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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보관물: 신학자료실
신수와 혜능의 입장
1) 北宗禪(신수)의 입장 宗密은 북종선의 특성을 요약하여 “번뇌의 티끌을 털어내고, 청정한 마음을 직관하며, 명상의 방편에 의거해서 대승경전의 진리에 통달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번뇌의 티끌’이란 본래적인 청정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서 마음의 청정성을 오히려 번뇌의 티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神秀는 그러한 거울의 본래의 청정성을, 번뇌를 털어낸다고 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실천에 의해서 실증하고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단계적 수행을 통한 「절대적 눈뜸」으로 가는 漸修의 입장인 것이다. 대체로 자기에게 눈뜬다는 것은 마음의 주체가 모든 분별의 의식을 떠나있는(心體離念)것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차별의 의식을 떠난 마음의 상태는 마치 허공의 넓음과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모두 평등하다. 그것이 여래에 의해서 깨우쳐진 平等法身이며, 이 법신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들의 본래적 눈뜸(本覺)이 주장되는 것이다.40> 또한 신수는 “수행자가 마음을 안정시켜 도를 구하려고 할 때는 마땅히 시절과 방편을 관찰해야 한다”하여 시절과 방편을 강조하는데, 이 때 방편이란 곧 좌선 방편을 의미한다. 또한 방편을 배우는 목적을 성불에 두고 성불은 각자의 정심(심의의 자성청정심)의 체로 이룰 수 있으며 이 정심의 체는 명경과 같으며 무시이래로 만상을 비추고 있지만 일찌기 염착(染着, 더러워짐)하지 않았고 이 정심의 체를 알기위하여 방편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심의 체를 간(看)하는 좌선의 실천으로 앞, 뒤, 상, 하의 시방(十方)을 행주좌와(行住坐臥)와 함께 간하도록 하는 看心法을 주장함으로 여러가지 좌선법이 연구되어 학인들을 지도하던 초기 선종에서와는 달리 좌선 방편을 근본으로 하는 실천종교로 정착되게 한다.41> 2) 南宗禪(혜능)의 입장 이에 반해 남종선은 無念을 설하고 있는데, 無念은 본래 털어낼 티끌조차 없는 無․空을 의미한다. 이는 북종선에 대한 신뢰의 비판에서도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 바, 慧能의 無心이란 선악의 분별, 마음의 집착을 벗어난 無住로서 표현된다. 북종신수가 「觀心論」에서 “자기의 마음의 청정과 오염이라는 두가지 작용을 內觀하라”하며 참마음을 지키는 것을 가르친 것에 반하여 남종선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모두 마음의 얽매임이라 하여 물리치고 있다. 혜능은 “일체의 걸림이 없고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이고, 본성을 보고 산란되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하여 좌선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 이 때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은 無念이고, 본성을 본다는 것은 바로 돈오견성을 의미하는 바, 자성청정심의 자각과 無念, 無住, 無相의 盤若의 실천을 일체라 하여 중국 선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완성시키고 있다.42> 慧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에 눈뜨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본체 즉, 의식적인 마음의 근저에 慧가 있는 것이다.43> 慧는 밖으로부터 觀하기도 하는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텅빈 마음의 본질 그 자체이며 이로써 머무름이 없는 마음과 그것을 아는 마음은 완전히 하나임을 알게된다. 이는 또한 본체와 세계가 無와 有의 이분법적 구분을 뛰어넘어 空으로 합일되는 本來無一物의 세계이다. 이렇게 하여 직관적인 定(마음의 평안함)과 慧는 일체를 이루고 있다.
혜능과 신수
4. 慧能과 神秀 5조 弘忍에 이어 6조에 이르러 중국 선종을 확립시킨 南北兩宗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南頓北漸, 南能北秀’라고 하듯이, 남종의 혜능과 북종의 신수는 ‘깨침과 닦음’에 있어서 頓과 漸이라는 대별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돈점(頓漸)의 문제는 진리를 직시케 해 주는 것은 아니되, 구도자의 구체적인 실천수행과 연관되는 실존적인 문제34>이며, 역사적으로는 종파를 가름짓고 한 종단의 정통과 이단을 판가름하는 기준35>이었다. 또한 頓漸의 입장이 본격화 되었던 6세기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깨우치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는 깨침과 수행에 있어서 頓과 漸이라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면서 논쟁화되고 있다. 이러한 頓漸 논의들은 단순히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수행의 문제가 아니라 안심과 보살행이라 표현될 수 있는 바,36> 頓漸論의 본격적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혜능과 신수의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그 철학적 바탕과 의미를 찾아보면서 그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혜능과 신수의 사상은 일단 그들의 偈頌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5조 弘忍이 의발의 계승자를 뽑는 데, 신수는 다음과 같이 偈頌을 지었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朝朝勤拂拭, 莫使惹塵埃 밤낮으로 갈고 닦아 세속에 물들지 말게 할지니라.37> 여기에서 신수는 선정의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자신의 게송을 통하여 인도 불교 고유의 <戒 – 定 – 慧>의 삼단계 수행방식을 온전히 농축시켜 표현하였다.38> 이에 대해 혜능은 戒와 定을 뛰어넘은 도약으로 慧를 말하고 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보리(菩提)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대가 아 니다.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 아무 것도 없는 데 어디서 티끌이 생겨날까?39> 이렇게 신수는 거울의 본래의 청정성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확인하려 한 반면, 혜능은 본래의 청정성을 ‘단박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며 그것은 선악과 變, 不變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행의 실천
3)四行의 實踐 앞에서 본바 行入은 理入에 대한 구체적인 4가지 실천덕목으로 報怨行 隨緣行 無所求行 稱法行으로 곧 모든 佛敎의 실천들의 근본이라 강조한다. ① 報怨行 (빚을 갚는 行) 怨은 喜怒哀樂과 더불어 五情의 하나로 傳統佛敎에서의 五根(眼耳鼻舌身)의 情이다. 報怨行은 수행자가 지금 현실의 생활상에 일어나는 모든 원과 그에 따른 고뇌를 극복하는 마음의 준비를 설한 것으로 곧 이 모든것은 과거의 業을 갚는 것이니 이를 통해 그 근본(道)에 나아가는 것이다. “괴로움을 당해도 근심하지 않음은 그 괴로움의 원인과 근원에 통했음이다”라는 말은 그러한 고통의 해탈은 般若의 體得으로 극복케하는 것으로 禪宗의 독특한 業思想이다. ② 隨緣行 (因緣에 따르는 行) 모든 삶이 인연에 따라 고락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모두 空하게 되는 바, 모든 것을 인연에 맡기고 진리에 계합할 것을 설하는 것으로 報怨行과 마찬가지로 空, 無我의 이치를 통달하여 본래 空한 諸法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29> ③ 無所求行 (구하는 바가 없는 行) 구함이 있는 곳에 집착이 있고 또한 괴롬이 있는 것이며 반대로 구함이 없는 곳에 즐거움이 있는 것으로 밖에서 구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一切皆空의 진리를 깨달아 마음을 초월하는 실천행으로 곧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다.30> ④ 稱法行 (理致에 계합하는 行) 佛法은 그 본질에 있어 더 없이 순수하고 모든 형상안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의미하며 밝고 순결하며 물듦도 집착도, 너도 나도, 너와 나의 구별도 없으며 이미 집착에서 벗어났기에 중생도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이치를 바로 보고 불법과 조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31> 稱法行이란 性情의 이치에 계합된 삶을 만드는 것이며 이는 곧 自性淸淨心을 의미한다. 더러움을 없에 깨끗해 진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것이 마음이며 情은 空인 것이다. 本來淸淨은 本來皆空을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달마가 설한 성정의 이치는 곧 空의 세계이며 이에 근거하여 6바라밀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32> 이상과 같이 달마의 二入四行論은 大乘佛敎의 理法으로 단순한 명상의 실천인 習禪이나 무념무상을 얻으려는 禪定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통해 大乘佛敎의 진수인 般若의 지혜를 체득하여 그것을 인간의 평범한 일상 생활의 실천덕목으로 한것은 종래의 佛敎와 다른 입장으로 달마이래의 大乘禪의 곧 중국 禪宗의 특징이라 하겠다. 다시말해 理入은 근본진리를 밝힌 것으며 行入은 그러한 理入에 계합된 구체적 실천덕목이고 四行은 우리의 일상 생활의 평상적 도행으로 二入四行論은 단순히 般若의 理論을 설한 것이 아니라 般若思想의 지상 行法을 說한 것이라 하겠다.33>
달마의 선사상 – 벽관
2) 壁觀 이러한 眞性에의 심신(深信)을 기반으로 한 理入에의 실천으로 壁觀이라는 구체적인 實踐法 : 독창적인 大乘禪法을 주장함으로 인도 전래의 小乘法 곧 四念處 와의 작별을 고하게 됨으로 大乘禪의 입장을 걷게 된다. 이 사념처는 고대 원시 佛敎이래로 禪觀法의 하나로 여기서 념처란 즉 정신통일이며 요가나 명상과도 맥을 같이한다.21> 그런데 壁觀은 부정이나 백골을 관하는 것에서 점차로 般若空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般若空觀에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22> 壁觀은 흔히 벽을 관하는 것이나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了了當知(壁觀에 있어 마음에 번뇌와 모든 인연이 끊어진 곳에 분명히 참된 깨달음이 있다)라는 의미로 곧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사념과 감각작용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23> 달마와 혜가의 安心問答24> 역시 壁觀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담림의 서문에 역시 “理入이란 안심이며 안심이란 곧 壁觀이다”라고 한것이다.25> 壁觀은 곧 般若空觀이며 安心이란 마음을 벽과 같이 안정시켜 客塵僞妄이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覺觀이란 곧 마음을 밝히는 깨어있음을 의미한다.26> 여기서 벽이란 외부로부터 모든 풍진을 방지하는 보호막이며 따라서 壁觀은 自心을 보는 것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心佛起의 본래의 상태이며 眞과 妄, 聖과 俗등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탈락되어 純一 無雜한 본래의 마음인 안심에 거주하는 것으로 달마가 전한 올바른 坐禪法인 것이다. 또한 도신에 의한 바 달마의 禪法은 虛宗이며 大乘壁觀의 空業(禪法)은 최고라 하였음에서 볼 수있듯이 虛宗은 般若의 근본의를 의미하며 현묘한 근원으로 無心으로도 해석된다. 虛宗의 虛宗된 실천法이 바로 壁觀이며 사실 달마이후 大乘禪의 특징은 이러한 虛宗 般若27>와 그 실천으로서의 壁觀의 결합을 일상생활에 전개한 것이라 할 때 보리달마의 初祖로서의 위치를 알 수 있다.28>
달마의 선사상 – 이입사행
3.達磨의 禪思想 佛敎는 마침내 인도를 벗어나 이 민족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 정점을 이룬 시기는 대략 기원 7세기경이다. 佛敎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를 받아들인 중국인들은 먼저 전래된 경전을 번역하는 동시에 불교와 기존의 中國思想과의 비교, 연구, 비판을 통해서 자신들의 고유한 佛敎思想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으로 禪宗이 성립을 들 수 있다.17> 그 특징은 梵我合一의 세계관 (내 마음이 곧 부처, 내 마음이 곧 산하대지)과,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기 위한 일련의 수련방법 (頓悟漸修로써 인간 고유의 불성을 찾아내고 佛法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과 또한 以心傳心의 直觀方法이라 하겠다. 곧 本心은 사람마다 모두 지녔고 동시에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으며 오로지 이러한 본심을 인식하고 참된 성품을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18> 이에 중국 선종의 초대 祖師라 할 수 있으며 이 커다란 꽃의 씨를 중국에 뿌린 보리달마(?-528?)의 禪思想을 살펴보겠다. 1) 二入四行 무릇 깨달음에 이르는 方法은 많지만 달마에 있어 이는 본래로 돌아가는 원리인 理入과 이를 위한 실천으로서 行入이라 하겠다. 二入은 곧 本來性인 理法과 그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行入인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실천행을 넷으로 나누기에 ‘二入四行’으로 불리운다. 理入은 본래적인 깨달음으로 그러한 본래적 진리와 하나되는 것으로 우주의 실상으로서의 眞如(自然)와 하나되는 것이다.19> 이러한 깨달음으로서의 理入은 철저하게 행위와 혼동됨이 없이 그것 자체의 뚜렷한 영역을 가지면서 더불어 깨달음의 원리로서 항상 行入으로 확대되어, 하나 하나의 行入에 理入의 실상을 부여해 간다. 곧 理入이란 경전(불교의 근본적 가르침, 어느 경전 하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만을 근거하여 佛敎의 大義를 깨닫고 일체 중생은 모두 똑같은 佛性 곧 眞性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며 또한 심신(深信: 스스로 확신하는 것이며 확신은 동시에 철저한 자각을 의미하며 진리에의 자각은 이러한 자기확신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믿음과 깨달음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음)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위를 버리고 분별을 잊고 스스로 眞 곧 本來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것이다.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