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음악실

서천군 나씨정려기 을유(1825년)

작성자
missa
작성일
2026-02-25 03:31
조회
18
重山齋集卷之四 / 記

舒川郡羅氏㫌閭記 乙酉 (1825년)

詩首二南。多出於里巷之歌謠。漢廣汝墳。皆所以著明先王修齊之化也。我國家敦倫出治五百年。忠孝貞烈。殆乎比屋可封。若舒川郡羅氏之一門四世二烈七孝者。尤豈不卓然哉。羅氏羅州人。故贈嘉善斗慶妻金海金氏。以睦族恤隣。有南州生佛之謠。斗慶嘗遠于役。三年未歸。金氏一日 忽昏窒而甦。泣謂諸子曰。汝大人其休。俄於恍惚之際。謂我以逝矣。仍哀慟感疾。積十四日不起。未幾訃自北關至。其屬纊之日。果感夢之夕也。其子曰故老職資憲鳳燦。其妻慶州金氏。亦有懿行。鳳燦以天年終。金氏泣曰。吾與夫子。生旣同月同日。死雖不能同年同日。葬則當同日同穴。遂不食七日而下從焉。嗚呼烈哉。鳳燦之孫曰鎭億。鎭億之姪子道淳。道淳之從弟曰克淳。曰赫淳。曰學淳。及其未冠笄者凡五娚妹。俱以孝聞。皆於其親癠。以指血進。斷之者三。裂之者三十三。一門之指。可掬也。噫。烈女之婦。又爲烈女。孝子之子。又爲孝子。詩云孝思不匱。永錫爾類。其羅氏之謂乎。歲癸未冬。繡衣以事聞。上嘉之。命㫌二烈女金氏姑婦之閭。於是過者必式。而幷稱其子孫之孝。曰羅門烈孝。宜其蒙天褒也。秉彜好德。果不可誣也。夫三綱五常。大倫大法性也。何殊乎上下貴賤也。雖然行之在學士大夫則順而常。在鄕里匹庶則難而奇。倘非所謂氣質之用爲小。而學問之功爲大也耶。今夫羅氏者庶人也。何嘗有士大夫學問見識。而根乎天性。世篤其行。其賢於人遠矣。至於表厥宅里。樹之風聲。則此實邦家之嘉典。非直爲羅氏一家之光也。漢廣汝墳之出自里巷而被諸筦絃者。其義一也。豈不違哉。棹楔旣成。道淳踵門垂涕泣而言曰。願得公之文。有以侈聖恩而揚先烈也。四度請益勤。是爲之記。用彰我聖朝二南之化。無幽不洽云。

서천군 나씨정려기 을유(1825년)

시경에서 ‘주남. 소남’으로 으뜸 삼는 것은, 여염과 항간의 노래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시경의 ‘한광·여분’ 시는 모두 선왕의 수신제가 교화를 드러내 밝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윤리를 두터이 한 정치를 베푼 지 오백 년이어서, ‘충신·효자·열녀’가 거의 집을 나란히 할 만큼 봉해졌다.
그중에 서천 나씨 가문은 4세대 동안 2열녀와 7효자가 났으니, 어찌 우뚝함이 되지 않으랴. 나씨는 나주 사람으로 고 증가선대부 두경의 처 김해김씨는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이웃을 구휼하여 남방 고을에서 산부처님(생불)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일찍이 두경은 멀리 요역에 가서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김씨는 어느 날 갑자기 까무러쳤다가 깨어나, 울면서 여러 아들에게 ‘너희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구나. 내가 갑자기 혼몽해진 즈음에 나에게 떠나간다.’고 했다. 이에 슬프게 통곡하며 거의 14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부고가 북관에서 이르기도 전이다. 그 남편이 죽는 날이 꿈에 나타난 날의 저녁이다.
그 아들은 고 노직 자헌대부 봉찬인데, 그 처 경주김씨 또한 기릴 만한 행위가 있었다. 봉찬은 천수를 다하고 죽었는데도 김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와 낭군은 이미 같은 날에 태어났다. 죽음은 비록 같은 날이 아니지만, 장례는 같은 날 한 구덩이에 묻히리라.”라고 하고서, 드디어 7일을 먹지 아니하고 하세했다. 오호라! 열렬하도다.
봉찬의 손자는 진억이다. 진억의 조카는 도순이다. 도순의 종제는 극순, 혁순, 학순이며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무려 5남매인데, 효성스럽기로 소문이 났다. 모두 그 어버이의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올렸는데, 손가락을 자른 사람이 셋이오, 손가락을 찢은 사람이 서른셋이다. 한 가문의 자른 손가락이 한웅큼이나 될 정도였다. 아! 열녀 어머니에게 또 열녀 딸이 있고, 효자의 아들이 또 효자가 되었다. 시경에서 “효성이 끊이지 아니하니, 오래도록 너에게 善을 주리라.[孝思不匱, 永錫爾類.]”라고 한 것은 나씨 가문을 일컬음인저!
계미년(순조 23년, 1823) 겨울에 수의어사로서 이 일을 아뢰었더니, 왕께서 기뻐하시며, 김씨 고부 두 사람을 열녀로 정려하셨다. 이에 지나가는 자는 반드시 고개를 숙이며, 그 자손들의 효성까지 칭송했다. 나씨 가문의 열과 효는 그 순박함에서 칭찬받은 것이며, 떳떳한 도리와 덕으로서 행한 것이니, 감히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릇 삼강오륜은 큰 윤리로서 크게 본받아야 할 본성이니, 어찌 상하귀천의 다름이 있겠는가. 그러나 행함에 있어서, 학사대부는 순순히 항상 그러할 수 있고, 향리의 필부들은 어렵고도 기이한 일이어니, 혹 타고난 기질의 작용이 작은 것이 아니라면, 배우고 익힌 학문의 공효가 큼이 아니겠는가?
지금 저 나씨들은 서민일 뿐일진대, 언제 학사대부의 학문 견식을 가져서 한 일이겠는가. 착한 천성을 근본으로 하고 세상에 그 행동을 두터이 하여, 그 어짐이 남보다 뛰어난 것이로다. 그 집안과 마을에 표창이 이르고 아름다운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은 이 진실로 나라의 아름다운 법이니, 다만 나씨 한 가문의 영광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저 시경의 ‘한광, 여분’ 시가 여염 향리에서 나와 노래로 불리는 것도, 그 뜻은 한 가지일 뿐이니 어찌 다름이 있어서이겠는가.
정려가 높이 세워지자, 도순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글을 지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임금의 은혜를 알리고 ‘烈’을 앞세우기 위함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방에서 더욱 청하고 권하여 이에 기록하노니,

아! 우리 열성조께서 행하신, 시경 주남·소남의 교화를 밝혀 숨겨짐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


# 중산재(重山齋) 이지수(李趾秀 1779-1842년)가 1825년에 짓다

자료제공 : 국편사료조사위원 박 수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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