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한] 律法 [라] Lex [영] Law [관련] 모세 오경 율법주의

율법은 구약의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율법이란 희브리어 torah를 번역한 것이며, 성서의 처음 5책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 있다. 성서의 처음 5책을 특히 오경(pentateuch)이라 하는데, 이 오경에는 고대 유대민족의 생활을 포괄하는 여러 규범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율법은 오늘날의 법보다는 넓은 뜻을 가진 것으로서 생활관습이나 도덕규범도 포함하고 있다. ⇒ 율법주의, 모세 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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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라] Julius

Julius, 2세(1443~1513). 르네상스기의 교황(재위 : 1503~1513). 원명 Giuliano della Rovere. 이탈리아 사보나 부근에서 태어나 숙부인 교황 식스토 4세의 후광을 업고 많은 주교령을 받았으며,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1471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재위 : 1484~1492) 즉위와 그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나, 다음의 알렉산데르 6세와 사이가 나빠서 그의 재위기간 중에는 프랑스로 물러가 있었다. 6세의 사후 로마로 돌아와서 교황이 되었다. 타고난 정치가여서 이미 알렉산데르 6세 시대에 프랑스왕 샤를 8세의 나폴리 공략을 유발하고 캄브레이동맹(1508년)으로 프랑스와 결탁하여 스페인에, 독일과 결탁하여 베네치아에 대항하였다. 프랑스의 세력이 이탈리아에 강화되자 영국, 스페인, 베네치아, 스위스를 포함하는 신성동맹을 체결(1511년), 스페인, 베네치아의 힘을 교황청을 위해 이용하였다. 이렇듯 정치 목적을 위해서는 어제까지의 적과 동맹을 맺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나 스페인 세력의 대두를 누를 수는 없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사심(私心)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교황권을 정치영역에서 강화 ·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교황청은 더욱 종교적 권능을 잃고 세속화 하였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율리오 2세에 대항할 피사회의를 제창했으나(1511년) 성공하지 못했고, 이듬해 율리오 2세가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 대항하였다. 이 회의는 1517년까지 계속되는데 프랑스의 교회는 율리오 2세의 말년까지도 이 회의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 미술을 애호하여 브라망테(Bramante,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 라파엘로(S. Raffaello, 율리오 2세의 초상화 등), 미켈란젤로(B. Michelangelo,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세상을 조각) 등의 예술가를 보호하였다. 성 베드로 건축을 위한 성년대사(聖年大赦)를 포고(1506년), 전대사부(全大赦符)를 발행, 이것이 후에 레오 10세에 의해 갱신됨으로써 루터(M. Luther)의 95개조 제제(提題)의 직접적 동기의 하나가 되었다.

Julius, 3세(1487~1555). 종교개혁기의 교황(재위 : 1550~1555). 원명 Giovanni Ciocci del Monte. 로마 태생. 법률을 공부하고 율리오 2세를 섬겼다. 추기경(1536년),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황사절의장(1545년)을 거쳐 교황이 되었다. 르네상스기 교황들의 화려 · 유타(遊惰) · 족벌주의를 계승하고 있지만, 교회개혁에도 열의를 보여 예수회를 육성하였다. 또한 예술을 애호하여 미켈란젤로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영국 에드워드 6세가 죽은(1553년) 뒤 추기경 폴(R. Pole)을 영국에 파견한 일 때문에 영국은 여왕 메어리 1세 때 일시적이나마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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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한] 尹亨重

윤형중(1703~1979). 신부. 세례명 마태오. 1903년 4월 29일 충청북도 진천(鎭川)에서 대를 이은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6살 때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해 살았다. 1918년 예수성심학교에 입학, 1930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서울 중림동(中林洞)본당의 보좌신부로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33년 가톨릭청년사 사장에 임명되었고 그 뒤 경향잡지, 경향신문 사장들을 역임하면서 언론창달과 저술활동을 통한 교리 전파에 전생애를 바쳐 가톨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인정받았다. 1954년에 가톨릭대학 의학부장, 1959년 미리내본당 신부, 1961년 복자 수녀회 지도신부 등을 거치면서 그간 순교한 복자현양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지성인들을 위한 교리 강좌를 열어 수많은 사회인사를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병인 폐암(肺癌)과 투병생활을 하다가 1979년 6월 15일 75세를 일기로 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하기에 앞서 성모병원 안은행(眼銀行)에 사후 안구(眼球)를 기증키로 한 첫 번째 등록자가 되어, 숨을 거둔 그 이튿날 유언대로 그의 안구는 실명자(失明者)에게 이식되어 광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되었다. 자서전(自敍傳)과 ≪나의 교우록(交友錄)≫, 그밖에 수많은 논문과 수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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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혁 [한] 尹昌赫

윤창혁(1862~1895). 평신도. 세례명은 비오. 평남 중화(中和) 출생. 1865년 베르뇌(Berneax, 張敬一)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병인(丙寅)박해 후 1871년 만주의 차쿠(岔溝)로 피신. 그곳에서 10여년을 살다가 1881년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형리들을 감화, 입교시켰다. 그 뒤 1886년부터 전교에 투신, 박해로 흩어졌던 평안도 지방의 교우들을 모으는데 전력하다가 1895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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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헌 [한] 尹持憲

윤지헌(1764~1801). 순교자. 세례명 프란치스코.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군 진산면) 출신. 정약종(丁若鍾)의 외사촌(外四寸). 1789년 그의 형 윤지충(尹持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 했고, 1791년 12월 8일 그의 형이 순교하자, 곧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으로 피해 살았는데, 1795년 이존창(李存昌)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더욱 믿음이 강해진 그는 교회발전을 위하여 전력을 다했는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4월 26일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다가 서울 의금부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주로 다시 이송된 그는 9월 17일 참수되어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또한 그의 부인은 흑산도(黑山島)로 아들은 해남(海南)으로 딸은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각각 유배되어 온 가족이 이산(離散)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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