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셔 [원] Fisher, John

Fisher, John(1469~1535). 성인. 순교자. 축일은 6월 22일. 영국 로체스터의 추기경 주교. 요크셔주 비벌리에서 태어났다. 1491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특별연구원이 되면서 사제로 서품. 1497년 동대학 마이클하우스 학장(學長), 1501년 부학장, 1505년 퀸즈 칼리지 학장이 되었다. 1504년 로체스터 주교가 되어 학장을 겸무, 에라스무스(D. Erasmus)를 초빙하여 학적 수준 향상을 도모한 외에도 크라이스트 칼리지(1505년), 세인트 존즈 칼리지(1511년)의 창립에도 진력하였다. 일찍이 헨리 7세의 모후(母后) 마거리트, 헨리 8세의 제1비 캐더린의 고해신부를 지낸 바 있고, 종교개혁 풍조에 항거, 로마교회 신앙을 견지, ≪루터주의 반박론≫(Confutatio assertionis Lutheranae, 1523)을 저술하였다.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는 왕비에게 가담하여 왕에 반대하고 로마 교회로부터의 분리에도 반대하였다. 수장령(首長令, 1534년)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1535년 옥중에서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6월 헨리 8세에 의해 반역자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무덤은 피터 애드 빙쿨러 탑성당에 함께 순교한 모어(Thomas More)의 무덤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188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諡福), 1935년 순교 400주년에 즈음하여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명저 ≪성찬론≫(De veritate corporis et sanguinis Christi in Eucharistia, 1527)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피렌체 공의회 [라] Concilium Florentiuum [영] The Council of Firenze [한] ~公議會 [관련] 공의회

1438~1445. 제17차 세계공의회. 터키로부터의 방위를 요청해 온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모색하기 위해 교황 에우제니오(Eugenius) 4세(재위 : 1431~1447)가 소집. 공의회 우위론자들이 우세했던 바젤 공의회(1431~1449년)가 교황에 의해 페라라(Ferrara, 1438~1439년), 피렌체(1439~1443년), 로마(1443~1445년)로 이전되면서 모두 피렌체 공의회 회기로 간주되었다. 페라라에서는 동서방교회에서 700명 가량이 참석하였는데 성신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였다는 교리, 누룩 없는 빵을 면병으로 사용하는 문제, 연옥 교리, 교황 우위권 등이 쟁점이 되었다. 8개 회기로 이루어진 피렌체 회의에서는 동방교회측이 서방교회측의 입장을 대부분 접수함으로써 교황의 우위론, 신경(信經)에 ‘필리오케’(Filioque)문구를 첨가하는 문제, 성체와 연옥 교리 등이 확정되었다.

1439년 6월 동서방교회 사이의 일치교령이 조인되고, 그리스측 참석자들이 떠난 뒤에도 바젤 공의회에서 야기된 우위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는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공의회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대칙서 (1441. 4)로 선포하고, 바젤 공의회의 공의회우위론자들은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11439년의 일치선언은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함락(1453년)됨으로써 그 효력을 잃었으나 다른 전례를 허용하는 신앙의 일치라는 일치 원칙은 이후의 재일치 노력에 계속 반영되었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 공의회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피델리스 [라] Fidelis, de Sigmaringa

Fidelis, de Sigmaringa(1578~1622). 성인. 순교자. 카푸친회 사제. 축일 4월 24일. 원명은 Markus Roy. 독일 슈바벤지방 지그마링겐에서 태어나 스위스 프라티가우에서 죽었다. 1598년부터 프라이부르크 임브리스가우에서 수학, 1603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1611년에는 교회법 및 민법 박사학위도 취득하였다. 변호사업을 그만두고 1612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카푸친회에 입회, 사제가 되었다. 1614년부터 콘스탄츠대학 및 프라운펠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1617년부터 설교를 시작하였다. 라인펠트(1618~·1619년), 펠트키르히(1619~1620년), 프라이부르크(1620~1621년)의 수도원장을 거쳐, 1621년부터 다시 펠트키르히 수도원장으로 있었다. 그는 설교가, 수도원장으로서 유명했고, 가톨릭 포교에 지도적 역할을 했으나, 스위스의 시비스에 가서 설교 중 칼빈과 농민에게 살해당하였다. 1729년 시복(諡福)되고, 1746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이해 시성(諡聖)되었다. 법률가, 지그마링겐, 호엔졸레른 등의 수호성인.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플레로마 [영] pleroma [그] Pleroma [독] pleroma

‘충만’의 뜻. 신약에서는 1요한 1:16, 골로 1:19, 2:9, 에페 1:22 · 23, 3:19, 4:13에 쓰이고 있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세상에 신성(神性)이 충만하는 의미로 쓰였다. 그노시스주의의 발렌티노는 플라톤적 세계관에 서서, 현상계(現象界)에 대한 이데아의 세계를 플레로마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프슈키코스이며, 플레로마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에 반해 프네우마티코스는 그노시스로 하여금 플레로마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노시스주의에 대한 반박의 의도로서 이 말을 사용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플라톤주의 [한] ~主義 [영] Platonism [독] Platonismus

플라톤의 철학과 그의 철학 학풍을 계승 부흥시킨 철학사상. 반드시 플라톤 학설을 재구성하는 것만을 지칭하지 않고 다양하게 발전한 관념론적 이상주의 경향을 총칭한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관념론적 이상주의는 보통 플라톤의 이데아설에 기초한 것이 대부분이다. 처음 플라톤주의를 제창한 사람들은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중심으로 하는 아카테미파. 궁극적으로 지혜는 문자로 표현될 수 없고, 철학자들 사이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대화로써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한 플라톤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여 “진리는 발전될 수 없고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라는 회의론을 제창하였다. 그 뒤 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오리제네스의 신학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역시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사상에 미친 플라톤주의의 영향이다. 스콜라철학이 형성되기 전시대, 즉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사상이 지배적이던 중세의 교회는 한 마디로 플라톤의 강한 영향 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기초하여 성립된 철학이었고, 르네상스는 다시 플라톤주의가 부흥한 경향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데카르트와 칸트를 위시한 근대 관념론 철학은 일종의 플라톤주의를 근본적 특징으로 하고 있다. 17세기의 케임브리지 플라톤학파는 플라톤철학으로 복귀를 부르짖었고, 19세기의 모리스(John Frederic Denison Maurice) 등도 역시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깊게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플라톤주의의 전체사상 내용은 다양하지만 그들에게 공통적 사고는 이데아계와 현상계, 감성과 이성, 가치와 존재, 영과 육을 엄격히 구별하고 전자를 우위에 두는 이론적 사고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일원론적, 현실주의적, 경험론적이라고 본다면, 플라톤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철학과 대립되는 철학적 경향이 짙다. 한편 오늘날 교회에서는 플라톤주의와 성서적 그리스도교와의 근본적 이질감(異質感)을 자각하여 플라톤주의에 대한 신학적 비판이 준엄하게 행해지기도 한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