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의 확정: 카르타고 공의회
마침내 교회는 아우구스티노의 작품으로부터 모아진 다양한 형식들을 규정으로 선언하였다. 다음의 진술들은 펠라지오를 대항하여 노력한 아우구스티노의 작업들을 요약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에 의거하여 하지 못하는 좋은 것을 많이 행하신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하도록 힘을 선사하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것도 하지 못한다”(Multa Deus facit in homine bona quae non facit homo, nulla vero facit homo bona, quae non Seus praestat ut faciat homo)(PL 44, 586: DS 390).
또 우리는 요한 복음에 대한 해설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거짓말과 죄 이외에 자신의 고유한 것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어떤 진실이나 어떤 정의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삶의 사막에서 갈망하는 까닭에 그를 위한 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샘에서 약간의 물로 생기를 얻으며 우리는 우리의 여정을 걸어감에 힘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Nemo habet de suo nisi mendacium atque peccatum; si quid habet homo veritatis et justitiae, ab illo fonte est, quem debemus sitire in hac eremo, ut ex eo quasi guttis quibusdam irrorati, non deficiamus in via”.(PL 35, 1414: DS 392).
그러나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는 이미 세례로 주어진 은총의 치유적 역할에 관한 아우구스틴의 이론을 공인한바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의롭게하신 하느님의 은총은 이미 범한 죄들을 용서하기 위한 힘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하게될 죄를 막도록 도움을 준다”(Item plcauit, ut quicumque dixerit gratiam Dei qua justificatur hom per J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ad solam remissionem peccatorum valerer, quae jam commissa sunt, non etiam ad adiutorium ut non committantur, a. s.)
그 은총이 우리에게 단지 명확한 지식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계명의 이해만을 주시기 때문에, 그러나 이 은초을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것을 하도록 하는 능력과 사랑이 주어진다는 것이 거부되기 때문에 그와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죄를 피하도록만 도와주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죄된다.(Item, quisquis dixerit eamdem gratiam Dei per J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propter hoc tantum nos adjuvare ad non peccandum quia per ipsam nobis reverlatur et aperitur intelligentia mandatorum, ut sciamus quid appetere et vitare debeamus non autem per illam nobis praestari, ut quod faciendum cognosverimus, etiam facere diligamus atque valemus, a. s.)(DS 226).
그와같이 의화 은총이 은총이란 우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가 하도록 명령된 것을 완수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면 은총 없이 하느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단죄될 것이다.(Item palcuit, ut quicumque dixerit ideo nobis gratiam justificationis dari ut, quod facere per liberum jubemur arbitrium, facilius possimus implere per gratiam, tamquam et si gratia non daretur, non quidem facile, se tamen possimus etiam sine illa implere divian mandata, a, si.”(PL 38, 856: DS 227).
아우구스티노는 의로운 사람들이 치명적인 죄 모두를 피하려는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은총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공의회 역시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도 요한을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1 요한 1, 8). 누구든지 ‘우리가 죄를 지고 있다’는 요한의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는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단죄될 것이다.
“우리는 성인들이 주의 기도를 기도할 때, 그들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라기보다 겸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죄될 것이다. 기도하면서도 사람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인간의 생각에 관대하려는 사람, 그 까닭에 그는 그의 입술로서는 그가 용서받길 원하는 죄를 지니길를 원하지만 그의 마음 안에 그가 어떤 것도 용서받고자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그리스도교적 기도를 전체적 영적 태도에 적용한다. 그러나 일반 법은 특별하게 예외를 지닐 수 잇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처럼 강할 수 있다. 어떤 특권을 지닌 영혼 안에서. 그것은 모든 죄를 절대적으로 제거하는 기적을 만든다. 그의 원죄에 대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무죄한 잉태에 대한 생각을 예외로하고도,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게서 거룩함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보았다. 동정녀 마리아의 경우에, 그는 어떤 죄에 대해서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공의회는 이 이론에 권위적이지 않다. 그러나 신학은 결과적으로 그 개념을 적용하였다. 어느날 교도권의 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실로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시간을 펠라지오와 그의 추종자들과 싸우는데 허비하지 않았다.

8.5.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의 확정: 카르타고 공의회
마침내 교회는 아우구스티노의 작품으로부터 모아진 다양한 형식들을 규정으로 선언하였다. 다음의 진술들은 펠라지오를 대항하여 노력한 아우구스티노의 작업들을 요약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에 의거하여 하지 못하는 좋은 것을 많이 행하신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하도록 힘을 선사하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것도 하지 못한다”(Multa Deus facit in homine bona quae non facit homo, nulla vero facit homo bona, quae non Seus praestat ut faciat homo)(PL 44, 586: DS 390).
또 우리는 요한 복음에 대한 해설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거짓말과 죄 이외에 자신의 고유한 것을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어떤 진실이나 어떤 정의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삶의 사막에서 갈망하는 까닭에 그를 위한 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샘에서 약간의 물로 생기를 얻으며 우리는 우리의 여정을 걸어감에 힘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Nemo habet de suo nisi mendacium atque peccatum; si quid habet homo veritatis et justitiae, ab illo fonte est, quem debemus sitire in hac eremo, ut ex eo quasi guttis quibusdam irrorati, non deficiamus in via”.(PL 35, 1414: DS 392).
그러나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는 이미 세례로 주어진 은총의 치유적 역할에 관한 아우구스틴의 이론을 공인한바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의롭게하신 하느님의 은총은 이미 범한 죄들을 용서하기 위한 힘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하게될 죄를 막도록 도움을 준다”(Item plcauit, ut quicumque dixerit gratiam Dei qua justificatur hom per J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ad solam remissionem peccatorum valerer, quae jam commissa sunt, non etiam ad adiutorium ut non committantur, a. s.)
그 은총이 우리에게 단지 명확한 지식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계명의 이해만을 주시기 때문에, 그러나 이 은초을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것을 하도록 하는 능력과 사랑이 주어진다는 것이 거부되기 때문에 그와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죄를 피하도록만 도와주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죄된다.(Item, quisquis dixerit eamdem gratiam Dei per J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propter hoc tantum nos adjuvare ad non peccandum quia per ipsam nobis reverlatur et aperitur intelligentia mandatorum, ut sciamus quid appetere et vitare debeamus non autem per illam nobis praestari, ut quod faciendum cognosverimus, etiam facere diligamus atque valemus, a. s.)(DS 226).
그와같이 의화 은총이 은총이란 우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가 하도록 명령된 것을 완수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면 은총 없이 하느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단죄될 것이다.(Item palcuit, ut quicumque dixerit ideo nobis gratiam justificationis dari ut, quod facere per liberum jubemur arbitrium, facilius possimus implere per gratiam, tamquam et si gratia non daretur, non quidem facile, se tamen possimus etiam sine illa implere divian mandata, a, si.”(PL 38, 856: DS 227).
아우구스티노는 의로운 사람들이 치명적인 죄 모두를 피하려는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은총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공의회 역시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도 요한을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1 요한 1, 8). 누구든지 ‘우리가 죄를 지고 있다’는 요한의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는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단죄될 것이다.
“우리는 성인들이 주의 기도를 기도할 때, 그들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라기보다 겸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죄될 것이다. 기도하면서도 사람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인간의 생각에 관대하려는 사람, 그 까닭에 그는 그의 입술로서는 그가 용서받길 원하는 죄를 지니길를 원하지만 그의 마음 안에 그가 어떤 것도 용서받고자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그리스도교적 기도를 전체적 영적 태도에 적용한다. 그러나 일반 법은 특별하게 예외를 지닐 수 잇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처럼 강할 수 있다. 어떤 특권을 지닌 영혼 안에서. 그것은 모든 죄를 절대적으로 제거하는 기적을 만든다. 그의 원죄에 대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무죄한 잉태에 대한 생각을 예외로하고도,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게서 거룩함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보았다. 동정녀 마리아의 경우에, 그는 어떤 죄에 대해서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공의회는 이 이론에 권위적이지 않다. 그러나 신학은 결과적으로 그 개념을 적용하였다. 어느날 교도권의 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실로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시간을 펠라지오와 그의 추종자들과 싸우는데 허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