킨 후 한때 폐교되었다가 1964년 다시 개교하였다. 1966년 유치원의 병설로 계성학교의 울타리속에는 계성여자중고등학교, 계성국민학교, 계성유치원 등 유아교육에서 고등교육까지 담당하는 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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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여학원 [한] 啓星女學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도회에서 설립, 운영하던 교육기관. 고녀(高女) 출신 여학생을 모집하여 가사에 필요한 제반 학과를 교육하였으며 가정과, 연구과 각각 1년씩의 전문 교육을 실시하는 2년제 학교였다. 1927년에 설립되었고 1944년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현 계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한다는 조건으로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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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여자중고등학교 [한] 啓星女子中高等學校

1944년 8월 10일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경성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京城啓星女子商業專修學校)로 개교한 여성중등교육기관. 어둠 속에서 항상 빛을 발하는 안내자 혹은 지도자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을 양성함과 아울러 성모님과 같이 현숙하고 순결하며 내적 용기를 가진 여성의 양성을 창립 목적으로 1942년 당시 국민학교 교육 의무화에 대비코자 여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당시 운영되던 계성여학원을 폐교하면서까지 1944년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그러나 곧 광복이 되어 1946년 6월 24일 인문계 여자중학교로 재개교하였지만 6.25동란으로 인하여 피난학교를 부산과 대구에서 운영하다가 1953년 본교로 복귀하였다. 한편 1951년 8월 31일 학제 변경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였다. 1957년 3월 한국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에서 학교 운영권을 이양받고 1959년 현재의 교표(校標)로 개정하였다. 1969년 3월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완전 분리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1975년 7월에는 ≪계성 삼십년사≫(啓星三十年史)를 출간하였다. 현재 중학교 30학급, 고등학교 24학급을 운영하면서 여성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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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동본당 [한] 桂山洞本堂

대구 대교구 주교좌 성당. 1886년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경상남북도 지역의 전교를 담당하여 대구로 부임하여 읍내 밖 신나무골과 새방골에서 은신, 전교하다가 읍내 정규옥(鄭圭鈺) 집에 주거하며 7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하였다. 그 뒤 1897년 현재의 계산동본당의 대지를 구입하고 그 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축성식은같은 해 성탄첨례날에 거행하고 성모를 성당 주보로 삼았다. 당시 성당 대지를 물색 중 처음에는 동산(東山)의 구릉지(丘陵地)를 내정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低地帶)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개신교가 그 동산을 매입하여 공사를 착수할 때는 적지 아니 후회도 많았다.

더욱이 어렵게 지은 한국식 목조 십자형은 완공한 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서상돈(徐相燉), 김종학(金鍾學), 정규옥 등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 계획을 세워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 혹은 홍콩에서 수입하여 서양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인 새 성당이 1902년 5월에 준공되었다. 2개의 종각이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 뒤 1911년 대구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되고 교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성당 종각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뒤쪽을 확장하여 남북으로 나래를 달아 1918년 완공되었다. 축성식은 1919년 5월 11일 거행되었다. 1983년 현재 신자 수는 9,887명이며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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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한] 啓蒙主義 [영] enlightenment [독] Aufklarung

‘계몽’이란 말은 원래 ‘빛이 들게 하는 것’, 그리하여 ‘어둠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말은 인간을 그 무지(無知)라는 암흑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지식(知識)이라는 광명에로 옮겨 놓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계몽주의’란, 어리석고 몽매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이성(理性)에 그 토대를 둔 지식에로 일깨워주려는 데 그 목표를 둔 근대 사조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계몽 사상의 근원은 고대의 그리스에까지 소급된다. 그리스인들은 참된 지식과 지혜(智慧)를 추구하는 것을 그들의 가장 큰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고대에 일종의 계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몽 사상이, 다만 철학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인간의 의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근대에 들어서서의 일이다. 다시 말해서, 좁은 의미의 계몽 사상 즉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기에서 시작되어 18세기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룬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그 시초에는 프랑스 · 영국 ·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생겨나게 되었으나, 곧 그 시대를 특징짓는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어, 근대 이후의 사상과 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 시대적 사상적 배경 : 역사적으로 볼 때, 첫째로 16세기에 시작하여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1643~1715)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기는 ‘절대군주주의'(絶對君主主義) 시대였다. 이러한 절대 군주주의를 특징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군주는 신(神)의 대리자로서 모든 법을 초월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주는 신 앞에서만 책임을 지며, 지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백성 또는 신하가 군주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추궁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불충일 뿐 아니라 독성죄를 범하는 것이다.

둘째로,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기까지 1세기가 넘는 기간은 ‘종교동란'(宗敎動亂) 내지는 ‘종교전쟁’ 시대였다. 즉 슈말칼덴 전쟁을 위시하여 30년 전쟁(1618~1648)에 이르기까지, 주로 새로이 대두한 프로테스탄트 계통과 가톨릭 계통이 대립하여 종교의 이름으로(비록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재산의 문제와 영토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할지라도) 서로를 살육하는 참극을 벌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겨 주었고 특히 종교를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배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해 주었다. 사상적으로 볼 때, 근대는 경험론(經驗論)과 합리론(合理論)의 시대이다. 첫째로, 경험론은 베이컨(F. Bacon, 1561~1626)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학문의 최대의 과업은 자연을 서술하는 것이며, 이것을 토대로 하여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자연을 서술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잘못된 표상들 즉 우상(偶像)들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인간의 의식이 가진 미신들을 제거해 타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인식의 원천은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한 경험이다. 그리고 유일한 참된 방법은 귀납법(歸納法)이라 하였다. 이렇게 얻어낸 지식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험론은 이제 로크(J. Locke, 1632~1704)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룬다.

둘째로, 합리론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와 더불어 시작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토대는 ‘생각하는 존재’인 ‘나'[我]이다. 그리하여 이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그 이성(理性)으로 명백하고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리라 하였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한없이 신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근대의 인간은 전통과 권위에 맞서서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게 되었고, 또한 사회 체제 특히 절대 군주에 맞서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게 되었다.

2. 계몽주의의 특성 : 1783년 쵤너(J.F. Zollner, 1753~1804)는 <베를린 월보>에 발표한 글 속에서, “오늘날 계몽주의란 말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고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곧, 그 물음에 대한 몇 개의 글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칸트(I. Kant, 1724~1804)의 해답(1784년)이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탓으로 초래한 미몽(未蒙) 또는 미성숙(未成熟)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성숙이란, 자기 자신의 이성(理性)을 남의 도움 없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미성숙은 다음과 같은 경우 자기 탓이다. 즉 자기 자신의 이성을 남의 도움 없이는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이성의 결함 때문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결단과 용기의 결함 때문인 경우이다. “제발, 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주의의 구호이다. 칸트의 이러한 규정을 통해서, 계몽주의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다. 계몽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탓으로 초래한 인간의 미몽 내지는 미성숙”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미성숙 앞에서, 계몽의 목표는 첫째, 인간을 그 후견인(後見人)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고 둘째, 인간이 자기 이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 이성의 힘으로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인식한 진리를 토대로 하여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도록 교육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계몽주의의 특성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自律性)과 독자성(獨自性)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계몽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자기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칙을 토대로 하여 모든 것, 즉 세계 · 인간 · 신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을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작업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성은 그 자체로 진리의 척도가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성은, 입법의 존엄성뿐 아니라 종교의 ‘거룩한 것’까지도 그 계몽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3. 계몽주의와 종교 : 계몽주의는 종교, 특히 당시의 계시종교(啓示宗敎)가 인간에게 타율을 조장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미성숙을 강요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계몽주의는 계시종교를 그 일차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계몽주의는 계시종교를 한편으로는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로 설명해버리려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이름으로 계시종교를 극복해 버리려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계몽주의와 계시종교 사이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긴장 관계 내지는 적대 관계가 성립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 관계 내지 적대 관계로부터 서로 대립되는 주의(主義)가 생겨나게 되었다. 즉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신앙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와 계시종교는 그 긴장 관계 내지 적대 관계를 통해서 서로 얻은 바가 많다. 즉 양편이 서로 자기 자신을 좀더 명백히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계시종교는 역사 속에서 계몽주의와 대결하면서, 일종의 ‘살빼기’ 요양을 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계시종교는 자기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다른 한편, 계몽주의는 역사 속에서 계시종교와 대결하면서 계몽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즉 참된 계몽이란, 이성이 전통 · 권위 · 계시종교 등 다른 것을 계몽해야 할 뿐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성 자체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또한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계몽된 이성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의식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검토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계몽주의나 계시종교 사이에 대두된 문제는, 그것이 역사의 일정한 시기에 생겨났고 또한 어떤 의미로는 마무리 지어졌다고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도 결코 끝나버릴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편으로 계시종교가 계몽사상을 피해 버리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해 나갈 때에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진면목을 보다 명백히 드러낼 것이다. 다른 한편 계몽사상이 계시종교를 피해 버리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해 갈 때, 자기 자신에 대한 계몽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계몽사상은 비로소 계몽된 계몽사상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E. Cassirer, Die Philosophie der Aufkl?rung, 2. Aufl., Tubingen 1932 / M. Horkheimer-Th. W. Adorno, Dialektik der Aufklarung, Amsterdam 1947 / M. Seckler, Aufklarung und Offenbarung, in: Christlicher Glaube in moderner Gesellschaft, Teilband 21, hrsg. von F. Bockle-F.-X. Kaufmann-K. Rahner-B. Welte, pp.5-78 / Was ist Aufklarung? Beitrage aus der Berlinischen Monatsschrift(1783-1786), hrsg. von M. Albrecht und N. Hinske, Darmstadt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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