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본당 [한] 中和本堂

1927년 평남 중화군 중화읍 초현리(平南 中和郡 中和邑 草峴里)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 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바오로. 중화지방은 1864년 경 전교회장 김기호(金起浩, 요한)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전교로 목재리(睦齋里)에 공소가 개설되었으나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교우들이 산산히 흩어지면서 공소가 폐쇄되었고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후 다시 목재리, 서기리, 갈매리, 매미 등의 공소가 개설되고 그 후 1923년 미국의 메리놀회가 평안도 전역을 관할하게 되고 1926년 가을 메리놀회의 치셤(Chisholm, 池) 신부가 이 지방에 본당을 창설하기 위해 중화읍내에 부임, 이듬해 임시성당을 마련하고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본당으로 창설되어 이후 중화군 전역과 대동군(大同郡) 일원을 관할하게 되었다. 1932년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콜먼(W. Coleman, 高) 신부는 읍내 중심부에 대지를 마련하여 1934년 11월 29일 성당을 건축했고 이어 4대(1935∼1939년) 주임 강영걸(康永杰, 바오로) 신부는 본당 내에 성심학원과 성심유치원을 개설하는 한편, 성당 경내에 윤창혁(尹昌赫, 비오) 회장을 기념하는 예수 성심상과 루르드의 성모상을 건립하였다. 1940년 6대 주임으로 부드(W. Booth, 夫) 신부가 부임했으나 이듬해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 교구내의 동료 메리놀회원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 구금되자 중화본당은 대신리(大新里)본당 관할로 되었다가 1942년 6월 박용옥(朴龍玉, 디모데오) 신부가 7대 주임신부로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8월 10대 주임 강현홍(康賢洪, 요한) 신부가 월남하고 대신에 평양 주교관에서 휴양 중이던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 신부가 매월 2, 3차례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으나 이해 12월 12일 장두봉 신부마저 공산정권에 체포되어 그 후로 본당은 폐쇄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 부인회인 성모회, 청년회, 성가대, 가톨릭운동연맹 지회, 그리고 자치단체인 교무위원회 등이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는 1935년 개설된 성심학원, 1936년 개설된 성심유치원 등이 있었다. 그리고 중화면 하명월리(下明月里)에는 병인박해 때의 묵주, 성패, 십자고상, 첨례표, 필사본 ≪경세가≫(警世歌) 등이 발굴된 유석지가 있다. 폐쇄 직전의 교세는 교우수 660명, 공소 9개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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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 [한] 仲裁者 [라] mediator [영] mediator

하느님과 인류 사이를 화해시켜 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 이 칭호는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뿐이신 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의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1디모 2:5-6). 그리스도는 중재자로서 가장 적합한 자격을 가진 존재이다.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류가 화해해야 될 대상이고,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화해를 필요로 하는 인류를 대표한다. 그리스도는 중재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인류에게 속죄 받은 은총을 공로로써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십자가에서 이미 얻은 은총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 이외의 사람도 “인류에게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헌신함으로써”(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제3부 48, 1) 완전히 2차적인 의미로서의 중재자라고 부르게 된다. 가톨릭 교회가 서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성인들도 하느님께 인류를 중재하는데 있어 ‘중재자’라고 부르는 경우를 말한다. 각 개인은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함으로써 자신과 하느님과의 사이가 아무리 멀리 분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가교가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갖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속죄와 화해라는 말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해석하는 것은 ‘화해’라는 표현을 통해 중재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신약성서에서 ‘중재’라는 말이 여섯 번, 구약성서에 한 번 나오고 있다(갈라 3:19-20, 1디모 2:5, 히브 8:6, 9:15, 12:24, 욥기 9:33). 인간이 하느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은 때로는 진노의 손길을 내려 인간을 벌하였다(노아 홍수 등). 그러나 하느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도록 한 것은 하느님이 그의 선민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에서였다.

모세와 제사장들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적 역할을 하였으나 인간의 계속적인 범죄로 결정적인 화해의 중재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한 분이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즉 유일회적인 희생의 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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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우론 [한] 重友論 [관련] 교우론

⇒ ≪교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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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본당 [한] 中央本堂

①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 주보는 예수성심. 전주는 한국 천주교회와 관계가 깊은 곳으로 부근에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고, 순교지 숲정이가 있다. 193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殿洞本堂)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 곳에 ‘비성거리’[현 전주시 고사동] 공소를 신축, 이후 1947년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해에 비성거리성당을 성립, 초대 주임으로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신부가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장래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 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성당이 협소하므로, 전주시 대동(大洞)[현 전주시 다가동] 소재 일산 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大洞聖堂)을 개설하였다. 이리하여 대동성당 시대로 접어들어 2대(1951∼1952) 이대권(李大權, 바오로), 3대(1952∼1954)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를 거치는 동안, 1950년 6.25전쟁 당시는 김재덕 신부와 이대권 부제가 북괴 내무서원에서 체포 투옥되었고,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 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에 와서 당시 교구장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주교는, 교구에서 경영하던 ‘전북제사’ 부지에 새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진 뒤,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신부의 지휘 아래, 건평 290여평의 전주 ‘중앙본당’(中央本堂)을 준공하여 1956년 8월 6일 주교좌(主敎座)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초대(1956∼1958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2대(1958∼1961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3대(1961∼1962) 김재덕 신부, 4대(1962∼1963년) 김이환(金二煥, 스테파노), 5대(1963∼1966년) 김재덕 신부의 재부임, 6대(1966∼1969년) 박영규(朴永圭, 바르나바), 7대(1969∼1974년) 안복진(安福瑱, 요셉), 8대(1974∼1976년) 이대권 신부, 9대(1976∼1980년) 서용복(徐龍福, 토마스), 10대(1980∼ 현재) 문정현(文正鉉, 바르톨로메오) 신부 등 역대 주임신부들의 업적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1958년 ‘성가수녀원 분원’의 완공, 1958∼1960년의 사제관 완성[현 수녀원], 1963∼1965년의 새 사제관(3층) 및 강당신축, 1966년 본당 사무실 신축, 1967년 프랑스제 헌종(獻鐘) 설치와 성모상 건립, 1969년 ‘상가’건립, 1969년 성 바오로서원 유치, 1975년 성모유치원 신축 개원, 1977년 노인학교 개설, 1978년 양로원 설치운영, 1981년에는 ‘중앙성당 건립 25주년 기념성당’ 신축계획을 세웠고, 1982년에는 금암동본당의 착공을 보았다. 한편 성당 신설 분립 업적만 하더라도, 1965년 4월 지역안배로 덕진본당이 신설 분리됨으로써 금암동 일부, 덕진, 호성, 전미 전당리 공소, 팔복동, 조초면, 송천동의 관할권을 이양하였고, 1965년 12월 16일에는 순교자 정신 앙양과 복자 시복일을 기념하는 복자성당이 건립됨으로써 다가동, 태평2가 일부, 중앙동 일부, 고사, 진북, 화산동 지역의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1969년 12월 2일에는 노송동본당이 건립됨에 따라 중노, 남노, 인후, 우아동과 소양면, 용진면 공소 일부의 관할권을 이양하였으며, 1976년 12월 15일에는 숲정이본당이 신설됨에 따라 서신동, 태평 1, 2동 일부, 금암, 진북 2동의 관할권을 이양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하며, 1984년 6월 현재 총신자수 5,163명이다. 중앙본당이 주교좌 성당이 된 1956년 8월 이전까지의 전주교구 관내의 주교좌 성당은 ‘전동본당’이었다.

② 부산교구의 주교좌 본당. 주보는 성 십자가. 항도 부산의 도심인 부산시 중구 대청동(釜山市 中區 大廳洞) 1가 48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부산시내에서 세 번째로 설정된 이 본당은 1948년 8월 1일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를 주임으로 맞아 창설되었다. 8.15광복 후 이 본당이 창설되기 전에는 부산 도심지에 본당이 없어, 일본인 신자들이 쓰던 작은 공소를 인수하여 범일동본당의 사제를 모셔다 주일미사를 보았다. 당시 공소에는 중구, 서구, 동구 등 중앙지대의 신자들과 영도(影島)의 봉래동, 신선동 신자들이 모였다. 신자수가 늘어감에 따라 청학동과 범일동 본당의 중간 도심지에 본당의 창설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래서 지도적인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우선 지은사(至恩寺)라는 절은 대상으로 스님과 협의가 성립된 뒤 당국에 인수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현 사제관 자리는 당시 불교계통에서 사회사업을 하는 곳인 데다 적십자사가 들어 있고, 또한 재일 한국인 청년단이 건물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데 일부 횡포한 청년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신부를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였다. 이런 험난한 정황 속에서 절의 정면과 내부를 보수하여 1948년 6월 20일 축성식을 올리고 오늘의 기초를 닦았다. 그 무렵 이 본당의 관할구역은 북으로 초량에서부터 남으로는 영도구 신성동, 서쪽은 서구 하단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교세는 아직 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신자수는 계속 늘어 1951년 5월 초량본당(신자 3,100명)을 분리시키고, 1951년 6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수녀회의 분원(分院)을 개설하였다. 1952년 3월 유년부(유치원)를 설립하고, 1954년 4월에는 성당 개축공사에 착수하여 1956년 새 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그 동안 1955년 1월 신선본당(신자 700명)을 분할하고, 그 해 2월 서대신본당(신자 2,500명)도 독립시켰다.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중앙본당에는 주교좌가 설정되어, 1957년 5월 30일 초대 교구장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1959년 10월 초장본당(신자 2,000명)을 분할하고, 1960년 5월 1일에는 성가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1961년 12월 송도본당(신자 200명)을 분할하고, 1963년 3월 30일에는 본당주임인 장병화(張炳華, 요셉)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었다. 1964년 5월 교구청이 현 대청동 4가 81의 1번지로 이전하였다. 1964년 11월 동대신동본당(신자 2,400명)을 분할하고, 1970년 9월 영주본당(신자 2,600명)을 분리시켰다. 1973년 8월 5일에는 현 대성당의 축성식이 봉헌되었다. 1974년 3월 성년행사 서부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고, 1975년 7월 17일 제2대 교구장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1975년 12월 성모 동굴의 축성식을 올리고, 1980년 5월 루치아노 안제로니((Luciano Angeloni) 교황대사의 방문을 받았다. 1983년 말 현재의 신자수는 9,948명이다.

그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은 초대(1948. 8∼1950. 6) 이명우 신부를 비롯하여, 2대(1950. 6∼1957. 5) 장병룡(張丙龍, 요한). 3대(1957. 5∼1968. 10) 장병화, 4대(1968. 11∼1972. 10) 제찬규(諸燦奎, 시메온), 5대(1972. 1∼ 1972. 3) 이철우(李喆雨, 바오로), 6대(1972. 3∼1972. 11) 이철희(李哲熙, 바오로), 7대(1972. 11∼1976. 11) 김유재(金有宰), 8대(1976. 11∼1978. 1)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신부였고, 현재는 이경우(李慶雨, 가브리엘)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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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 [한] 中世哲學 [영] medieval philosophy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를 주축으로 하는 철학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말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서양철학을 말한다. 중세철학은 스콜라 철학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세 철학은 그리스 · 로마 초기의 고대철학과는 당연히 이질적인 관점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발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복음의 선포, 사도들의 전교활동, 초대교회의 형성이라는 종교적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 세계관은 이미 구약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화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유일의 절대자요 세계와 우주의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되고 인간에게 ‘신의 모습’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적 문호와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자각되면서 처음에는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적 자연관이나 합리주의와의 대립으로서 나타났다. 이 자각은 이윽고 그의 논리적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리스철학을 방법으로서 채용하게 되고, 신앙적 세계의 이해는 점차 신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는 중세철학의 걸음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중세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난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호교(護敎)의 방패로서 출발하였다. 그리스철학은 최초로 교부학(敎父學)과 결부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피론(Pyrrhon)이었다. 플라톤철학은 그를 중개로 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공통사상이 되어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계승되었다. 보에티우스(Boethius)는 플라톤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제저작을 소개하고 중세철학의 기본적 용어와 개념의 대부분을 갖추었다. 최고 존재자인 하느님으로부터 질료적 피조물(質料的被造物)에 이르는 세계의 제존재의 질서를 신 플라톤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세계상(世界像)으로 종합 정리한 디오니시우스(Dionysius Areopagita)는 그 후의 중세적 세계적 세계관의 윤곽을 제공하였다.

스콜라철학 시대가 되자 논리적 요구가 더욱 고조되고 신앙에 가능한 한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기 위한 신학의 학적 정비(學的整備)가 적극적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이해를 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ctum)이라는 안셀모(Anselmus)의 입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3세기에는 풍부한 그리스철학의 문헌을 가진 아라비아 문화권의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콜라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형이상학에 더하여 자연철학(自然哲學)에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적 방법을 채용함으로써 이 방면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그 때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철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중세철학이 사용한 제2의 논거인 관찰 · 경험에 의거한 지식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노가 치체로를 통하여 배웠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내면성이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계시나 종교상의 권위를 논증을 근거로 하는 경우에는 대개 교회가 승인한 사항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스콜라철학 시대에는 교부,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철학은 이와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의하여 나타나는 진리를 상호 모순되는 일 없이 조화시키려 기도함으로써 고대와 근대 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 논증법을 개발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제약도 있었고, 또 철학이 ‘신학의 시녀’로서의 역할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철학은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그 독자성과 심원성(深遠性)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동일적인 질서와, 인간의 자유 · 존엄의 확실한 근거를 추구해 온 점은 중세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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