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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보관물: 신학자료실
노아가정이 보여준 교훈
Ⅲ. 노아가정이 보여준 교훈 노아가 120년간이나 걸려서 산 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던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비난과 조소를 받은 그 일로 말미암아서, 노아가정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함은 설혹 노아가 알몸으로 누어 있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좋게만 볼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를 중심하고 하늘 앞에 선 노아를 비판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600년이나 지나 40일 홍수심판을 행사하심으로써 찾아 세우셨던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천국가는 길은 겸허와 순종과 인내를 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노아가정은 하나님이 1600년이나 걸려 찾아오셨고, 또 노아가 방주를 짓기까지 120년이나 이끌어 오셨으며, 뿐만 아니라 40일의 홍수로써 전 인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우신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함은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 전부를 아낌없이 쓸어버리시어,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애써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일단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낌없이 버리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체기대
2. 실체기대 세례요한은 모세와 같은 처지에 세워졌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에게 있어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자녀의 입자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다(본장 제2절 Ⅰ.2). 따라서 세례요한은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간의 탕감기간을 지나고,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운 터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을 보고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탄 국가인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지만, 세례요한을 중심한 유대민족은 로마제국을 떠나 다른 땅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 밑에 있으면서 그들을 굴복시켜 그 제국을 하늘 것으로 복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세례요한을 중심한 기사 이적을 보여 주시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잉태에 관한 천사의 놀라운 예고와 또 그 부친이 이것을 믿지 않았을 때 벙어리가 되었던 기사, 그리고 그가 출생할 때에 보여주신 이적 등으로 말미암아,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고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누가복음 1장 65~66절1))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민족은 세례요한의 출생시부터,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목숨을 이어가면서 기도의 생활을 한 그의 빛나는 수도의 생애로 인하여, 제사장들과(요한복음 1장 19절2)) 일반 유대인들(누가복음 3장 15절3)), 그를 메시아로 잘못 알 정도로 그의 신망이 높았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궁중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애급사람으로 죽였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믿고 따랐더면, 그들은 홍해를 건너거나 광야를 돌지 않고, 또 석판이나 성막이나 법궤도 필요없이 불레셋의 곧은 길을 통하여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기사 이적으로써 믿음의 대상자로 세워 주신 세례요한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복귀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기대를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제2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전 위에서, 그의 대신으로 셋을 세우셨다(창세기 4장 25절). 그리하여 그 후손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사,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세우시어 새로운 복귀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6장 13절에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을 하신 것을 보면, 그 때도 말세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후 노아가정을 터로 하여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가정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다음으로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담가정이 복귀하지 못하였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은 노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이루시려다 못 이루신 뜻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600년을 지나 10대만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축복하셨던 것(창세기 1장 28절)과 마찬가지로 노아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세기 9장 7절).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2 인간조상이 된다. 노아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퇴폐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 때에 부름을 받아(창세기 6장 11절), 120년간이나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절대 순종하여, 평지도 아닌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조건 삼아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홍수심판을 감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인하여 노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바와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미 아벨이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 위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는 또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아벨 대신 택함을 받은 셋(창세기 4장 25절)의 후손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람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기 때문에(창세기 6장 9절), 그는 방주를 지어 그것으로써 직접 하나님에게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들은 방주였다. 그러면 그 방주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 노아가 아담대신 제2 인간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었던 천주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신천주를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뜻 맞게 바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물로 세웠던 것이 바로 방주였다.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3단계의 성장기간들 통해서 창조된 천주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여덟이었던 것은, 노아가 아담 대신의 입장이었으므로, 일찍이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방주가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인으로 들어간 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그의 식구들은 전 인류를 상징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간 동물들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방주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께서 40일간의 홍수심판을 하셨는데, 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음란에 빠져서 이미 사탄을 대하고 있는 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의 입장에서 대하시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대하시어 섭리하실 수 있는 대상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 있는 전 인류를 멸하시는 홍수심판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심판기간을 40일로 정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논술하는 바, 10수는 귀일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목적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지 못하였던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다시 귀일시키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4위기대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4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써 각 대를 세우시는 섭리를, 노아에게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은 40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의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40수 탕감기간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방주를 중심하고 4위기대를 완성하는 섭리를 다시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이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 40일 심판기간을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40수는 그 후의 탕감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의 수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예를 들면 노아심판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금식기도 40일, 가나안 정탐기간 40일,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표류 40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 왕의 재위기간 각 40년, 엘리야 금식 40일, 니느웨 멸망에 관한 요나의 예언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과 부활기간 40일 등은 모두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경을 보면 그 심판이 끝날 때에, 노아가 방주에서 가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섭리를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방주를 하나님이 뜻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움으로써, 천주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심판 40일기간은, 천지창조의 이상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세기 1장 2절)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40일이 끝날 때에 방주를 중심하고 나타내 보이셨던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 역사노정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마귀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게 하신 것은(창세기 8장 6~7절) 무엇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던가 ? 이것은 마치 인간창조 직후에 천사장이 해와의 사랑을 노렸었고, 도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창세기 4장 7절), 홍수심판이 끝날 무렵에도 사탄은 노아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가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없는가 하고 물 위를 찾아 헤매는 모양으로써 표시하신 것이었다. 다음으로 노아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세 번 내보낸 것은 무엇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던가 ? 성서에는 물이 준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비둘기를 내보내지 않고 창문으로 직접 내다보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설혹 그 문들이 모두 봉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비둘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내다보아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내보냈던 목적은 물이 준 것을 알려고 했던 것보다 더욱 중요한 데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이 있을 것을 선포하신지 7일 후에(창세기 7장 10절) 홍수가 시작되어, 40일 심판기간이 지난 후에 첫번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다시 방주로 돌아가니, 노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9절). 이 첫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창세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창조이상이, 아담이라는 완성실체로 실현되기를 원하시어 그를 지상에 창조하셨던 것인데, 그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하고는 지상에 그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의 뜻 성사를 후일로 미루시고 그 이상을 일시 지상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 7일을 지나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역시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내려앉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앉을 수 있다는 표시로서 다만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다시 방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창세기 8장 10~11절). 둘쨋번으로 내보낸 이 비둘기는 창조이상의 ‘완성실체’로서 다시 오실 제2 아담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복귀섭리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만일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지상에 머무실 수가 없게 되어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만일 그 때에 땅에 물이 말라서 비둘기가 내려앉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더면, 그 비둘기는 결코 방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과 같이, 장차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잘 믿고 모시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지상천국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지 않고 지상천국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부득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런 후 또다시 7일이 지나서 노아는 세번째로 비둘기를 내 보냈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물이 말랐었기 때문에, 다시는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12절). 이 세쨋번의 비둘기는 제3 아담으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는 그 이상이 지상에서 거두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3차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제3 아담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이 지상에서 이루어질때, 비로소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하의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비둘기 세 번 내보낸 실례로써, 예정론에서 밝혀진 바와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그 섭리의 대상인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연장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의 불신으로 인하여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야 할 것과 만일 유대인들도 불신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제3 아담으로 재림하셔야 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7일이라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것을 다시 찾아 세우는 데에도 섭리적인 어떠한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면 아니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노아가정은 심판 40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인 방주를 뜻맞게 찾아 세워 그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담가정이 보여준 교훈
Ⅳ. 아담가정이 보여준 교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첫째,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 책임분담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원래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헌제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분담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헌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둘째,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아벨대신 셋을 세워 새로운 섭리를 하신 것으로써,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인간에 대한 그의 예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아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그가 ‘실체헌제’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던 것이다. 세째, 가인과 아벨의 헌제로써, 타락인간은 항상 아벨적인 존재를 찾아 그에게 순종 굴복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한편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것과 동일한 섭리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후 계속 반복되어 내려왔다. 따라서 이 노정은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도 걸어야 할 탕감노정으로서 그대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형적인 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Ⅲ.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한 터 위에서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헌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기대는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복귀되고, 실체기대는 ‘실체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상징헌제’ 및 ‘실체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3대축복은, 아담과 해와가 각각 개성을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만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3대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의 경로를 따라,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주는 ‘상징헌제’를 드림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복귀하고 그 위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주는 ‘실체헌제’를 드림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워 가지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을 두 가지로 갈라서 생각할 수 있다. 이미 타락론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사탄이 타락인간을 주관하게 됨을 인하여, 그는 인간이 주관해야할 만물세계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의 만물이 탄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로마서 8장 22절1)). 그러므로 만물로써 ‘상징헌제’를 드리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상인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서, 만물보다도 거짓된 자리에 떨어졌으므로(예레미아 17장 9절2)),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창조 원리적인 질서에 준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만물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따라서 ‘상징헌제’를 드리는 둘째의 목적은, 실체인간을 하나님 앞에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려는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상징헌제’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헌제이므로, 만물과 인간의 창조의 순서가 그러했듯이, 외적인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린 기대 위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후에, 이 기대 위에서 다시 인간을 실체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서, ‘실체헌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실체헌제’는 실체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존재가 아벨적인 존재를 실체로 헌제하여 자녀를 부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 밝혀져 있는 바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도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실체헌제’는 뜻맞는 헌제가 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기 위하여는, 아담 자신이 먼저 ‘상징헌제’를 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아담부터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담이 헌제를 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이 대하게 되어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여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의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타락한 아담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천추만대에 이르는 슬픔을 안기어 드린 죄악의 장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대하시어 복귀섭리를 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으로 그의 차자 아벨을 세워서, ‘상징헌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기대 위에서, 가인과 아벨이 ‘실체헌제’로써,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면, 부모된 아담은 그 실체기대 위에 서게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써 ‘실체헌제’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헌제의 중심인물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상징헌제에는, 아담대신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것과, 또 아벨을 실체헌제의 중심인물로 결정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세워야 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아담가정 전체가 세우는 결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 굴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다함께 자녀로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운 입장에 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가인과 아벨은 선악의 모체인 아담을 분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분립하였더면, 그 부모된 아담은 사탄을 분립한 그 입장에서, 먼저 실체기대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은, 상징헌제와 실체헌제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벨이 뜻맞는 헌제를 함으로써, 아담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조건과 ‘실체헌제’를 드리기 위한 중심인물로서의 아벨의 입장은 세워졌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은 천사장이 해와를 타락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됨으로써 ‘실체헌제’에 실패하여,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게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