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보

정국보(1799∼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프로타시오. 경기도 개성(開城)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하여 벼슬을 하던 조부(祖父)가 죄를 짓자 부친을 따라 상경, 상민(常民)으로 신분을 감추고 선공감(繕工監)[朝鮮시대 土木과 營繕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일하며 살았다. 30세 경 입교하여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를 받았고 그 후로는 아내와 함께 홍살문 근처에 살면서 성사를 받기 위해 상경하는 시골교우들을 돌보았다. 가난과 병으로 14자녀를 모두 잃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항상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어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고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 곧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다시 형조에 가서 자신을 체포해 달라고 연 3일 동안 청원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청, 그 날로 체포되어 결국 5월 21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장사(杖死),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교회 [한] 正敎會 [라] Ecclesia orthodoxa [영] orthodox Churches

동방교회, 정교회, 하리스트스 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들의 총칭. 고대 말기 동로마제국의 교회에서 생겨난 많은 민족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정교회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 4개의 총주교 관구(Patriarchatus)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며, 부분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 정교회가 성립된 순서별로 보면 시리아, 불가리아 (917년), 세르비아(1346년), 러시아(1589년), 그리스(1830년), 루마니아(1925년), 알바니아(1937년)의 순이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퍼져있으며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신봉하는 콥트교회, 아비시니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야곱파교회, 남인도의 말라바르교회, 한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펴졌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도 모두 동방 정교회의 이단이다. 이들 교회의 신자는 통틀어 약 3억명 정도다.

정교회는 5∼6세기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1054년에는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면서 동서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서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그 뒤 분열의 폭은 더욱 깊어졌다. 동방 정교회의 중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다. 이들 정교회들은 둘 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 시작된 러시아교회는 모스크바 대주교를 독립시켜 총주교로 삼았다(158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전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61년 동방 정교회는 세계교회협희회(W.C.C.)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동방교회의 특징은 신학과 전례에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는 수도지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 · 사제 · 부제 등을 모두 고대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의 전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Chrisostomus)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 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번은 성 야곱전례를 사용한다. 교회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①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 그리스 지방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서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고린토를 비롯한 주요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중부 그리스지방이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었고 지방구로 설정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재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티노플 분열(486∼516년) 때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성화상논쟁(聖畵像論爭, 725∼842년)때에 성화상공경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054년을 기하여 서방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리스 정교회도 터키인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제국은 독립을 얻었고,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27년)에서 승리하여 독립하였다.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1833년), 총주교도 결국 승인을 하였다(1850년). 1852년 그리스 국회는 그리스 정교회를 구교로 정했고, 아테네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주교회의(Holy Synod)를 설치하였다.

②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 9세기경 키에프 주민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접촉하면서 복음이 전해진 러시아에는 공주 올가(Olga)의 입교(957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1세와 황제 바실리오 1세의 딸 안나와의 결혼으로 전도가 활발하였다. 13세기 타타르인이 러시아에 침입하면서 러시아인들이 동북부로 이주하였고, 교회의 중심도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겨졌다(1328). 1589년 모스크바의 주교 욥(Job)이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부터 총주교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부터 모스크바는 소위 제3의 로마로서 당시 터키인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 두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은 표트르대제였다. 그는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1700년),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회의(Holy Synod)를 관장케 하였다. 이 제도는 러시아혁명까지 존속하였다. 혁명 후 2차 대전 시작(1941년)까지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정책으로 교회가 차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 탄압하였다. 교회재산을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 정부는 조직적인 반종교투쟁을 감행했고, 이는 1941년 대독일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은 반종교정책을 완화시켰다. 반종교선전이 중지되고 1943년에는 주교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뒤퐁이 죽은 뒤(1924년) 공석으로 남아 있던 총주교좌에 세리키가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고 성직자 교육과 신학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취임 금지조치 이외에는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로 인정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선교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고, 1961년 뉴델리의 세계 교회회의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에도 가입하였다.

③ 루마니아 정교회(Rumanian orthodox church) : 1856년 공국(公國)이 된 루마니아는 25년 뒤에 독립왕국이 되었다. 최초의 왕자 코사(Couza)는 교회를 독립시키기로 하여 국회의 동조를 구했고, 그에 따를 법률도 통과되었다. 1885년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요아킴 4세는 정식으로 루마니아 교회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1차 대전 후 영토와 국민이 증대하면서 교회의 지위도 강화되어 1925년에는 총주교좌가 설치되었다.

④ 불가리아 정교회(Bulgarian orthodox church) : 1204년에서 1393년까지 불가리아 교회는 독립된 주교좌를 갖고 있었지만, 터키인의 침략 이후 투르크제국이 멸망할 때(1393∼1856년)까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지배아래 있었다. 주교 힐라리온(Hilarion)이 교회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1860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민족주의적 이단이라 하여 반대했고 다시 총대주교 안티모스(Anthimos) 6세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파문하였다. 그 뒤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배려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파문을 풀면서 양교회의 관계는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⑤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 : 1219년 성 사바(Sava)에 의해 독립 주교좌가 되었고, 1346년 총주교좌 교회로 승격되었다. 1389년 이후 약 5세기간 터키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회도 독립을 잃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재치권 아래 있었다. 1876년 국가가 완전 독립하면서 교회도 1879년에 자치를 회복하였다.

⑥ 알바니아 정교회(Albanian orthodox church) : 1912년 터키로부터 독립한 뒤 교회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폈다.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추진된 이 투쟁은, 1908년부터 사제 놀리(Noli)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920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회교인으로서 뒷날 국왕이 된 조구(Zogu)의 침입을 받아 놀리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37년에야 알바니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정식교회로 인정되었다.

그 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1951년), 폴란드 정교회(1925년) 등의 교회가 성립되었고, 핀란드 ·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헝가리 · 마케도니아 · 우크라이나 등에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살고 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는 15세기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대회가 시도되었다. 500여년만이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만났다. 양측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기간 동안 정교회측의 업저버가 참관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제2차 정교회회의(Pan-Orthodox Conference)에 모인 14개 정교회 대표들은 로마와 교회일치적인 입장에서 계속 대화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동방교회에 관한 문제를 관할하는 성(省)을 1917년에 독립시켜 동방교회성성(Congregation for Oriental Church)이라 명명하고 있다.

한국의 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 정교회의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암보로시 신부에 의해 주한 러시아공사관에서 시작된 선교는 1900년 황제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땅 1,000평을 하사받아 성 니콜라이 성당을 건립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2대 신부로 온 스케초프스키(Chrysanthus Sketkovsky)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6년 노일전쟁(露日戰爭)에서 러시아의 패전과 이에 따른 원조의 중단, 1917년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과 이에 따른 선교활동 중단 등으로 선교활동이 크게 위축된 데다가, 1945년 이후 정교회를 주관하던 폴리카르프(Polycarp) 신부와 김의환(金義煥) 신부가 추방되거나 납북됨으로써 교회는 거의 문을 닫다시피 하였다. 1950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출전하였던 그리스군 군목들의 주선으로 1956년 소속이 그리스정교회 산하로 옮겨졌고, 1966년 성당도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Nicolas Zernov, Estern Christendom, 1961 / A. Schmeman, The Historical Road of Eastern Orthodoxy, 1963.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교조약 [한] 政敎條約 [라] concordatum [영] concordat [독] Konkordat [프] concordat [관련] 교회와

하느님에게 봉사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교회와 국민적이고 정치적 권한에 기초한 국가는 독립적인 2개의 최고권(最高權)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순교회적 사항’(純敎會的事項, res mere ecclesiasticae)을 관장하고, 국가는 ‘순국가적 사항’(res mere ecclesiasticae)을 관장하지만, 교회권과 국가권 모두에 관계되는 ‘혼합사항’(res mixtae)이 있어, 이를 관장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지 구분하기가 상당히 곤란할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교회권과 국가권은 종종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권과 국가권의 최고권자들이 맺는 계약이 정교조약이다.

정교조약은 ① 보름스(Worms)의 콘코르다툼(1121년)과 같이 이해 당사자들이 공동선포한 법령의 형식, ② 체결된 내용을 먼저 교황대칙서로서 선포하고 국법으로 공포하는 형식, ③ 이해 당사자에 의해 기초 · 조인(調印)된 원안(原案)을 비준 · 공포함으로써 법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형식, ④ 그 외 비공식적 협정(modus vivendi) 등이 있는데, ③이 가장 일반적이다. 정교조약의 체결권은 교회측에서는 교황, 또는 지속적 권리주체인 교황청이 되고(교회법 225조) 국가측에서는 헌법에 따라 원수(元首), 또는 정부가 된다. 정교조약은 교황특권설(Privilegientheorie), 국가양보설(國家讓步設, Legaltheorie)이 대립되지만 조약설(條約設, Vertragstheorie)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고 국제법상으로도 협상으로 간주한다.

정교조약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중세에는 교회의 기본입장이 유럽에 있어서 대체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정교조약도 크게 많지 않다. 최초의 정교조약은 서임권 분쟁을 둘러싸고 1121년 교황 갈리스도(Callistus)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1081∼1125) 사이에 맺은 보름스조약이다. 여기서 서임권은 교황과 국왕 양자의 이해 속에서 처리되었다. 대체로 역사상 중요한 정교조약들은 다음과 같다. 1515년 교황 레오(Leo) 10세와 프랑스왕 프랑스와 1세 사이에 맺은 조약으로 서임권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기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그 뒤 1801년 교황 비오(Pius) 7세와 나폴레옹 1세 사이에 다시 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따라 서임권, 교회재산은 국가에 양보하고, 프랑스정부는 가톨릭을 국가적인 신앙으로 인정하였다. 이 조약은 1905년 폐기되고, 정교분리가 확립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 격렬한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여 교황 비오 11세는 폴란드(1925년), 루마니아(1927년), 이탈리아(1929년), 바덴(1932년), 오스트리아 및 독일(1933년) 등 다수의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1929년 라테란 조약에 의해 로마문제가 해결되고, 주권국가로서 바티칸시국이 인정되었다.

정교조약은 교회와 국가의 이해가 공통적으로 관철되는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의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를 통해 양 이해 당사자들은 서로의 입장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리증진을 이룩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교회와 국가, 서임권논쟁

[참고문헌] A. Mercati, Raccolta di Concordati(1908∼1914), Roma 1919 / J.M. Restrepo, Concordata inita, Roma 1934 / M. Bierbaum, Das Konkordat in Kultur, Politik und Recht, Freiburg, 1928.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교분리 [한] 政敎分離 [라] separatio status ab ecclesia [영]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

근대국가의 헌법에서 나타나는 기본원리의 하나로 교회와 국가가 서로 자기의 고유한 활동영역을 지키는 한 상호 간섭하지 않으며 국가는 어느 특정한 종교나 교파에만 특권이나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어떠한 신앙에 대해서도 동등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 이것은 절대권적이었던 교권에서 국가와 개인의 해방임과 동시에 종교를 국가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취지 아래 시행되었다. 즉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려거나 국가가 종교단체의 활동 및 개인이나 신앙행위에 부당하게 간섭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국가의 출현에 따라 국가와 교회는 자주 충돌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또한 국가가 특별한 교파에 편들어 종교전쟁을 유발케 하기도 하였다. 정교분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실현되었다. 최초의 정교분리는 영국의 식민지 당시 미국의 로드아일랜드(1636년), 펜실베이니아(1682년)에서 시행되었고, 1787년 헌법에 의해 미국 전체에 확장, 적용되었다. 미국의 정교분리는 모든 교파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했고, 종교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와는 대조되는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대혁명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자연 반교회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억압하기 위해 확립한 것으로 교회에 대핸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각국은 다투어 정교분리의 원칙을 채택하였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국가든 그 형태는 달리하지만 정교분리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자칫하면 지배자 이데올로기의 이용물로 전락할 위험을 갖고 있다. 즉 지배층은 체제유지를 위해 종교의 통합기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대중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지 못하게 하고, 현실의 고통을 종교의 통합적 기능 속에 수렴하여 와해시키면서 현실의 모순과 부정을 그대롤 온존시킨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에 의해 종교가 이용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정교분리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교회가 정치에 직접 간섭함으로써 정교분리의 원칙을 파기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현대교회는 끊임없이 지상의 평화를 가로막는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고(사목헌장 77) 전쟁의 온상인 과도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함을 강조하였다(사목헌장 83). 교황 바오로 6세도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기아에 울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빈곤에 허덕이는가 … 국가나 개인의 낭비, 허영심에 가득 찬 지출, 군비경쟁은 무엇인가. 교회는 아직도 굶주리고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는 형제들의 운명에 무관심한 수 없다”(회칙 53, 74)고 강조하며 교회의 사회참여를 역설하였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실제에 있어서 지켜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교의 이상적인 관계는 완전한 분리보다는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6세를 위시하여 역대 교황들도 완전하고 철저한 정교분리를 배척하였다.

[참고문헌] Dawson, Religion and the Modern State, 1935 / Bates, Religion liberty, 1945 / Gutierez, A theology of Liberation(성염 역, 해방신학, 1972)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교봉포 [한] 正敎奉褒

중국인 학자 황백록(黃伯錄, 1830∼1909)이 저술한 중국천주교회사. 1884년 상해의 자모당(慈母堂)에서 2책(冊)으로 초간되었고 1894년 중간되었다. 초간본에서는 중국천주교회사에 대한 162항의 조목이 수록되었으나 중간본에는 5개항의 조목이 더 첨가되어 있다.

인물위주, 특히 서양선교사들의 전교활동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데 중국에 천주교가 전해진 당조(唐朝)에서부터 청조(淸朝)까지의 중국천주교회사가 당 · 원 · 명 · 청조(唐 · 元 · 明 · 淸朝)로 나뉘어 서술되어 있고 부록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선교사 108명의 이름이 라틴어와 한자어로 함께 표시되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