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빌 [원] Liouville, Lucien Nicolas Anatole

Liouville, Lucien Nicolas Anatole(1855-1893). 한국명 유달영(柳達榮). 조선교구 선교사. 1874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78년 3월 16일 사제품을 받자 곧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조선교구의 주교가 체포되는 등 박해가 심해 곧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어, 그는 만주에서 2년간 머무르며 한국어와 한자를 익히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는 동안 감옥에서 풀려나 만주로 추방된 리델(Ridel) 주교를 만났고, 1880년에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두 번째에 성공하였다. 1880년 11월 12일 황해도 땅에 들어선 그는 산간 옹기마을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881년 3월 18일에 드디어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조금도 동요됨이 없는 태연자약한 태도에 포졸들은 그 이튿날 그를 풀어 주었으므로 그는 서울로 피신할 수가 있었다. 6주일 후에 충청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가을에 조선교구를 맡게 된 블랑 주교를 대신하여 전라도지방을 맡게 되었다. 그 후 6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전교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교세 확장을 보았으나, 반면 그의 건강은 날로 약화되었으므로, 블랑 주교는 새로 세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당시의 신학교는 한식건물이어서 매우 불편했으므로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는 한편 항상 사랑으로 신학생들을 인도하여 장차 훌륭한 성직자로서의 자질을 함양시키는데 주력하였다. 1893년 4월 26일 장염과 복막염으로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선종하자 많은 제자와 성직자들이 다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유신부 군난사기≫가 있다.

[참고문헌]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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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용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Lugdunense [영] Council of Lyon [관련] 공의회

프랑스 리용에서 개최된 2회의 공의회.

제1차 리용 공의회(1245년, 제13차 공의회). 교황 인노첸시오(Innocentius) 4세가 소집하였다. 참석자는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의 주교들로서 그 수는 150명을 넘지 않았다. 회의는 3회기에 걸쳐 열렸는데, 첫 회기에서 교황은 당시 교회의 5상(傷), 즉 성직자들의 죄악상과 예루살렘 성지의 상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위협, 헝가리에 대한 몽고 타타르족의 침략, 그리고 특히 성직자에 대한 프레드리히 2세의 박해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결국 공의회는 이 왕에 대한 파문과 자격박탈을 선고하고, 타타르족에 대결할 준비와 라틴제국 및 성지 지원책을 마련하였으며, 교회개혁에 관한 22개의 칙서를 공포하였다.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 제14차 공의회).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10세가 동방교회와의 재일치, 성지 해방, 도덕의 개혁을 위해 소집하여 500여 주교, 60여 대수도원장, 그리고 1,000여명의 고위성직자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는 알베르토(St. Albertus),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그리고 후일의 인노첸시오(Innocentius) 5세 등이 있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참석차 오는 길에 사망하였다. 일치문제에서, 시칠리아의 샤를르 왕을 두려워하는 미카엘(Michael) 8세는 동서방교회의 일치문제에 대한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의 제의에 호의를 보였으며 친히 대표를 파견하였다. 6회기 중 제4회기에서 재일치가 이루어졌는데, 황제 대표는 필리오케(Filioque), 교황의 우위성, 연옥(煉獄), 칠성사(七聖事)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신경(信經)과 제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황제칙서를 낭독함으로써 결국 잠정적인 것으로 끝났던 동서방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졌다(1274-1289년). 이밖에도 극동지방에 대한 선교가 제의되었으며 성직자의 수입에 십일조를 부과하여 십자군 원정을 돕는 법안과 ‘콘클라베’(conclave)라고 불리는 교황선거법안도 통과되었다. 특히 후자는 그 뒤에 수정이 가해지기는 하였으나 계속 시행되고 있다. (⇒)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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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실리외 [원] Richelieu, Armand Jean de Plessis

Richelieu, Armand Jean du Plessis(1585-1642). 프랑스의 추기경, 정치가. 루손의 주교(1606년)로 시작해서 삼부회(三部會)에 선출되었으며 태후(太后) 마리 드 메디시스의 총애를 받고 그의 고문관이 되어(1616년), 태후와 루이 13세와의 불화를 조정하였다(1620년). 추기경(1622년), 재상(宰相)이 되고(1624년), 프랑스의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1629년∼). 그의 정책은 안으로는 위그노(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귀족들을 억압, 지방행정을 개혁해서 중앙집권을 확립하는 것이었고 밖으로는 함스부르크가(家)의 세력을 타파함으로써 유럽에서의 프랑스 세력의 신장을 꾀하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위그노의 난(亂)(1625년)을, 라 로셀(La Rochelle)에서의 포위전에 의해 진압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특권을 소멸시켰다(1628년). 도한 재정 · 군제 · 법률 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개혁을 하여 상공업을 장려했고, 식민지 개척에도 힘썼으며, 문예(文藝)를 보호하였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창립자이다. 주요 저서로는 ≪Memoire du cardinal de Richelieu≫(1623), ≪Testament politique≫(168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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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원] Richard, Pierre Eugene

Richard, Pierre Eugene(1842-1880). 파리 외방전교회원. 한국성 채(蔡). 조선교구 선교사. 차부제(次副祭)로서 1865년 9월 7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6년 12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1867년 12월 15일 한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 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그는 만주지방의 차쿠(岔溝)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곳 신자들을 돌보는 한편 선교사업의 경리를 맡아보았다. 규율에 엄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겸비한 그는 그곳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끝내 조선 입국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880년 9월 28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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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와 [원] Libois, Napoleon

Libois, Napoleon(1805-1872).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극동지역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프랑스에서 출생. 1832년 선교사로 중국에 입국하여 마카오의 극동지역 경리부 부경리로 활동하였다. 1837년 마카오에 유학온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3명의 조선 신학생에게 교회음악을 가르쳤고, 1842년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의 후임으로 극동지역 경리부장이 되어 극동지역에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을 지원하였다. 1842년부터 1846년까지 김대건 신부로부터 김대건 신부의 입국과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는 15통의 편지를 받고 이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고하는 한편,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돕고, 조선 전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1847년 극동지역 경리부를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기고 각 포교지의 경리부 신설에 노력하여 1857년 싱가포르, 1864년 상해(上海)에 경리부를 신설하였다. 1866년 프랑스로 귀국하여 그 후 사망할 때까지 교황청 포교지 경리부장으로 재직하였다.

[참고문헌] 李元淳 · 許寅 編著, 金大建의 편지, 정음사, 1975 /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下, 분도출판사, 1980 / 林忠信 · 崔奭祐 譯註, 崔良業神父書翰集,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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