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시(滿洲 間島省 延吉縣 明月溝市)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요셉. 명월구의 옹성납자(甕聲磖子) 마을은 1900년대초 조선 이주민들이 개척한 교우촌으로 팔도구 본당의 관할지역이었다. 1924년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保祿學校)[1926년 해성학교로 개칭됨]가 개설된 후 1926년 대령동 본당의 창설과 함께 대령동 본당의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시래플(C. Schrafl, 周)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학교를 증축하고 교세신장에 힘을 쏟아 1936년 신첨본당을 분리, 창설시키는 한편 올리베타노 베네딕토수녀회 분원을 설치, 동(同)회의 수녀들로 하여금 진료소를 운영케 하였다. 그 후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42년 성당 신축을 시작, 1944년 벽돌양옥의 성당을 완공했으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어 이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 부인들의 모임인 안나회를 포함하여 3개의 단체가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 해성학교, 진료소가 있었다. 1936년의 교세는 교우수 1,266명, 공소 7개소 등이었다.
명오 [한] 明悟 [영] intellect
이 용어는 가톨릭 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던 옛말의 하나인데, 예를들면, “일곱 여덟 살에 명오(明悟)가 열린다”고 보는 주장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가톨릭에서는 7, 8세 때, ‘명오가 열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시 말하여 ‘깨달음이 시작됨’을 뜻하였다. 사물에 대하여 밝게 인식하는 일, 또는 그러한 힘을 가리켜 ‘명오’라는 용어를 써왔다. 그러므로 이 말은 철학적인 의미 영역을 내포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한불자전≫의 풀이를 보면 ① 지성(知性), 이지(intellect), ② 이성(理性), 지각, 판단력, 인식력(raison), ③ 총명, 지능, 이해력, 사고력(intelligence), ④ 통찰력, 혜안(慧眼, penetration)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명오’ 즉 지성은 ‘감성’(感性)에 맞서는 대립적인 말로서, 실재하는 것을 비(非) 물질적인 방법으로 알아내는 인식의 정신적인 능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각과 상상력보다도 본질적으로 높은 차원의 사고기능을 가리키며, 이러한 ‘명오’ 즉 지성을 소유하는 것은 인간인데, 천사와 악마의 경우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은 좁은 의미에서의 지성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은 ‘이성’과 거의 마찬가지 의미로 쓰이거나, 또는 ‘오성’(悟性)의 뜻으로도 쓰일 때가 있다.
명동본당 [한] 明洞本堂
서울 대교구 주교좌 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며 심장인 본당이다. 본당이 설정된 것은 1882년경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4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 해 가을부터 수표교(手標橋)의 이벽(李檗)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부근) 소재 중국어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에 교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신앙공동체는 그 이듬해 형조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간되어 김범우가 충청도로 유배되면서 해체되었고, 명동은 1882년에야 다시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미수호조약이 체결(1882년)됨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회장 김 가밀로에게 성당부지를 물색, 매입하게 하였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기지분쟁이 일어나 성당건립은 지연되었지만 신자수는 계속 증가하여 1892년에는 남대문 밖에다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을 분리시켰다. 이후 한때 종현성당은 문안성당, 약현성당은 문밖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약현본당의 분리와 함께 기지분쟁을 매듭지으면서 종현본당은 성당의 공사에 착수하였다. 코스트(Eugene Coste, 高宣善) 신부가 성당의 설계를 맡았고, 공사감독도 순수 지휘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면서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본당을 맡아보면서 성당건축을 마무리지었다. 1898년 5월 29일 성당을 축성식과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1900년 9월 10일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에서 옮겨와 지하묘지에 안장하였고, 1925년 3월 3대 주임으로 비에모(Villemot, 禹一謨)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듬해 10월 17일 백동본당(栢洞本堂, 현 혜화동 본당)을 분리시켰고, 1939년 2월 11일에는 문화관을 준공하였다. 194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기준(李起俊, 도마) 신부가 종현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고, 1944년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파견한 전교수녀 2명을 맞아들여 사목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종현본당은 성당명을 종현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고, 12월 8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 귀국환영 미사를 봉헌하였다. 1947년 가톨릭출판사를 설립하여 각종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6월 29일 세종로 본당, 1948년 12월 신당동 본당, 1949년 가회동 본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1950년 7월 16일 북한의 공산군에 의해 성당과 부속건물 및 교구청이 징발당하는 한편 신부들이 추방되었다가 9월 26일 서울수복과 함께 돌아온 신부들에 의해 성당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1955년 종로본당을 분리시켰고 1957년 7월 장금구(莊金龜,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강화본당으로 전출되면서 6대 본당주임으로서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가 부임했으며, 양 신부는 재임 동안 현 교육관 건물을 건립하였고, 한국 천주교로서는 최초로 본당주보를 창간하였다. 1962년 1월 3일 7대 본당주임으로 이종순(李鍾淳)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 해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1964년 8월 1일 신인식(申仁植) 신부가 가르멜 수녀회 지도신부로 전출되면서 9대 본당주임으로 황민성(黃旼性) 신부가, 1965년 4월 10대 본당주임으로 이계중(李啓重) 신부가, 1968년 6월 28일 11대 본당주임으로 이문근(李文根) 신부가 각각 부임하였다. 1970년 2월 17일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를 구성하였고 3월부터는 토요특전미사제를 도입하여 시행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월간 <가톨릭 명동>을 창간하였다. 1971년 5월 14일 12대 본당주임으로 최석우(崔奭祐) 신부가 부임하면서 ‘명동 대성당 복원보수위원회’를 구성하여 다각적인 보수계획을 수립하였다. 1972년 13대 본당주임으로 김몽은(金蒙恩) 신부가 부임하였고 1976년에는 3.1 명동사건이 발생하였다. 1977년 3월 경갑룡(景甲龍) 주교가 14대 본당주임을 겸하였고 1982년 김수창(金壽昌) 신부가 1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83년 말 현재 신자수는 2만 6,974명이며,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명도회 [한] 明道會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 명회(明會)로도 불렸다. 1795년 최초의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한 주 신부는 오래 전부터 북경(北京)에 세워져 있는 그와 비슷한 회의 본을 떠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뜻의 이 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는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을 임명하였다. 명도회원들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해 깊은 지식을 얻도록 노력하고 다음으로는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었다. 주 신부는 이 회를 위하여 개최되는 장소, 사회자의 임명, 남녀가 유별될 것 등을 규정해 주었으며 회는 점차 전국으로 보급되어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다.
내용이 엄격한 ‘명도회규’(明道會規)도 주 신부가 직접 만들어 시행케 했는데, 그 ‘회규’ 자체는 오늘날 전해진 것이 없다. 주 신부에 의하여 임명된 명도회의 사회자는 회원들에게 매월 그 달의 주보성인(主保聖人)이 지정되어 있는 회원권을 나누어주었다. 명도회에 가입하는 절차이기도 한 이러한 회원권 제도를 당시의 신자들은 보명(報名)이라고 불렀는데, 보명이란 열심한 신자를 신부에게 알리면 신부가 교회의 성인 이름을 따라 지어 보내고 연말에 가서 신자의 부지런함 여부와 전교한 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에 관해 다른 기록은 “먼저 이름자를 보고하고 신공(神功)을 하는데, 신공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입회가 허락되고 부지런히 하지 않은 사람은 제명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교회의 지도급 인사였고 명도회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던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에 의하면 명도회의 집회 장소로는 육회(六會), 즉 여섯 군데가 있었는데, 그 중 다섯 곳은 홍필주(洪弼周), 홍익만(洪翼萬), 김여행(金勵行), 현계흠(玄啓欽), 황사영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첨례(瞻禮)[축일] 때마다 신도들과 같이 육회에 참석하여 포교에 힘썼으며 육회는 각각 3, 4명 내지 5, 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사영에 따르면 그가 맡았던 모임은 자신을 필두로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愼行), 이재신(李在新) 등 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었으며 그중 조신행과 이재신은 양반, 손인원은 중인이었다고 한다.
지방에서의 명도회 활동은 자료의 부족으로 분명치 않으나 서울에서만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음이 확실한데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는 이에 관해 “회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도 이에 감화되어 모두 전교를 일삼았으므로 경신년(庚申年, 1800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하루하루 입교자가 불어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주신부와 정회장 등 간부가 모조리 순교하는 바람에 자연 그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으나 1827년의 순교자 이경언(李景彦)이 명도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등으로 미루어 그 후에도 이 조직이 꾸준히 존속된 것은 확실하다.
한편 현재 각 교구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도회’ 또는 ‘명도원’ 같은 단체는 이름만 같을 뿐, 이 명도회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1979-1981 / 黃嗣永等推案 純祖 辛酉, 1801 / 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1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