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회 [한] 痛悔 [라] contritio [영] contrition

자신이 범한 죄를 뉘우치고, 슬퍼함과 동시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덕(德)의 행위. 죄를 뉘우치는 행위란 죄를 싫어하고 미워했다면 범하지 않았을 과거의 죄를 대상으로 하여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슬퍼한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 이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동반한다.

이 통회가 유효하기 위한 4개의 조건이 있다. ① 일시적 기분이나 감정으로 통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통회의 마음이 우러나와야 한다. ②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도록 해야 한다. ③ 지금까지 지은 모든 대죄(大罪)를 슬퍼하여 고해성사를 통해 죄가 사해지도록 해야한다. ④ 주체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가 최대의 악임을 인식하고 여기에 합당한 보속을 한다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회에는 완전통회(完全痛悔 혹은 上等痛悔), 불완전통회(不完全痛悔 혹은 下等痛悔)가 있다. 마지막으로 통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따라서 통회 이후는 하느님이 정해준 법에 따라 생활하며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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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본당 [한] 統營本堂

경상남도 충무시 태평로 369의 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마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로사리오의 성모. 현 명칭은 충무(忠武)본당이다. 1900년경 대구 및 진주지방에서 세례받고 들어온 김봉서(요셉), 윤원중(프란치스코), 강 카시미로 등이 동더리에 있는 정성집(안토니오)의 사가(私家)에서 첫 번 공소를 개설하게 되었고 그 뒤 도산면 법송리, 사량도 등에 이미 선교되어 교세가 날로 번창하다가 1929년 5월 25일 거제군 옥포리본당 주임 김후상(金厚相, 바오로) 신부에 의하여 통영읍 신정(현 서호동) 248번지에 교회를 개축,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본당주임으로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6대 주임 박동준(朴東俊, 마티아) 신부는 일제의 적산 사원을 불하받아 1947년 성당을 태평동 369의 1로 옮기고 1957년 본당명을 충무본당으로 개칭하였다. 1968년 이르러 정순구(鄭淳九, 요한) 신부가 사원을 헐고 그 이듬해에 연건평 270평의 성당을 축성하기에 이르렀다. 교세가 날로 발전하여 서부지역에 200주년 기념 성당인 대건성당을 1983년 착공, 1984년 10월 준공하였다. 육영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유치원(충무유치원, 1977년 개원) 1개소도 운영하고 있다.

초대 송남호 신부 이래 13대 박해준(朴海俊, 치릴로) 주임신부에 이르도록 역대 12명의 신부가 본당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결과 1983년말 현재 통영본당은 4개 공소(사량, 법송, 연화, 욕지)를 관할하고 있으며 신자수는 3,031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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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고 [한] 痛苦

고통을 의미함.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하신 고통이나 성모 마리아가 당한 고통을 옛 기도서에서 통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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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경 [한] 通經 [관련] 기도 염경

두 사람 이상의 사적인 모임이나 공적인 단체가 염경(念經) 기도를 드릴 때 기도문을 번갈아가며 읽는 것, 또는 기도문. 특히 공적인 단체가 드리는 공동기도(public prayer)는 교회에서 인간된 기도문을 사용하며, 단체 즉 교회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수권자(受權者)에 의하여 주송(主誦)되고 회중이 응송(應誦)하는 경우를 말한다. (⇒) 기도, 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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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 [한] 土着化 [영] inculturation

교회가 향토문화와의 전면적인 동일화를 모색하고 그럼으로써 그 본질을 구현해 나가는 과정. 이는 현대신학의 새로운 용어이며, 대단히 풍부하고 복잡하며 따라서 어려운 개념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특히 교회헌장, 사목헌장 및 선교교령에 제시되어 있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에반젤리이 눈시안디>(Evangelii Nuntiandi)에서 폭넓게 전개되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듯이, 교회는 자체의 본질에 속하는 선교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선교 대상지역의 주민들을 그리스도교화시키기 위하여 그 지역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이렇게 적응함으로써 교회가 그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이 토착화이다. 그러므로 토착화의 개념이 근거하고 있는 신학이론은 마치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이 구속(救贖)을 위함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을 위함이듯이 토착화는 충만한 그리스도교화를 위함이라는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라 토착화의 정도는 전면적이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과 같이 한국교회는 완전히 한국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 그분의 인간적인 것과의 실존적인 동일화(同一化)가 전면적이었듯이 교회의 한국 문화와의 동일화도 전면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토착화를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 사이에 어떤 ‘균형’을 잡는 과정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평균’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그리스도 신비의 연장인 교회의 신비는 온전히 인간적인 것(한국적인 것)과 온전히 신적인 것(그리스도교적인 것)이 한 사회 안에 결합되는 그것이다.

토착화의 원리상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에 선행(先行)하는 강생이 구속에 선행하듯이 토착화는 그리스도교화에 선행해야 한다. 실로 한국의 그리스도교화는 교회가 먼저 한국화하는 거기까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토착화만 이루어지면 그리스도교화는 자동적으로 달성된다는 뜻이 아니고 한국화는 그리스도교화와 꼭 같이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토착화는 그리스도교화를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무슨 사치나 필요악으로 여겨서는 아니 된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강생이 오직 구속의 수단에 불과한 것만이 아니고 그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가 부활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강생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인간과 하나가 되신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그의 죽음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요한 15:13) 가장 큰 사랑의 행위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에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있듯이 토착화에도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교화란 인류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합체되는 것이라 할 때 한국화란 그 합체에 예비적인 것이 아니고 그 합체 자체의 첫 순간이 되는 것이다.

토착화의 분야에 관해서는 교부들이 그리스도 가현론(假現論)에 반대하여 내세운 “취(取)해지지 아니한 것은 구속(救贖)되지 아니한다”는 원리에 따라야 한다. 만일 교회가 강생하여 들어가서 취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한국문화의 일면이 있다면 그 일면은 구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국문화의 모든 면을 구속하기 위하여 모든 면에 강생해 들어가야 한다. 한국 문화를 구속하는 데 있어서 교회는 한국 문화를 개조(改造)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인들 자신이 개조해 내고 싶어 하는 그러한 문화면에서 개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한국문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교회가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적이란 것의 일면에는 동서(東西)가 맞부딪치는 데서 독자적인 무엇 즉 철저히 한국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어떤 것을 형성해 내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회의 한국화란 교회가 이 투쟁에 참여하여 교회를 철저히 한국적인 동시에 철저히 현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W.E. Langley, S.J., 土着化의 槪念, 展望 6호, 1660 / New Catholic Encyclopedia, McGraw Hill, 1969 / W.E. Langley, S.J., 그리스도 降生과 敎會 土着化, 展望 9호, 1969 / W.E. Langley, S.J., 聖事의 制定과 土着化의 限界, 展望 17호,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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