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한] 職業 [영] occupation, calling [독] Beruf

직업이란 생계를 세우기 위하여 일정한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의 종류를 말한다. 이것은 직업통계라는 방편상에서 쓰이는 의미로서의 직업의 개념이지만, 사회학적인 근거에 따르면, 직업이란 인간사회, 다시 말해 국가적 결합을 갖는 민족내부에 존재하는 분업(分業)인 것이며,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인 사회성의 요구로서, 마지막으로는 창조자인 하느님의 의지의 요구로서 나타난다.

종교적으로는, 일반적인 직업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갈래 있어서, 전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까지 들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명확한 직업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로는 전교하면서도 천막 만들기로 생계를 세워 갔는데, 그 일을 사도직의 자유를 확보하는 방도로 생각하였다(1고린 9:1-). 그러나 신앙인이 일상적인 노동을 경시하는 태도를 엄히 경계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2데살 3:6-12)는 권고가 나와 있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각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십시오”(1고린 7:20) 하는 구절인데, 이것은 신분을 가리키느냐, 직업을 가리키느냐, 또 이 권고가 어느 정도로 적극적인 내용의 것이냐 하는 점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직업이라는 외국어가 소명(召命, [영] calling, [독] Beruf)과 같은 말로써 나타내지게 된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회사(敎會史) 초기단계에선, 성직자도 감독 이외 자는 직업을 갖고 있었던 자취가 보이는데, 오히려 문제는 황제예배(皇帝禮拜) 문제에 관하여 로마황제에 시중드는 군사인 것이 정당하냐의 여부를 줄곧 논의하였는가 하면, 또한 윤리적인 관심에서 배우, 검사(劍士) 등 직업에 종사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중세교회에서는 성직제도, 수도원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직업에도 성속(聖俗)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다만, 교회는 성직만을 ‘소명’(vocatio)이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직업을 무시 또는 경시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어쨌든 간에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은 성직자를 상층으로, 일반적인 작업을 하층으로 보는, 직업의 히에라르키(hierarchy, 聖職位階)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세 후기 특히 독일 신비주의에서 이미 싹튼 사상을 이어 받은 루터(Martin Luther)는, 다시 한 번 ‘소명’이라는 용어를 모든 직업에 적용하고, 성속의 구별을 폐기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직업에 전념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다할 것을 역설하였다. 칼빈(Jean Calvin)은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의 교리에 입각하여 루터의 직업관을 더욱 철저하게 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속적인 직업도 또한 헌신 봉사의 장소라고 이해하였다. 이리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직업관의 기초가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현세와를 구별하는 루터파도, 천주님의 예정 의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내적 외적으로 기쁨을 수반하지 않는 칼빈주의적인 직업관도 다같이 가톨릭적인 직업사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톨릭적인 직업이념은 엄숙과 기쁨, 저승적 목적과 이승적 긍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있어서의 개인 개인의 직업적 노동은, 인류 공동사회의 문화창조를 위한 영역에의 참가이며,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被造物)의 모든 힘의 발전을 위한 영역에의 참가로서, 문화창조와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직업적 노동이란, 그 대상으로부터 직업의 기쁨을 받아들이게 되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목적 달성의 한 부분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합리화와 기계화의 시대에 살기 위하여는, 조직적 또는 기술적인 능력은 단순히 물질적 생산력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인간다운 노동생활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도 필요한 것이다. 현대의 경제 또는 사회발전에 적극 참여하며 정의와 사랑을 위해,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확신하도록 요청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은 “절대로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얻어,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충실하며 현세활동에 있어서 바른 질서를 보존하고 개인적 내지 사회적 생활 전체가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정신, 특히 청빈(淸貧)의 정신으로 충만해야 하겠다”고 새로운 직업관 확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직업과 관련하여 실학파(實學派)를 중심으로 한 지식층이 ‘사 · 농 · 공 · 상’의 봉건사회 계층질서의 원리를 비판하고 ‘사민일체’(士民一體)라는 새로운 질서원리를 주창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면 “사(士)는 이미 지배자가 아니고 민(民)도 역시 피지배자가 아니어서, 사가 관료로서 국정에 참여하지 않게 되며, 농업 · 공업 · 상업의 그 어느 직업이든 그의 적성에 따라 종사하고, 농 · 공 · 상민이 그들의 직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게 되면 그들 중에서도 국정에 참여하는 관료가 발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적인 사회 분화론의 경제관은 가톨릭의 평등 · 박애 · 보편 · 과학사상 등에 그 사상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당시의 가톨릭 신자들의 직종 분석에서도 나타나듯이, 많은 신자들이 상업이나 수공업 등과 같은 자연경제체제의 해체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직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밝혀지며, 특히 의료 · 학장(學長) · 풍수(風水) 등 당시의 유랑지식인의 존재가 주목할 만큼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M. Schwarz, Berufsproblem, 1923 / H. Pesch, Lehrbuch der Nationalouomie, I, Aufl. 5, 1925 / A. Pieper, Bersufsgedanke und Ber fsstand im Wirtschaftsleben, Aufl. 2, 1926 / E. Brunner, Das Gebot und die Ordnugen, 1932 / 趙珖, 辛酉迫害의 分析的考察, 敎會史硏究, 第1輯, 韓國敎會史硏究所, 1977 / 韓弘渟, 韓國社會와 가톨릭經濟倫理, 가톨릭社會科學硏究, 第1輯, 韓國가톨릭社會科學硏究會, 1983. 3 / 사목헌장, 제2부 3장 /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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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외기 [한] 織方外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Aleni, 艾儒略, 1582∼1649) 저술의 세계 인문지리서로 1623년 중국 항주(杭州)에서 6권으로 간행되었다.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명에 의해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Pantoja, 龐迪我, 1571∼1618)와 우르시스(Ursis, 熊三拔, 1575∼1620)가 편찬에 착수하여 조사, 기록해 둔 기초자료를 판토하의 사후에 알레니가 증보한 것으로 5대주(五大州)의 역사 · 기후 · 풍토 · 민속 등과 6대양(六大洋)의 해로(海路) · 산물 · 섬 및 남극(南極)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천주교 교리도 약간 다루고 있는데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구식곡(瞿式穀) 등의 서(序)를 비롯, <만국여도>(萬國輿圖), <북여지도>(北輿地圖), <남여지도>(南輿地圖) 등의 지도도 수록되어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사부(史部) 지리편(地理篇)과 ≪천학초함≫(天學初函)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17∼18세기에 전해져 실학자들에게 주로 읽혀졌는데 이익(李瀷)은 ≪직망외기 발≫(織方外紀 跋)을 써 인문지리적인 논평을 하였고, 그의 제자 신후담(愼後聃)은 이 책에 언급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비판하였다.

봉쇄적 조선 사회에 종래의 중화(中華)적 세계관을 깰 새로운 세계지리 지식을 심어주어 의식의 확대, 자아의 각성을 촉구한 세계지리서로 주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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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황 [한] 池璜

지황(?∼1795). 순교자. 세례명 사바. 일명 지홍(池洪). 전의(典醫)의 후손(後孫). 입교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최필공(崔必恭)등과 함께 교회 발전에 노력한 것으로 보아 조선 교회 초창기에 영세 입교한 것 같다.

그는 1793년 북경에 가서 40일간 체류하면서 신부영입을 위해 노력한 결과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모시고 무사히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북경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모범적인 덕행가 겸손, 그리고 두터운 신심은 중국 신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1795년 6월 28일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그날 밤으로 법정에 끌려 나가 팔와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리는 고문을 당했으나 이에 굴치 않고 용감하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에 그 날 밤으로 윤유일(尹有一)과 함께 옥안에서 장사(杖死), 순교하였다. 그의 아내 김염이(金廉伊, 안나)도 1801년 체포되어 진해(鎭海)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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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 [한] 智慧書 [라] Liber Sapientiae [영] Book of Wisdom

1. 명칭 : 성서의 그리스어 수사본들은 이 책에 ‘솔로몬의 지혜’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7-9장에서 유다인 전승이 가장 뛰어난 ‘현자’(賢者)로 일컫는, 솔로몬왕이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명칭 자체가 제기하는 저자에 관한 문제점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편집 자체도 상당히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명칭은 저자의 이름이 분명하게 명명되지 않은 무명저서에 상당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쓴 문학적 기교 및 양식을 의미하는데 불과 한 것이다. 아가, 잠언, 솔로몬의 시편과 같은 상당수 저서들의 저자도 솔로몬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불가타(Vulgata)는 지혜문학에 속한 책들 중에 이 지혜서에 견줄 만한 책이 없을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Liber Sapientiae’(지혜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W.O.E. Oesterley가 지적했듯이, 초기교회에서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음이 확실하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정의된 이후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지혜서는 성서에 속하면서 정경(正經, Canon)에 속한다. 그러나 제2경전에 모든 거룩한 성격 부여를 거부하고 극히 약소한 권위만을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을 띤 몇몇의 교회 환경권 안에서는 그렇지 못한다. 특히 개신교는 지혜서를 구약성서의 ‘외경’에 배열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몇몇 저자들, 특히 요한복음과 바울로 서간에서는 지혜서의 내용이 재현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지만 지혜서를 성서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입증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상과 교의의 영역에 있어, 신약성서의 저서들과 지혜서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혜서는 구약성서 안에 뿌리를 내리고, 구약성서의 대 주제들을 끌어 나가고 있고 그 중 어떤 것들은 새로운 계시의 벽두에까지 이끌어가고 있어 날이 갈수록 교회에 의해 선택되었다. 교부들 역시 지혜서를 사용하였다. 사도들의 가르침(Didache), 로마의 글레멘스, 헤르마스의 목자, 타치아노, 이레네오, 로마의 히폴리토, 무라토리 정경은 지혜서를 정경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 여운을 남기고 있는데, 성 예로니모는 히브리어로 된 성서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훗날 정경에서 제외해 버렸다.

2. 저자 : 그리스어로 된 저서로서 알렉산드리아 유다이즘의 저서들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저자는 일종의 자발성을 갖고 두운법(頭韻法)과 모음 압두(押頭)와 수음 중첩법(數音重疊法)을 이용하고 있어, 본래 의미에서의 저자가 아닌 번역자라고 할 때, 위 사실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이 글 속에서 셈족어법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70인역의 영향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으나 무명의 유다인이다. 저자를 예로니모는 유다인 필론(Philon)으로, 아오스딩은 시락(Sirach)의 아들로, 어떤 이는 사도 바울로의 동행인 아폴로스(Apollos)로 보는데 분명한 신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를 주시하는데 대한 그의 강조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거주민으로, 나아가 이 도시 유다인 학교의 스승으로도 생각게 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리스문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필론의 교의, 주석양식, 언어, 문체 등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필론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

3. 연대 : 분명하지는 않으나 특별히 용어와 동등한 시민권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당대 권리요구에 대한 암시(19:16)에서 연역해 낼 수 있는 다양한 표지들은 기원전 50년 이상 올라가거나, 아우구스투스(기원전 30년)에 의해 알렉산드리아가 점령된 이후 로마시기 안에서 더 내려가지 못하게 한다. 또 이 저서는 수년에 걸쳐 완성된 책으로 셋째 부분(11-19장)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전해 주는(기원전 20년) 모세의 삶과 상당량의 비교를 제시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같은 Midrash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 두 저자는 시간 속에서 그리 멀리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기원 전 초세기 중반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으며, 필론의 신약성서 저서들 이전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지만 70인역 출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본다.

4. 저작 : 문체와 주제의 다양성이 독자들에게 쉽게 당혹감을 준다. 성서적 시의 모방이 11:4절부터 점차 리듬 있는 산문 경향으로 나가는 종합문체로 대치된다. 6-10장은 지혜의 섭리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어 상당수의 학자들은 다수의 저자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지혜서 안에 나타나고 있는 용언(用言)이나 사상에 실제적인 동질성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저자의 단일성을 수호하고 있다. 또한 지혜서 전체는 동일한 문화와 문학적 개성을 엿보게 한다. 각 부분에 문체의 상이성은 단번에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사실과, 저자에게 영감(靈感)을 준 문학적 원천의 영향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1-5장은 원칙적으로 예언자들에게 근거를 두고 있어 문체가 히브리적 성격을 띠고, 6-9장은 잠언서와 함께 그리스 철학의 단편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서적 문체의 성격이 희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가 정경적(正經的) 원천에서 이미 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구약성서의 역사와는 매우 상이한 문체로 되어 있다.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2개의 양식 ① 대조 내지는 비교 : 의인(義人)들의 불사불멸의 운명은 불충한 자들의 결실 없는 삶에 상치된다. 충성스런 자들의 지상에서의 업적이 헛수고같이 보이는 모습은 불충한 자들에게 있어 풍성한 것같이 보이는 것과 반대되며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은 이집트인들의 운명과 반대된다.

② 사상의 점진적인 진보 : 저자는 점증적인 양식으로 전개해 나간다. 예를 들어 죽음에 대한 주제는 앞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1:11-13:16), 이것은 뒤이어 본문 속에서 다시 취해지거나 계발되고 있다(2:20 · 24, 3:2-3, 4:7-14). 저자는 육체적 죽음을, 때로는 영성적 죽음을, 또는 두 가지 모두의 죽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주제의 풍부함을 구사하고 있다.

5. 구조와 내용 : 3부분으로 대분될 수 있는데 각각 부분은 상이한 관심사와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① 하느님에 의한 인간 운명(1-5장) : 의인의 박해하는 악인들과 의인과의 대조 – 유다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인들이 참아 이겨내야 할 시련들은 천상에서의 영광을 준비한다. 저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정의를 실천하도록 그들을 격려한다. 약한 자식을 둔 사람보다 석녀(石女)가 낫다는 내용을 통해 악인들의 운명을 예고(3:13-4:16)하고, 의인들은 영원히 살 것이며 하느님께서 심판 날에 지켜주실 것이다(5:15-23).

② 지혜서에 대한 칭송(6:1-11:3) : 솔로몬의 입을 통해 행해지나 왕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명명되지 않고 있다. 지혜서는 실제적으로 고유한 이름을 피하고 있다(예외 : 다섯 도시 : 10:6, 홍해 10:18, 19:7). 솔로몬은 모든 왕들이 이스라엘 지혜의 교의에 눈을 뜨도록 초대하고 있으며 널리 알려지고 실천되어야 할 신비로운 실재처럼 소개한다(6:12-21). 뒤이어 지혜의 본성과 기원을 예고한다(6:22-25). 인간 조건을 지닌 솔로몬은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했고, 그의 청이 들어져 지혜는 그에게 모든 영화를 가져다준다(7:1-14). 솔로몬은 모든 앎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간청한 뒤 지혜의 소유물과 본성에 대해 점진적으로 묘사한다(7:22-8:1). 이 지혜와의 내적 친교는 하느님의 선물로서만 주어진다(8:17-21). 솔로몬은 왕으로서 자신의 직무 안에 지혜가 동참하고 신적인 뜻이 인도케 해달라고 기도한다(9:1-12). 지혜만이 이 뜻을 알기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9:13-18). 세상 기원부터 이집트 탈출까지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지혜는 역사의 지배자처럼 자신을 계시한다(10:1-11:3).

③ 출애급에 대한 묵상(11:4-19:22) : 가장 길고 먼저 것보다 더욱 내용이 뒤섞여 있으며 원칙적으로는 출애급의 재난 이야기로부터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을 비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원천적인 문제는 원수들을 처벌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이스라엘에는 호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인들을 처벌한 물은 사막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갈증을 해소해 준다(11:4-14). 나아가 사람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알맞게 처벌하신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자연숭배를 거스리는 논쟁을 예고한다(11:15-12:1). 이런 관점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살하기 전에 끔찍한 야수의 역할이 주석된다(12:2-14). 하느님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기에 그의 중용[正義]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규범으로 사용되어야 한다(12:15-22). 자연숭배 대항하는 의식은 아이러니컬한 성격을 띠고 계속 타나난다(12:23-27). 그러므로 저자는 우상숭배의 두 형태인 자연요소의 신화, 곧 자연숭배(13:1·9)와 인간 업적에 주어지는 의식, 곧 본래 의미에서의 우상숭배(13:10-14:11)를 구분한다. 나아가 우상숭배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삶의 완전한 타락을 창출한다(14:12-21). 이스라엘이 모든 위험과 우상숭배로부터 보호될 때 그 보호의 근원에 모든 저자들은 승복한다. 여기서 저자는 비교의 선을 다시 취하고 6개의 비교를 점차적으로 진전시키고 있다(16:1-14, 16:5-14, 16:15-29, 17:1-18:4, 18:5-25, 19:1-12). 이집트인들은 소돔의 거주민들보다 더욱 적대적으로 나타났기에 하느님께 처벌받는다(19:13-17). 저자는 다시 자연 요소의 이론과 비교하기 위해 출애급의 기적으로 돌아온다(19:18-21). 이 저서는 짧은 찬미가(doxologie)로 끝을 맺는다(19:22).

6. 지혜서와 헬레니즘(Hellenism) : 문체로 불 때 저자는 히브리적 특성에 고유한 병행법. 특히 반대명제에 충실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인들로부터 추리법의 기교를 배워 구약성서 정경에서는 전혀 찾을 볼 수 없는 단어를 335개나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은 70인역의 어법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비록 저자가 그리스어 번역의 단어들을 사용할지라도 그 단어들 중 일련의 단어들에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스 철학적 용어의 영향으로 이 기교적인 언어는 이스라엘인들의 종교적 사상 속에서 오래 전부터 받아들여져 오던 사상을 번역하는데 사용된다. ‘불멸’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볼 때 에피쿠로스의 영향도 묵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철학에 있어 하느님의 고유한 본성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며 불멸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 저자는 천체학의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천체학과 친밀성을 갖고 있는 것 같으나, 기존 철학들과 완전 동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지혜서의 수취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생을 준비하는 유다인 학생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면 잘 이해된다. 저자는 그들에게 헬레니즘에 의해 완전 지배되어서는 안 되고 경시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7. 교의(敎義) : 지혜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전승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으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운명에 대한 최고 지배자이시다. 그러나 저자는 하느님의 속성을 지칭하는 몇몇 개의 액센트를 주고 있다.

첫째, 저자는 가장 강조하는 하느님의 속성을 지혜로, 잠언 8:1-9과 집회서 24장에 나타나는 지혜와 동일하다. 그러나 이 지혜서 속에서,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즉 지혜의 인격화가 나타난다. 이 지혜의 기원과 본성은 그리스 철학적 용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지혜의 창조적 활동과 우주론적 역할(7:21, 8:5-6, 9:29), 하느님과의 내적 긴밀관계(8:3-4, 9:4), 전지전능성(7:23-24), 우주섭리(8:1),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자비로운 역할(1:6, 7:23), 인간에 대한 사랑(1:6·7·23) 등등. 저자는 당대의 그리스 세계를 식별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지혜에서 부여한다(7:16-21, 8:8).

궁극적으로 이 지혜는 모든 학문과 앎의 원천(7:16-21)으로, 관계되는 가르침은 신약성서가 은총에 대해 부여할 가르침에 대한 서곡처럼 형성된다. 지혜는 거룩한 자들의 마음속에 거주하고(1:4, 7:27) 하느님의 성령과 동격으로 놓여지고 있으며(1:4-7, 9:17) 하느님과의 우정을 기약하는 보물인 것이다(7:14 · 28). 하느님께서 지혜를 허락하시므로 그분께 청해야 한다(7:7 · 9). 인간이 모든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하더라도 지혜를 소유치 않으면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9:6). 지혜는 하느님의 율법을 준수케 하고, 완전한 불멸을 가져다준다(6:17-20, 8:17).

둘째, 의인들의 불멸 : 저자는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의인의 문제에 봉착하여, 순결한 영혼들이 지상에서 박해받고 하느님 곁에서 완전한 평온을 누리며 심판 날에 보상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욥이 분개해서 던진 질문들에 응답을 해준다(2:22, 3:1-9, 4:7-14, 5:15-23). 저자에게 있어 의인들에 대한 미래 보상 사상은 ‘불사’, ‘불멸’이라는 단어로써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그리스 용어들이다(1:15, 2:23, 3:4, 4:1, 6:18-19, 8:17, 15:3). 저자는 독자에게 의인들의 삶이 육체적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곁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지속된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이 지상 삶에서 일어나는 것은 천상의 삶에 대한 준비이고, 의인의 고통은 그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며 더 큰 보상을 얻게 하려는 것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지혜서는 이스라엘의 정통적 종교에 대한 충실성과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항구적인 근심, 걱정으로 이채를 띠고 있는 유다인 저서이다. 이런 점에서 지혜서에 나타난 교의 중 몇몇 개가 신약성서 안에서 발견되고(로마 1:20-23, 골로 1:12, 15:17, 히브 1:2-3). 교부들에 의해 폭넓게 인용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安秉鐵)

[참고문헌] Ancien Testament, TOB, 1977 /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Abiugdon Press / C. Larcher, Etudes sur le livre de la Sagese, Paris Gabolda 1969 / H. Cazelles, Introduction critique a l’Ancien Testament, Desclee et Cie, Pari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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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한] 指向 [라] intentio [영] intention

지성(知性)에 의하여 바람직하고 달성 가능한 목표로 제시된 어느 선(善)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의 행위. 이는 수단에 대한 고려없이 목적만을 추구하는 의지의 작용이 아니고 선에 이르는 목적뿐 아니라 그 수단까지도 의도하는 행위이다. 지향에는 현실적(actualis), 습성적(habitualis), 추정적(interpretativa), 잠재적(virtualis) 지향으로 구분된다. 현실적 지향은 개인이 어느 행위를 자유롭게 이행할 때 존재하는 것이며, 성사를 집전할 때와 같이 행위하고 있는 가운데 행위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이며 그 행위는 먼 원인이 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추상적 지향은 행위자가 특정 상황을 예측했더라면 당연히 가졌으리라고 인정되는 의지의 작용이다. 예컨대 구체적인 사정과 관련하여 어느 법 규정의 문리적 해석이 법 생활에 이익보다는 해를 끼칠 경우 입법자의 합리적 의향을 추정하여 그 법 규정을 엄격히 해석함으로써 그 주체적인 사정에 대한 적용을 배제하는 것과 같다. 잠재적 지향은 한 번 내린 의지의 결단이 행위가 진행 중에 있는 행위에 지속하여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행위자의 의식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러한 지향을 지니고 행위를 수행한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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