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교회사연구소 [한] 湖南敎會史硏究所 [영] Institute for Research of Honam Church History

1984년 5월 21일 창설. 전주시 진북동 1026의 2에 주소를 두고 있다. 1973년부터 천주가사 수집과 연구활동을 하며 교회사 사료 발굴과 정리에 힘쓰던 김진소(金眞召,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시작된 연구소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지방 교회사 특히 전라도 지방의 교회사 정리와 연구를 목적으로 토착화 연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전라도 지방 교회사의 자료 보존과 교구사 간행 및 의식교육 사업에 주력한다. 이 연구소는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면서 지방 사학가들의 공동연구와 협조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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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교학 [영] apologetics [한] 護敎學 [라] apologetica

종교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학문. 특히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도 로마 가톨릭교의 수용(受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반론과 의문에 대하여, 이성에 입각해서 교리에 그릇됨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호교학은 기초신학으로도 불린다.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기적적인 현상이나 편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근거하여 증명한다. 호교학은 신학의 한 분과이지만, 신학이 하느님의 계시를 교리의 내용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면, 호교학은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 증거의 참다운 가치를 외부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호교학의 목적은 우리를 변신론(辯神論)으로부터 신학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다. 즉 하느님에 관한 이성의 가르침에서 출발하여 교회에 의해 대변되는 신앙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역사적인 증거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고, 그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복음서야말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하느님의 사업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적수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원칙에 통하고 있음을 알고, 서로 명백한 원칙들로부터 출발하여 성실성을 가지고 반대자들에게 답변하였다. 아퀴나스는 다른 종교보다 그리스도교가 왜 우월한가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만이 현세의 즐거움 대신 신자들에게 정신적 은총과 참된 고난을 가져온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는 불가사의한 사실과 완전히 증명되는 기적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진실함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의 호교학은 중세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문예부흥기에 이르러 토론을 즐기는 추세에 따라 호교학의 싹이 터 갔다. 16세기 말엽에 나타난 교회에 관한 논문과 17세기초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진정한 교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교회라는 징표로부터 논거(論據)를 발전시키고, 교회는 논쟁에 판정을 내리는 권리와 권위를 확립하였다.

19세기는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서야말로 신빙성을 가진 역사적 문서라는 것이 강조되고, 호교학은 19세기 중엽에 비로소 그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세기 후반의 호교학은 복음서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성에 대한 증거, 그리고 역사적인 계시가 강조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성은 때로는 구약성서에서 인용되었다.

현대의 호교학은 자연과 초자연의 계시에 관한 원칙의 존재론을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칼 라너(Karl Rahner) 같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개방성(開放性)을 발전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정신적이기 때문이다. 현대 호교학은, 사람이 현실적인 질서 속에 존재하며 호교적 노력은 한 카테고리와 형태가 그 질서로부터 일어나는데 거기에 접근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존재에 대해서 개방적이요, 늘 변하기 쉽고 일시적인 현세적 질서 속에 존재하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한 안정성을 거기에 주기 때문이다.

호교학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쳐야 되는 일반적 과정은 종교문제에 가로놓인 철학적 주요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철학, 즉 이성적 작용으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지성을 갖춘 자유로운 피조물이므로 여기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의무가 우리의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종교는 자연적 종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교회는 초자연적 종교를 인간에게 가르쳐야 되는 의무를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초자연적 종교인 그리스도교로 우리를 인도해야 된다. 더구나 우리를 논리적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교회는 오직 이성만을 활용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권위를 입증하는 데 권위만을 가지고 한다면 순환론법(循環論法)에 빠져들고 만다.

이렇듯 변신론에서 신학으로, 이성에서 신앙으로, 자연종교로부터 계시종교로의 도정(道程)은 세 단계를 거쳐야 된다.

① 하느님의 계시의 증명 : 호교학은 이성에 호소하여 하느님의 적극적인 초자연적 간섭이 없으면 자연적 종교의 의무마저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계시종교의 도덕적 필요성을 깨달아, 하느님이 종교를 인간에게 알게 하는 징표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계시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이 제1단계는 하느님의 계시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긍정과 무신론의 부정은 호교학 연구의 첫 걸음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신관(神觀) 없이는 종교에 진지한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교의 증명 : 계시종교의 연구가 시작되면 곧 그리스도교의 연구가 된다. 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초월성(超越性)은 동시에 그 연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진리성의 징표로서 호교학의 제2단계로 진입한다. 즉 그리스도교와 그 창시자의 연구는 그리스도교의 현황으로부터 출발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든, 아니면 시발점에서 출발하여 현대에 이르든, 이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며, 그 종교는 신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기(傳記)인 복음서를 사서(史書) 중의 양서(良書)라는 관념으로 보아야 된다.

③ 교회론 :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교회에 의해 그의 구원사업을 이어가도록 한 사실을 알려 준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 베드로 이래 교황의 교도권 아래 연면히 그 권위를 계승하여 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칼빈주의, 독일에서는 루터계의 프로테스탄티즘이 그리스도교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 그리스도 정교회(正敎會)라고 하는 동방교회도 그리스도교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호교학은 그리스도교의 창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도가 교황이라는 자리를 만들게 하여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권위가 계승되어 온 사실을 확인한다. 즉 로마 교회의 일관된 사도전래성(使徒傳來性)을 인식케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New Catholic Encyclopedia, Washington 1966 /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79 / 日本カトリツク大辭典,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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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교대전 [한] 護敎大全 [라] Summa contra gentiles

토마스 아퀴나스가 1258년부터 1261년에 걸쳐서 지은 호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가 비이성적인 종교라고 하는 비그리스도 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이성에 바탕을 둔 종교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처음에 이성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는 진리를 열거하고 다음에는 도덕률을 포함한 한층 더 심원한 진리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신비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신비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으로써 파악할 수 없는, 즉 이성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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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교교부 [라] apologetae [영] apologists [한] 護敎敎父

2세기경 반교회적이고 적대적인 이방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방어 및 옹호, 그리고 호교적(護敎的)인 변론을 폄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고 권하는 일을 한 일련의 저작들을 말한다. 지체가 높은 식자층에서 입교자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리스도교의 존속을 위해 로마제국과 투쟁하고 있을 당시에 활동하였다. 이들은 대개 그리스철학과 언어풍토에서 성장하였는데 변증론, 대화론, 수사학 등 전통적인 이교 철학의 방식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꾀하였으며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의 그리스도교화를 시도하였다.

호교교부는 비록 크게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이론적 설명으로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첫째 그리스도교를 국가나 사회에 위협적인 종교로 파악하고 있는 황제나 치자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노력 연구하였으며, 둘째 이교사상과 그들의 우상과 미신, 신화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제시하였고, 셋째 철학의 이론적 방법, 즉 인간이성만으로는 절대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일깨우면서 인간의 한계성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이교도의 철학과 그 영향하에 있는 전반적인 사고방식 외에도 특히 유대사상과 이단사상에 거스르는 이론을 세우는 적극성을 발휘해야 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신 · 구약의 일치와 조화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기적, 신성(神性), 구약의 고고성(考古性)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근거를 논증하였다.

최초의 호교교부로는 콰드라토(Quadratus)를 들 수 있으며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순교자 유스티노(Justinus)이다. 그 외에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아리스톤(Ariston),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Theophilus),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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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본당 [한] 惠化洞本堂

1909년 서울에 들어온 독일 바이에른지방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 수사들이 백동(栢洞, 혜화동)의 3만평 땅에 수도원을 건설하자, 이 일대의 교우들은 거의 모든 성사를 이 수도원 성당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원산(元山)교구의 포교를 담당하고자 1927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결정적으로 옮기게 되자 백동 교우들은 이 수도원 성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본당설립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종현(鐘峴, 명동)본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서울에서 세 번째로 혜화동본당을 설립하였고, 초대 본당신부로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시잘레(Pierre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9년 5월 신설된 소신학교(건물은 수도원 성당을 사용) 교장신부로 전임, 2대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가 새로 부임, 수도원 부속건물인 목공소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 그 해 9월에 라리보(Adrianus Larribeau, 元亨根) 부주교는 본당 주보성인을 ‘성 베네딕토’로 정하고 강복예절을 거행한 뒤 첫 미사를 드렸다. 1936년 3대 본당 신부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가 부임 당시의 본당 주변의 신자수는 1,400명, 14개 산하공소의 신자수는 1,444명이었다. 1937년 혜화유치원 개설과 때를 같이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본당의 전교와 유치원 원아 교육수녀가 부임하였다. 당시 평신도로 장기빈(張箕彬) · 장면(張勉) · 장발(張勃) 3부자를 비롯해 박병래(朴秉來), 유홍렬(柳洪烈), 한창우(韓昌愚), 정지용(鄭芝溶) 등 유지 지식인이 많았으며, 이들은 모두 재속 성 프란치스코회(제3회) 회원들이기도 하였다. 1939년 4대 본당신부로 생제(Singer, 성재덕) 신부가 부임, 1942년 제기동(祭基洞)본당을 분리 독립시키는 한편, 1943년에는 성가수녀회 수녀원을 창설하였으며, 1944년에는 미아리(彌阿里)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분리시켰다.

1950년 11월 7대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가 부임, 1954년 숙원이던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 8대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공사를 완공, 1960년 5월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집전미사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9대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는 1965년 포천묘지(15만 7,000여평)를 조성하였다. 11대 박귀훈(朴貴勳, 요한) 신부는 1975년 성북동(城北洞)본당을 분할 독립시키면서 그 자신이 성북동 1대 본당신부로 전출하였다. 12대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는 본당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여 1975년 12월 구 사제관을 헐고 교리실을 겸한 사제관(110평)을 신축 낙성시켰고, 역시 본당 창설 50주년 기념사업으로 1977년 혜화동본당사 ≪백동반세기≫(栢洞半世紀)를 발간하였다. 1979년에는 문산(汶山)본당 돕기운동을 벌여 모금한 3,000만원을 전달하였다. 현 13대 이기명(李起明, 프란치스코) 본당 신부는 부임 직후인 1980년 수녀원(61평)을 신축하였다. 현재 본당 소유대지는 1,178평, 연건평은 564평이고, 관할구역은 이화동, 혜화동, 명륜 4동, 연건동, 와룡동, 동소문동 일부, 성북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신자수는 5,554명(1983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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