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본당 [한] 海州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해주시 장춘동(黃海道 海州市 長春洞). 황해도 남부에 위치한 해주는 박해시대부터 하느님의 섭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난 고장의 하나이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황해바다를 통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의 비밀해로 개척을 위해 교우 임성룡(林成龍)의 배를 타고 연평도(延坪島) · 백령도(白翎島)일대를 은밀히 돌아보다가 옹진(甕津) 앞바다의 순위도(巡威島) 근해에서 관헌에게 체포, 해주 감영(監營)에서 문초를 받은 뒤 서울로 압송되어 그 해 9월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사실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해주는 황해도 천주교인들의 순교 중심지로 다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 때 해주옥에서 순교한 17명의 천주교인 중에는 4명의 해주 교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주군에서는 1898년에 처음으로 대아골, 먹방이[檢丹面 龍峴洞], 염촌 등지에 공소가 개설되었는데 대아골은 장연군(長淵郡) 두섭[道習]본당의 파이아스(Pailhasse, 河敬朝, 가밀로) 신부 관할이고, 먹방이와 염촌은 신천군(信川郡) 청계동(淸溪洞) 본당의 빌렘(Wilhelm, 洪錫九, 요셉) 신부 관할이었다. 1899년 해주에도 빌렘 신부 관할의 공소가 개설되었고 그로부터 13년만인 1912년 9월 빌렘 신부는 청계동본당을 떠나 해주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으며, 창설 당시의 이 본당은 해주 · 옹진 · 신천 · 재령군 등지의 12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914년 빌렘 신부가 본국 프랑스로 떠나게 되자 이 본당은 후임신부를 배정받지 못하여 장연(長淵)본당 관할의 공소로 격하되었다. 1920년 해주공소는 13년 만인 1926년 행주(幸州)본당에서 전교하던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를 맞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1928년 장연본당의 보좌신부로 있던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가 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 2층 벽돌성당 신축공사를 착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29년 5월 서울 혜화동(惠化洞, 柏洞)본당으로 전임되었다. 4대 구천우(具天祐, 요셉) 신부는 1931년까지 2년간 사목하면서 전임자 서 신부가 착수한 성당 신축공사를 완료하였다. 5대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신부는 1933년까지 사목하면서 해주의 개신교회 찬양대 활동에 자극을 받아 해주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가대를 발족시켰다. 6대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가 1933년 5월에 부임, 그 이듬해 황해도 감목대리 김명제 신부를 초빙해서 신축성당의 축성 미사를 거행하였고, 1936년에는 신축 성당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1936년 5월에 부임한 7대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는 재임 중 성가대를 크게 육성 발전시켰으며, 1937년에 관할 연백군(延白郡) 일원이 분할되어 연안(延安)본당으로 독립, 1939년에는 옹진(甕津)본당이 분리 독립되었다. 1942년 8대 안학만(安學滿, 루가) 신부가 부임했으나 지병으로 별다른 활동을 못하다가 1944년 4월 별세하였다. 그 후임인 9대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 신부는 1942년 이래 성직자 부족으로 신부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던 옹진 본당신부를 겸임하였다. 8.15 광복 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끈질긴 포섭공작을 받았으나 거절,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남하기 위해 청단(靑丹)까지 왔다가 체포되어 해주 형무소에서 수감된 지 42만에 그들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7년 9월 김철규 신부는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38선 접경인 용당포(龍塘浦)에서 배를 타고 월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1948년 연길(延吉)교구 소속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가 10대 본당사제로 부임하여, 월남하는 성직자 · 수도사 · 평신도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꾸민 반공 비라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 1949년 5월 체포되어 15년 징역형을 받고 신의주(新義州) 방면으로 끌려갔다는 풍문이 있었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4.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해죄경 [한] 解罪經 [관련] 사죄경

⇒ 사죄경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해죄 [한] 解罪 [관련] 사죄2

해죄 [한] 解罪 [관련] 사죄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해외교포사목부 [한] 海外僑胞司牧部 [관련] 이주사목위원회

교포교회와 모국교회, 교포교회간의 상호 유대 강화를 목적으로 1978년 4월 7일 발족된 기구. 해외교포들에 대한 사목활동의 중요성을 인정한 주교회의는 1971년 윤공희 대주교를 교포사목 담당주교로 선정, 그 업무를 관장하게 해 오다가 1978년 박정일 주교를 담당주교로 하여 정식기구로 발족시킨 것이다. 1980년 12월 8일에는 교포사목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981년 1월 동 사목부는 회보 <해외한인교회>를 창설하였다. 그 해 가을 주교총회는 이향신자사목부와 해외교포사목부의 통합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통합시켜 이주사목위원회로 개편하였다. ⇒ 이주사목위원회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해양사목 [한] 海洋司牧 [라] opus apostolatus maris [영] apostleship of sea

특수사목의 한 분야로 바다에서 활동하는 선원들과 그 가족들을 사목대상으로 하며, 그들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고독과 불안을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극복하게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살도록 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선원들은 바다에서의 생활과 가정생활이라는 이중생활로 말미암아 가족과 친지를 떠나 사나운 바다와 싸우며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선원들을 바다로 떠나보낸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고독과 불안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교회가 이들의 고통에 눈 돌린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20년 영국의 글라스고(Glasgow)에서 평신도들이 선원들의 영적 관리를 목적으로 국제적인 단체를 창설하였다. 이 단체는 선원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행(善行)을 행하는 데, 1922년 글라스고 대주교 메킨토시(Mackintosh)의 제청에 의해 교황 비오 11세는 이 단체를 축복하고, 승인서한을 보냈다. 그 후 세계 여러 항구도시의 성당이 선원센터로 지정되어 해양사목을 담당하였고, 1952년 사도적 헌장 에 의해 로마에 총본부가 설립되었다. 1957년 교황 비오 12세는 이 조직에 필요한 일련의 법령, 회칙 및 운동지침을 발표하였고,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해양사목 전속사제들에게 특수한 보완기능들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1981년 현재에는 전세계 400여개 항구에 전속사제가 배치되게 되었고, 150개 이상의 센터나 클럽이 설치되었다. 이들 전속사제는 해마다 지역별로 만나 서로 문제점을 교환, 검토하며, 5년마다 세계대회를 갖는다. 한국에서의 해양사목은 1970년에 시작되어 사목신부를 시간제로 배치하였고, ‘바다의 별’이라는 단체를 구성하였으며. 1979년에는 메리놀회 파이퍼(Darid Pfeiffer, 한국명 파명권) 신부를 부산의 해양사목 전속사제로 임명 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