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기도 [한] ∼祈禱 [라] Laudes, Matutinum [영] Lauds, Matins [관련] 성무일도

① 가톨릭 교회의 일반 신자들이 아침에 드리는 기도, 이는 하느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 속죄하는 하루가 되도록 생활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기도이며 조과(早課)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3세기의 테르툴리아노(Tertulianus)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가리켜 합법적인 기도라고 한 적이 있고, 로마의 히폴리토(Hippolytus of Rome)에 의하면 신자공동체는 아침마다 주교가 지정한 장소에 모여 사제와 부제로부터 봉독한 성서와 관련된 주제의 강론을 듣고 기도를 하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칙령 이후 신자들이 급증하자 교회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이 기도를 드리도록 모든 신자에게 명하였다.

신자들은 새로운 하루를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예수를 통하여 감사를 드리며(골로 3:17), 하루 일과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31) 성실히 수행 할 수 있는 은총 주시기를 자유롭게 기도한다. 이러한 자유기도에 익숙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하여 또 공동으로 기도드릴 때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 천주교주교회의는 주의 기도와 봉헌의 기도 등으로 구성된 아침기도문을 만들어 두었다.

② 성무일도(聖務日禱)의 찬과(讚課). 이는 찬미경이라고도 불린 기도인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아침기도’로 바뀌었다. 아침기도는 찬미가 시편, 성경소구, 응송, 즈가리야의 노래, 청원기도, 주의 기도, 본기도, 강복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침기도의 이러한 구성과 성무일도의 기도시간 편성은 이미 6세기 베네딕토(St. Benedictus)의 저서에 나타나며 이보다 앞서 3세기에 신자 공동체가 일정한 장소에 모여 기도하였던 아침기도에서 그 원형(原型)을 찾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무일도의 개정에 있어 원칙을 정하면서 “아침기도인 찬미경과 저녁기도인 만과경은 온 성교회의 존엄한 전통에 따라 매일 성무일도의 두 개의 돌쩌귀로서 가장 중요한 시간경으로 간주될 것이며 또한 이런 관점에서 바쳐져야 한다”(전례헌장 89)고 하였다. (⇒) 성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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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르나멘토 [이] aggiornamento [관련] 쇄신

개혁과 쇄신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그 뒤 교회의 현대세계에 대한 적응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대변해 주는 말이 되었다. ⇒ 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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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영] Ireland

영국제도(英國諸島) 중에서 둘째로 큰 섬나라이며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스도교는 4세기 이전부터 이미 브리튼 섬에서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로마교회에서 파견된 팔라디오(Palladius, 365?~431)나 파트리치오(Patricius, 387?~461?)의 업적은 주로 기존교회를 조직화하는 데 있었고, 전교는 제이의적(第二義的)인 것이었다. 서(西)로마제국의 붕괴 후 아일랜드의 교회는 해외와의 교섭이 없이 특이한 발전을 이룩하였다(500~800년). 즉 많은 수도원이 생겨 교회활동의 중심이 되고, 수도원장들이 주교들까지도 지배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파트리시오나 수녀회장 브리지드(Brigid) 등 많은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세들리오 스코투스(Sedalius Scotus), 에리우게나(J.S. Eriugena)를 비롯한 학자들도 많아 ‘성인과 학자의 섬’으로 불렸다. 해외전도도 활발해서 많은 전도자를 파견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스코틀랜드로 간 대(大) 골룸바노(563년), 유럽대륙에 간 소(小) 골룸바노(590년), 그를 따라 스위스로 간 갈로(J. Gallus)가 유명하다. 종교개혁 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잉글랜드의 종교적 경제적 압박을 받았다. 헨리 8세와 엘리자베드 1세가 강경히 영국 국교를 강제했기 때문에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의 저항과 반란이 되풀이 되었다. 1649년 크롬웰(O. Cromwell)에 의해 반란 진압을 이유로 철저한 토벌이 있으면서 마침내 잉글랜드의 완전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영국 본국의 식민지정책의 희생이 되어 격심한 빈곤상태에 빠졌다. 그 동안에도 가톨릭에 대한 압박과 그에 대한 대항이 되풀이 되었으나 1829년의 ‘구교도 해방령’에 의해 비로소 차별대우가 폐기되고, 또 성공회도 1871년에 국교(國敎)제도를 폐지하였다.

1922년 이래 정치적으로 남북으로 분열, 북단부(北端部)의 얼스터(Ulster) 지방은 영령 북아일랜드, 나머지 남부의 대부분 지역은 영국지배를 벗어나 아일랜드 공화국(1937~1949년에는 에이레 공화국이라 칭했음)을 형성하고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면적은 8만 4,431㎢, 총 인구 506만 7,000명, 영세 교우수는 약 387만 2,000명, 교구수는 26개, 본당수는 1,319개(1982년 현재)이며, 북아일랜드는 인구 약 140만에 영세 교우는 약 3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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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크 [원] Eyck

① 후베르트 반∼(Hubert van E., 1366~1426). 플랑드르의 화가,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의 형. 형제가 함께 중세 말기의 고딕적인 전통을 타파하고 날카로운 리얼리즘에 의한 새로운 화법을 완성했으며, 템페러화법 대신에 유채기법(油彩技法)을 시작함으로써 근세 북유럽 회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으로 확인된 유일한 그림은 벨기에 강(Gand)의 생바봉(Saint-Bavon) 대성당의 대제단화(大祭壇畵) <신비의 어린 양>이다. 그는 이 그림을 제작하다가 완성치 못한 채 죽었으며, 동생 얀이 마저 완성하였다.

② 얀 반의∼(Jan van E., 1370?~1440). 플랑드르의 화가. 후베르트 반 아이크(Hubert van Eyck)의 동생. 형과 함께 근세 북유럽 회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1425년까지 네덜란드 백(伯) 바비리아의 존(John)의 궁정화가였으며, 존이 1425년에 죽자 부르고뉘 공(公) 필립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얼마 후 필립의 심복이 된 그는 필립의 결혼문제에 관한 밀사(密使)로서 여러 번 사명을 완수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형 후베르트가 제작하다가 죽음으로써 미완성인 채 남긴 것을 마저 완성한 강시 생 바봉 대성당에 있는 대제단화 <신비의 어린 양>이다. 그밖에도 (1433, London, National Gallery), (1436, Bruges, Groeninge Museum), (1436, Paris Louvre) 등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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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한] ∼信仰告白 [라] Confessio Augustana [영] Augsburg Confession [독] Augsb

153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5세에게 루터파들이 그들의 견해와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제출한 신조(信條)로 7명의 제후들과 2명의 자유 도시 대표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주로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에 의해 씌어졌는데 그는 1529년 루터가 작성한 시바바하 조문(Schwabacher Artikel)과 마르부르크(Marburg) 조문, 그리고 1530년 한 위원회에서 작성된 토르가우(Torgau) 조문에 근거하여 이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루터파가 고대(古代)의 이단들을 부활시키고 있다는 에크(J.M. von Eck)에 의한 <404개조>의 기소(起訴)에 대항하여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조는 루터교회의 특별한 상징이 되고 있다.

루터교회가 성경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조금도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21개조는 신(神), 원죄(原罪), 그리스도, 신앙에 의한 통치, 성직자와 성령의 중재, 새로운 복종, 교회, 성사(聖事), 교회의 질서, 인간이 세운 전례,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 자유의지, 죄의 원인, 신앙과 선행(善行), 그리고 성인의 숭배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으며 나머지 7개 조문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한 성찬식(聖餐式), 사제의 결혼, 개인 미사의 폐지, 고백, 인간이 세운 전통, 수도 허원(許願), 주교의 권위 등의 문제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한 교황 측을 비롯한 제국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으므로, 멜란히톤 휘하의 루터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옹호문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접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멜란히톤은 1531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이것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옹호문≫으로 개작하여 신앙고백 원문과 함께 출판하였다.

이것은 원문의 입장을 반복하고 변호한 것이었으나 성사의 정의와 영성체의 성사적 측면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전의 입장을 능가하였다. 1540년 멜란히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개정판을 출판하였는데 독일 신교파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된 반면, 1539년의 신앙고백을 고집하는 루터파로부터 거부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영국교회의 <39개조>등 16세기의 다른 신앙고백들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H. Lietzmann, Die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Gottingen 1952 / Fr. Brunstad, Theologie der lutherischen Bekenntnisschriften, Gutersloh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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