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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 2

             5. 군주사회와 제국주의사회  역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봉건사회 다음에 오는 것은 군주사회인 것이다. 그러면 이 때의 서구에 있어서의 정치면에서 본 군주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졌었는가 ?  서구에 이동된 게르만 민족이 세웠던 국가들은 모두 그 존립기간이 짧았으마, 프랑크왕국만은 오래도록 존속되었다. 프랑크는 서게르만의 한 부족이었는데, 그가 메로빙왕조를 세운 후, 기독교와 결합하고 로마문명을 흡수하여, 서구에다 게르만적인 로마풍의 세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왕조가 몰락한 후 촬스․마르텔은 서쪽에서 침입한 아라비아인을 물리쳐 세력을 폈고, 그의 아들 피핀은 카롤링왕조를 세웠다. 피핀의 아들 카알대제는 일찍부터 성어거스틴의 ‘신국론’을 숭상하였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그는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국가이념으로 하는 군주국가를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알대제는 주우유럽을 통일하고, 민족대이동으로 혼란된 서구를 안정시켜서 강력한 프랑크왕국을 확립하였었다.  다음으로 종교면에 있어서 기독교봉건사회에 뒤따라 온 기독교군주사회는 <메시아를 위한 영적기대> 위에서 교황을 중심하고 세워졌던 국토없는 영적왕국사회 였다. 그리고 교황 레오3세가 기원 800년에 카알대제를 축복하고, 그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하여 천적인 기업을 상속함으로써, 교황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영적인 왕국과 정치적으로 형성된 프랑크왕국이 하나되어 기독왕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기독왕국시대는 구약시대의 통일왕국시대와 동시성의 시대였다. 이처럼 봉건시대에 뒤따라 왕국시대가 왔던 것은 봉건사회를 통합함으로써 더욱 큰 하늘편의 주권과 백성과 판도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천사장의 입장에서 실체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해 온 교황은 국왕을 축복한 뒤에 가인의 입장에서 그에게 순종하고, 또 국왕은 교황의 이념에 따라 메시아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하여 기독왕국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웠더면, 그 시대가 바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말세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그 때까지 서로 타협을 보지 못하고 상충되어왔던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과제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나왔더면, 그 때 바로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이념을 중심하고 완전히 일치된 방향으로 발전함으로써, 이 터전 위에서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왕국시대가 옴으로써 봉건시대는 그 때에 완전히 끝나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이나 국왕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됨에 따라서, 카알대제의 본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완강한 봉건제도의 기틀은 무너지지 ㅇ낳고 그 뒤 오래도록 존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여전히 서로 분립됨으로써, 교황을 중심한 영적인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적인 왕국도 여전히 분립되어 상충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되어 카알대제는 원숙한 봉건제도의 터전 위에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실상 일개 대영주의 입장에 불과하였다. 기독왕국이 이렇듯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봉건제도는 점점 더 강화되어 정치면에서의 봉건계급사회는 전제군주사회가 일어날 때가지 번성하였다.  17세기 중엽부터 봉건계급이 몰락됨에 따라, 지방으로 분할되었던 영주들의 권력은 국왕을 중심하고 중앙으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권신수설을 정치이념으로 하고 군림한 국왕은 절대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국왕이 봉건계급사회의 영주의 입장을 벗어나, 정치면에서의 군주사회를 사실상 이룩하였던 것은 17세기 중엽으로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사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군주사회의 귀추는 어떠하였던가 ?  이 시대의 교황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고 세속화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심령적인 면에서 쇠퇴의 길을 밟아 가게 되었었다. 더구나 십자군 전쟁에 패함으로 말미암아 교황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한편 또 교황이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갇힘으로써, 그들은 허명무실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교황을 중심한 영적인 왕국이었던 기독교군주사회는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경제면에서의 발전과정을 보면, 봉건적 경제제도는 봉건적인 정치제도가 몰락되고 중앙집권화한 전제군주사회에 있어서도, 의연히 존속되어 프랑스혁명 때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경제의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본주의화해 가던 다른 경제면에 있어서도, 봉건제도의 영역을 넘을 수 없었다. 즉 자영농민들도 봉건영주의 지배에 맞서기 위하여 국왕의권력에 의뢰하였으나, 그들도 봉건제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또 메뉴팩처의 경영자들도 봉건적인 분열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중앙집권의 국왕과 결탁하였으나, 결국 그들도 역시 봉건화한 상업자본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봉건사회에 뒤이어 오는 것이 군주사회라면, 경제면에 있어서 봉건사회에 뒤이어 오는 것은 무엇일것인가 ?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사회와 그 뒤에 따라오는 제국주의사회인 것이다. 국정에 대한 독재가 군주주의 특색인 것 같이, 금융자본에 대한 독점이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국정에 대한 독재가 군주주의의 특색인 것 같이, 금융자본에 대한 독점이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7세기 중엽 전제군주사회가 시작될 무렵부터 싹이 터, 영국의 산업혁명기로부터는 점차 원숙기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사회가 오게 된 것은, 봉건적인 경제제도에 의하여 확보된 작은 단위의 경제기대를 더 큰 기대로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경제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본보기노정은 서구를 중심하고 이룩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논하는 제국주의도 서구를 중심하고 전개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구에서 팽창된 제국주의사상은, 서구의 각 기독교국가로 하여금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지구의 전역에 걸쳐 식민지를 획득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어 세계는 급진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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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 1

   Ⅱ. 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       1. 복귀섭리와 서양사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4세기 말에 이르러 드디어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굴복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에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모시어 하나가 되었더면, <로마>제국을 중심하고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고대 통일세계는 응당 살아 계신 예수님에게 감화되어, 그를 왕으로 모시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왕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멸망하였고, <메시아>왕국을 위한 터전이 되었어야 했던 <로마>제국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서기 476년에는 서<로마>가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패망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원한의 땅 <유대>에서 서<로마>의 판도였던 서구로 옮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 이후에 있어서의 기독교에 의한 영적 복귀섭리는 서구를 발판으로하고 나왔기 때문에, 이 시대의 복귀섭리역사는 서구에서만 본보기노정을 따라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유물사관에서 논하고 있는 역사발전과정도 서구의 역사에서만 적응되고 있는바,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서구를 중심한 기독교사는 복귀섭리연장시대를 만든 중시적인 역사자료가 된 것이다.        2. 종교사와 경제사와 정치사의 상호관계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유형 무형의 두 세계를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육신과 영인체의 두 부분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셨다 함은 이미 창조원리에서 논술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더면 그의 영인체와 육신이 함께 성장하여 완성됨으로써, 영 육 양면의 지성이 동시에 지상의 육신생활 가운데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영 육 양면의 무지에 빠지게 되었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영적인 무지는 종교에 의하여, 그 육적인 무지는 과학에 의하여 일깨워져 나왔던 것이니, 이에 관해서는 이미 전편 제3장 제5절 Ⅰ에서 논하였다.  그런데 영적인 무지는, 종교로써 타락인간 가운데 잠재해 있는 그 본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그들이 보이지 않는 원인적인 세계를 찾아 나아감에 따라 점차 일깨워져 왔다. 그러나 종교는 누구나가 다 긴절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의 깨우침은 어느 특수한 인간에 있어서는 비약적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단히 느린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고대인이나 큰 차이가 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육적인 무지는,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결과의 세계 즉 자연계(육계)에 대한 대한 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으로써 일깨워져 왔다. 그리고 과학은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육적인 무지에 대한 계발은 급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렇듯 찾아가는 대상이, 종교의 경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원인의 세계여서 초현실적인 것인데 반하여, 과학에서는 보이는 결과의 세계 즉 물지세계를 다루므로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이론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상충되어 왔다. 그뿐 아니라 피조세계의 주권을 갖고 있는 사탄이 현실생활을 통하여 인간에게 침범하는 관계로, 지금까지 종교의 길은 현실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현실을 추구하는 과학과 서로 조화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음 장 제1절에서 상세히 논급하겠거니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의 외적인 육신을 먼저 창조하시고 다음으로 내적인 영인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에(창세기 2장 7절), 재창조원칙에 의한 복귀섭리도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복귀해 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러한 섭리적 원칙으로 보더라도 과학과 종교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발전과정을 밟아 나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부조화는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경제도 역시 과학과 같이 현실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더우기 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에 의한 종교사와 그 외적인 섭리에 의한 경제사는, 그 발전에 있어서 서로 방향과 진도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본보기노정을 밟아온 서구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을 섭리적인 면에서 이해하기 이하여는, 기독교사와 경제사를 따로 갈라지고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이 그러하듯이, 종교와 타락인간의 내 외 양면의 생활을 각각 분담하여 복귀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전혀 관계없이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 따라서 종교와 경제는, 그 발전과정에 잇어서 서로 상충적인 면을 지니면서도, 우리의 사회생활과 결부되어 각각 기독교사와 경제사를 이루어 온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의 사회생활과 어떻게 결부될 수 있었던가 ? 그것은 바로 정치에 의해서였다. 기독교화했던 서구에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서구에 있어서의 정치는 급진적인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과, 복귀섭리의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맸던 기독교의 움직임을 사회생활 가운데서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는 종교와 경제를 조화시키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를 위한 역사의 발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는, 정치사도 역시 별도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실례로서, 17세기 말엽에 있어서의 서구의 역사를 놓고 그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종교사의 면에서 살펴보면, 이 시대에는 이미 기독교민주주의사회가 이룩되어 있었다. 즉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교황이 독재하던 영적인 왕국이 무너짐으로써, 중세인들은 교황에 의해 지배받던 신앙생활에 해방되어, 누구나 성서를 중심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정치사의 면에서 보면 이 시대에는 전제군주사회가 나타나 있었고, 경제사의 면에서는 아직도 장원제도에 의한 봉건사회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같은 시대의 같은 사회가 종교면에서는 민주주의사회가 되고, 정치면에서는 군주주의사회가되며, 경제면에서는 봉건주의사회가 되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이 시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그 발전과정을 각각 별도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복귀섭리시대(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은 어찌하여 그러한 과정을 밟아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고대사횡 있어서는 과학의 발달이 거의 정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발전도 역시 그러하였다. 아직도 생활양식이 분화되기 전인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민족은 지도자들의 명령에 의하여 엄격한 율법에 따르는 주종관계의 사회제도 아래서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생활은 곧 그들의 사회생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립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씨족사회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복귀섭리연장시대(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종교와 정치와 경제 등의 각 부면으로 본 역사발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을 중심한 원시공동사회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호응하는 인간의 본심의 작용에 의하여 분열되어, 그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간이 분립됨으로써, 하늘편 씨족사회가 이룩되었다 함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민족은, 이미 사탄편 계역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회를 그대로 두시고는 복귀섭리를 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사회를 분열시켜 그 가운데서 독실한 기독교 신도들을 부르시어, 그들을 중심하고 기독교씨족사회를 세우셨던 것이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야곱의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이스라엘씨족사회를 이룩하여 섭리노정을 출발했던 것과 같이,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중심한 12제자와 70문도가 기독교 씨족사회를 이룩하여 섭리노정을 출발했던 것이다. 기독교씨족사회는 원시기독교사회였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도 정치나 경제 에 있어서의 어떠한 제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립된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기독교씨족 사회는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고대 통일세계 안에서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아가면서 번성하여 기독교부족사회를 형성하는데 이르렀었다. 그리고 4세기 후반으로부터 시작외었던 민족들의 대이동에 의하여 서로마제국은 드디어 476년에 쇠망하였고, 그 판도 안으로 이동해 온 게르만민족에게 기독교가 침투됨으로써 그들을 중심하고 광범한 기독교사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4. 봉건사회  역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씨족사회 다음에 오는 것은 봉건사회인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왕권이 약해지고 국가가 무질서한 상태에 빠졌을 때, 봉건사회는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서구의 기독교사회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화되어, 각각 서로 다른 발전을 해 나아가게 되었다. 봉건사회는 대․중․소의 영주와 기사들 사이에, 복종과 봉사를 전제로 하고 맺어진 주종관계에 의한 정치제도와, 장원제도에 의한 봉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제도로써 이루어졌었다. 국토는 많은 영주들에 의하여 분활되었고, 국왕은 사실상 영주 중의 하나였으므로 국왕의 권력도 지방분권적이었다. 영주들은 상부로부터 은대지로 토지를 분배받아 그들의 독립영지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재판권까지 행사하였었다. 따라서 이 영지는 거의 국가 권력을 떠난 개인 영토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어진 개인의 영토를 장원이라 한다.  자작농의 하인들이 주권자들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지를 영주 또는 사원에 바치고, 그 토지를 다시 은대지로 대여받아서 된 장원도 있었다. 이와 같이 되어 장원은 전국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최하급의 기사는 하나의 장원을 나누어 받아 영주에게 사병으로서 종사하였지만, 국왕이나 영주는 수백 수천의 장원을 소유했던 것이다.  종교면에서도 그것은 기독교를 중심하고 위에서 말한 봉건사회와 똑같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기독교봉건사회라고 한다. 즉 교구장, 대주교, 주교는 대․중․소의 영주에 해당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국왕이 영주 중의 하나였던 것과 같이 교구장 중의 하나였다. 거기에도 절대적인 주종관계에 의한 종교적인 정치제도가 있었고, 주교들은 신자들로부터 바쳐진 봉토를 가지게 되어, 그들은 봉건적 계급층들 중에서 유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주들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경제면에서 이 시대를 살펴 본다면, 이 시대는 고대 노예제도에서 장원제도로 옮겨진 시대였다. 따라서 평민들이 이 때부터 토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토지제도에 의한 신분은 대체로 지주, 자작농, 농노(반자유신분), 노예(부자유 신분) 등의 네 계급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게르만민족을 새로운 선민으로 교화하여 봉건사회를 세움으로써, 쇠망한 서로마의 터전에다,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3면으로 소단위의 하늘편 판도들을 강화하여, 장차 하늘편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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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

  제7절 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  창조원리에서 이미 논한 바와같이, 지상천국은 완성한 사람 하나의 모양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타락된 세계는 타락한 사람 하나의 모양을 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사람 하나의 생활을 살펴봄으로써 인류죄악사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을 ㄱ서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선을 지향하는 본심과 이 본심의 명령을 배반하고 악을 지향하는 사심이 있어서, 이 두 마음이 항상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본심의 명령을 따르는 선행과 사심의 명령을 따르는 악행이, 우리들의 한 몸 가운데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 자체 안에서 투쟁을 일으키고 있는 개체들이 횡적으로 얽혀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사회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역시 투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와같이 투쟁으로 얽히어진 사회생활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종적으로 변전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인류역시이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투쟁과 전쟁의 역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심과 사심의 끈덕진 싸움 가운데서, 악을 물리치고 선을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행동도 점차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해 나아가는 방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타락된 인간에게도 이와같이 선을 지향하는 본심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맞추어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에 의하여 엮어져 내려온 역사는, 선악이 뒤섞이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해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지향하는 종국적인 세계는 바로 선의 목적이 이루어진 천국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이나 전쟁은 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선과 악을 분립해 나온 하나의 과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싸움의 결과가 일시 악의 승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악의 결과로 인하여, 역사는 보다 더 큰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섭리노정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의하여 부단히 선과 악의 분립역사를 되풀이하면서, 선을 지향하고 발전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타락된 인간을 중심하고, 장차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것과 같은 형의 세계를 앞장서 이루어 나왔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류역사는 원리형의 비원리세계를 이루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지상천국을 복귀하시기 전에, <사탄>을 중심으로 한 그와 같은 형의 비원리세계가 먼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세계인 것이다. <사탄>은 이처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을 항상 앞질러 비원리적으로 이루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노정에서는 참 것이 나타나기 전에 거짓 것이 먼저 참 것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앞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성서의 말씀은 이러한 원리로써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Ⅰ.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의 역사 발전  타락된 인간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원시공동사회였다. 이 사회는 <사탄>을 중심하고 서로가 형편껏 도우며 살던 사회로서, 원래 하나님이 완성한 인간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공생공영공의주의사회를 <사탄>이 앞질러 비원리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만약 이 사회에 토쟁도 분열도 없었다면 이 사회는 그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그 개체에 있어 두 마음이 서로 싸우고, 또 이 마음의 싸움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개체와 개체가 서로 싸우게 되므로, 원시공동사회가 그대로 평화로이 유지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사회가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서로 달리하는 사회에로 발전함에 따라서, 그 사움이 더욱 크게 전개되어 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맞추려는 인간의 본심의 작용에 의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이루어졌던 원시공동사회에는 일찍부터 싸움에 의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탄>을 중심한 인류죄악사의 발전과정을 보면, 원시공동사회에서 분열된 인간을 중심하고 씨족사회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더 성장항여 봉건사회를 이루었으며, 그 판도와 주권을 더욱 확장하여 군주사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이 이 죄악세계에서 선한 개체를 부르시어, 그들을 중심하고 선의 씨족사회를 세우고, 나아가 선의 봉건사회를 이루어가지고 선의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메시아>를 맞기 위한 선의 판도와 주권을 수립하려 하셨기 때문에, <사탄>이 또한 이것을 먼저 알아가지고 그러한 형의 노정을 앞질러 걸어나온 것이었다.  실상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사회에서 선의 중심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자녀를 번식케 함으로써, <이스라엘> 씨족사회를 세우셨던 것이다. 그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급에 들어가서 씨족으로부터 부족으로 발전되었으며,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사시대를 이루었던 것인데, 이 사사를 중심한 사회가 바로 <이스라엘> 봉건사회였다. 그러면 이 사회를 어찌하여 봉건사회라고 하는가 ? 봉건사회의 특성은 봉사와 복종을 전제로 하는 주종관계에 의한 정치제도와 봉건영토를 중심한 봉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사시대는 바로 이러한 성격의 사회였던 것이다. 즉 <가나안>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민족의 각 지파에게는 땅이 분배되었고, 그 지파들은 대영주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사사를 중심하고 봉건사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이스라엘> 봉건사회라고 한다.  봉건사회의 백성들은 그 사회의 성격상 그 영주의 사상과 영도에 절대 순종굴복하였다. 따라서 그 영주가 하나님의뜻 가운데 서 있는 한, 그 백성들은 자연히 그를 따라서 하늘편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또 그들은 이와 같이 주종관계에 의한 봉쇄적인 정치와 경제의 사회제도 밑에 있었기 때문에, <사탄>의 외침을 당하지 않는 환경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었던것이었다. 따라서 씨족사회가 봉건사회로 발전하게 된 것은 <사탄>의 소유를 하늘편으로 빼앗아 넘김으로써, 하늘편 주권에 속하는 보다 큰 판도를 이루어 가지고 <사탄>의 침범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또 그것을 안 <사탄>은 여기에 대비하여 한 걸음 앞질러서 먼저 <사탄>은 여기에 대비하여 한 걸음 앞질러서 먼저 <사탄>편 봉건사회를 이룸으로써, <사탄>주권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 한편 봉건사회는, 보다 더 큰 주권과 판도의 군주사회를 이루기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 오게 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봉건사회로써, <사탄>편의 침범을 막을 수 있는 작은 단위의 하늘편 주권과 백성과 경제적인 판도를 만든 후에, 다시 이것들을 통합하여 보다 더 큰 주권과 백성과 경제적인 판도로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주사회가 오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울>왕으로 시작된 통일왕국시대였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었다(요한계시록 11장 15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군주사회를 이룩하신 것은,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섭리 밑에서 <이스라엘> 군주사회를 세우려 하셨기 때문에, <사탄>편에서는 또다시 이것을 앞질러 먼저 <사탄>을 중심한 군주사회를 이룩함으로써, 하늘의 섭리를 막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왕국시대가 오기 전에, 이미 <사탄>세계에서는, <에집트>왕국이 기원전 수십세기에 제1왕조를 세워 그 뒤 30왕조나 계승되었었고, 옛 <바빌로니아>왕국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때 벌써 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였던 것이며, <힛타이트>왕국은 기원전 14세기에 <시리아>를 중심으로 동방의 최강국이 되었었다. 그리하여 <사탄>편 세계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대응하는 인간본심의 작용에 의하여, 보다 선한 왕국과 보다 악한 왕국이 서로 싸우면서 왕국을 단위로 한 분립역사를 일으켜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솔로몬>왕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더면, 그는 <에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혹은 미노아)등 3대문명을 흡수한 문화적인 사회환경에서, 그의 뚜어난 정치능력을 발휘하여 동방제국을 통일하였을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메시아>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적인 판도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왕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 군주사회를 무너뜨리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왕국시대의 왕들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하나님의 주권을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 뜻을 배반하였던 북조는 이방인 <앗시리아> (에집트, 바빌로니아, 힛타이트 등의 왕국이 약해짐에 따라, 이 앗시리아 왕궁이 강대해져서 기원전 8세기에 에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의 중심부를 정복하여 최초의 세계제국을 건설하였었다)에 붙여 멸망하게 하셨고, 하늘 뜻을 받들던 남조 <유대>도 얼마 안 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게 되자, 신<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제국이 멸망한 뒤 갈대아인에 의하여 바빌론을 수도로 하여, 신 바빌로니아왕국 혹은 갈대아왕국이 창건되었었다)에 붙여서 멸망하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왕궁을 멸하신 후,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유대>민족을 여러 이방들에게 속하게 하심으로써, 이 민족의 왕위를 비워 두셨다. 특히 <유대>민족을 민주주의의 기틀이 될 <헬라>문명권내에 속방이 되게 하심으로써, 장차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 <유대>민족이 그를 환영하기만 하면, 백성의 뜻에 의하여서 언제든지 <메시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민주주의형의 사회를 이루어 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민의는 예수님을 왕위에 올려 세우지 못하도록 그를 십자가에 살해하고 말았으므로, 이것으로써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2000년의 복귀섭리의 목적은 영적으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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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강림준비시대

 제6장 메시아강림준비시대와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지나서야 예수님을 맞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탕감보귀하기 위하여는, 기독교 신도들도 교황이 <아비뇽>의 포로생활에서 <로마>로 돌아온 뒤, <메사아> 재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지나서야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가, 계속되는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연장을 거듭하여 내려왔던 <아듬> 이후 4,000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 강림준비시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아담>으로부터 6,000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민족은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성전을 신축하고, 또 <말라기>선지의 영도에 의하여 사신을 숭배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면서, 율법을 공부하고 신앙의 쇄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등을 중심하고 종교의 개혁운동을 일으키어, 중세 암흑시대의 어둠을 뚫고 새로운 복음의 빛을 따라 신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던 것이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약 40년 준비기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강림준비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대를 다시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모든 기곡교 신도들은, 마치 애급에서 <요셉>을 만날 때까지의 <야곱>가정이나, 또 예수님을 맞을 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갖은 파란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복귀섭리시대는 율법과 제사 등의 외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내려오던 시대였으므로, <메시아>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의 제1 이스라엘은, <페르샤> <그리이스> <에집트>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에 지배되어 외적인 고난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복귀섭리연장시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한 기도와 신앙의 내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의 제2 <이스라엘>은 내적인 순나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곧 이 시대에는 문예부흥의 주도이념인 인문주의와 그에 따라 일어난 계몽사조, 그리고 종교개혁에 따라 부르짖게 된 신앙의 자유 등에 의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교와 사상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 기독교 신도들은 말할 수 없는 내적인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강림을 위한 400년 준비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그의 재림을 위한 400년 준비기간이 있게 된 것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인 이 두 시대에 대해서, 각각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초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위하여, <메시아>가 강림하시기 430년 전에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시어,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케 하시고,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선민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 한편 이방인들 간에 있어서는, 이와 거의 동시대에 인도의 석가모니(B.C.565~485)로 하여금 힌두교를 발전시켜 불교의 새로운 터전을 개척케 하셨고, <그리이스>에서는 <소크라테스>(B.C.470~399)로 하여금 <헬라>문화시대를 개척케 하셨으며, 또 동양에서는 공자(B.C.552~479)로 하여금 유교로써 인륜도덕을 세우게 하시는 등, 각각 그 지방과 그 민족에 적응되는 문화와 종교를 세우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심령적인 준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같이 준비된 터 위에 오셔서, 기독교를 중심하고 <유대>교(Hebraism)를 수습하고 <헬라>문화(Hellenism) 및 불교(Buddhism) 유교(Confucism)등의 종교를 포섭함으로써, 그 종교와 문화의 전역을 하나의 기독교문화권 안에 통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을 앞도구 <메시아>강림에 대한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셨던 그 환경 조성의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오게 된 시대가 문예부흥시대였다. 그러므로 문예부흥시대는 <메시아>재강림을 위한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시대였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바와 같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 걸친 비약적인 발전은, 모두 이 문예부흥시대로부터 급격히 시작되어,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성숙시켜나온 것이다. 즉 예수님 때에는 <로마>제국의 발흥으로 인하여 지중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대한 정치적 판도와, 사면팔방으로 트인 교통과, <헬라>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범한 문화적 판도 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중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중심한 <로마>, <로마>를 중심한 세계에로, <메시아>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갈 수 있는 평면적인 기대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재림 때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열강들의 융흥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기반으로한 민주주의의 정치적인 판도는 전 세계에 펼쳐졌고, 교통 및 통신의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동서의 거리는 극도로 단축되었으며, 언어와 문화는 세걔쩍으로 교류되어, <메시아> 재강림을 위한 사조가 자유롭고도 신속하게 전 인류의 가슴 속에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그 평면적인 판도가 완전히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가 재림하시면, 그의 진리와 사상을 급속도로 전파하여 단시일내에 세계화시키는데, 이것이 그대로 적절한 평면적 기대가 되어지리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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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제5절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전이상을 복귀할 수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치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를 탕감복귀케 하시려고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으로 들어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유대>민족도 <사탄>세계인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독왕국시대를 세우신 것은 교황과 국왕을 중심하고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로 재림하시는 ‘만왕의 왕’에게 그 나라와 왕위를 인계해 드림으로써, <메시아>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이사야 9장 6절1), 누가복음 1장 33절2)). 그러나 국왕과 그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 세우기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해야 할 교황들이 부패한 가운데서 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새로운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포로가 되어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들, 그리고 정부 대신들과 관리와 기술자 등 많은 <유대>인들이 <비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 갔던 70년 기간이 있었고(예레미아 39전 1~10절3), 역대기하 24장, 역대기하 25절), <페르샤>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 그들을 해방시킨 후, 3차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하여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준비를 하는 민족으로 세워질 때까지의 140년기간이 있었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노정을 걸어야 했었다.  교황과 승려들은 그들의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위에 십자군전쟁에 패함으로 인하여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한편 십자군전쟁 이후 봉건제도가 몰락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자 점차로 왕권이 커지면서 교황과 국왕과의 충돌은 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와 충돌되어, 일시 그에게 금고를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후 1대를 지나서 1305년에 교황으로 피선된 <클레멘스> 5세는, 1309년에 교황청을 <로마>로부터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었고, 거기에서 70년간 역대의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그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 <로마>로 귀환하였었다.  그가 서거한 뒤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바리>의 감독 <울바누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청을 세우게 되었었다. 이 분리는 다음 세기에 이르러 개혁회의에서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즉 1409년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회의를 열어 분리되어온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에 불복함으로써 한때 세사람의 교황이 정립하게 되었었다. 그 뒤 다시 감동과 대감독 외에, 신학자 왕후 사절 등 많은 참석자로써 <콘스탄트>대회를 개최하여, 세사람의 교황을 일제히 폐위시키고 다시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교황선출의 권한을 추기경들로부터 빼앗아,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던 이 회의에로 옮겼다(1418년). 이 회는 그 뒤 <스위스>의 <바젤>에서 <로마>교회 기구를 입헌 군주제로 할 목적으로 열렸었다. 그러나 교황은 회중들의 이러한 주관성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회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래도 교황당 이외의 의원들은 개회를 강행하였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1309년 이래 잃어버렸던 교황권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4세기의 모든 회의의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대표로 세우고, 이 회의에 최고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부패한 교황과 승려들을 제거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교황권은 그들이 포로되기 전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위클리프>나 <후스> 같은 개혁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은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황이 1309년으로부터 70년간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같혔다가, 세 교황으로 분립되었던 노정을 거쳐 다시 <로마>교회를 중심한 교황전제정치로 복귀된 후, 1517년에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의 약 210년간은,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70년간 포로되었다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말라기>를 중심하고 정치와 신앙의 쇄신을 일으킬 때까지의 210년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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