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한] 韓國天主敎平信徒使徒職協議會 [영] Lay Apostolate Council of Korea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1965년 11월 제정 반포된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의 정신에 따라 1968년 7월 창립총회와 함께 발족된 평신도들의 협의체. ‘회개와 쇄신’의 정신으로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신도들의 교회 참여에 대한 진보된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유홍렬(柳洪烈) 등의 한국대표 외 103개국의 평신도 대표들은 1967년 10월 로마에서 제3차 세계 평신도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1967년 6월 처음으로 대구 대교구(大邱大敎區)에서 ‘대구대교구액션단체협의회’가 발족되어 서정길(徐廷吉) 대주교의 인준과 함께 김영환(金永煥) 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그 뒤 1968년 5월 한국 주교회의(韓國主敎會議) 임시총회에서는 전국 평신도기구의 설치에 관하여 그 사무실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C.C.K.) 내에 둘 것과 그 외 기타 사항은 책임주교인 황민성(黃旼性) 주교에 일임한다는 원칙적인 의결을 보았다.

이에 1968년 7월 대전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에서 전국 11개 교구가 6개 전국단체의 성직자 및 평신도 대표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 창립총회를 갖고, 총재 및 회장을 비롯한 각 임원을 선출하였다. 미처 협의회의 체제가 정비되기도 전인 1968년 10월 24위 복자에 대한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됨에 따라 이를 경축하기 위한 위원회가 곧 발족되어, 1968년 10월 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순교자 유물전시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무난히 치르게 되었다. 1968년 10월 14일 한국 주교회의 정기 총회에서는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를 인준하는 한편 협의회에 건의한 한국 평신도사도직의 날 제정 등 몇 개 사항들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인식 부족으로 사목위원회 · 액션단체협의회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사도직협의회의 원의(原意)와는 달라지게 되어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적으로는 한국 정의평화위원회(韓國正義平和委員會)의 결성(1970. 8), 소데팍스(SODEPAX) 한국위원회의 결성(1971. 2)을 보았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 그리스도교개발회의 및 아시아지역 평신도 사도직운동회의 참석(1970. 7)을 비롯하여 세계평신도사무국에서 ‘교회 내에서의 대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움에 참석(1971. 3)하기도 하였다. 평신도사도직의 날 행사와 평신도들의 강론 등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과 아울러 시성시복촉진준비위원회 발족 및 협의회가 조직되지 못한 교구의 지원을 1972년 이후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평신도사도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중앙협의회와 교구협의회 또는 전국단체 간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1978년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전국기구를 폐기키로 한 때도 있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협의회는 꾸준한 활동을 전개 하였다. 각 교구마다 그 명칭과 기능 등이 일원화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침서에 따라 개편 보강토록 하였고, 1974년말에는 현재 위치한 꾸르실료회관에 독자적인 협의회 사무실을 마련하여 협의회의 활동을 지원토록 하였다. 또한 1977년에는 5인 소위원회(五人小委員會)를 구성하여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특히 1977년 이후부터는 도시와 농촌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도시에 소재한 본당과 농촌사회 속에 소재한 본당과의 자매결연을 적극 추진하였고, 신자 재교육 및 지도자 양성을 위해 1979년 8월 이후 부전기적으로 신앙대학(信仰大學)을 운영하였다. 1981년부터는 이향신자(離鄕信者) 사목위원회의 농촌본당자문위원회를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운영하기로 결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의 의식 계발이 그 어떤 활동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견지에서 피정 및 연수회를 통한 신자 재교육문제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획함과 아울러 그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 내 14개 교구에 교구별 평신도사도직 협의회가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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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 韓國天主敎中央協議會 [영] Catholic Conference of Korea

교회는 주교(主敎)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인 교구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 교회의 14개 교구는 각기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국적인 차원에서 교구간의 협력이 요청되는 공동관심사를 협의하기 위해서 전국의 주교들로 주교회의를 구성하고 있는데, 주교회의와 그 사무처가 곧 사단법인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이다.

광복이 되자 한국 천주교회는 급속히 그 교세가 신장되어 여러 교구가 연이어 증설되고,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해졌으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국에 걸친 교회사업을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높아졌다. 이에 1948년 11월 당시의 교황사절 번(Byrne, 方) 주교는 메리놀(Maryknol) 회원인 그레이그(Craig, 奇) 신부에게 이러한 협의체의 구성을 위촉하였다. 그 뒤 6.25동란으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52년에 당시의 주한교황사절 푸르스덴베르(Furstenberg) 대주교가 대구(大邱)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함으로써 다시 계속되었다. 1955년에는 그레이그 신부의 뒤를 이어 성 베네딕토회 서석태(徐錫泰) 신부가 협의회의 사무를 맡게 되어 1956년에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천주교연감≫을 출판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여러 번 조직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1959년 이전에는 한 동안 교황사절관에 소속되기도 했으나 1959년부터는 다시금 주교들의 협의체로 재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협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일반적 정의는 “전국 주교회의는 한 나라 주교들의 자발적인 협동체로서, 교육, 사회복지, 기타 전국적인 성격을 띤 사업에 있어서의 천주교의 활동을 유기화(有機化)하고 조정하고 통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사무처의 신부들은 주교들의 지휘감독 하에 사업을 연구 계획하고, 보도를 수집 발표하며, 서적 소책자 등을 발간하고, 갖가지 편의를 발전시켜 주교들께 제공한다. 이 편의들의 사용방법은 각 교구에서 주교들이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주교회의는 완전한 협의체로 운영되므로, 사무처 또한 중앙집권 기구가 아니라, 교구간의 교량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교회적 차원에서 한국교회는 아시아지역의 교회, 나아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교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대외관계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한국 천주교회의 대 정부, 대 사회의 창구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출판사를 두어, 오늘날 <회보>를 매달 1일에 발간하는 한편 월간지 <경향잡지>와 격월간지(隔月刊誌) <사목>(司牧)을 발간하고 있으며, 그 밖에 단행본과 통신교리를 수시로 간행하고 있다.

주교회의는 매년 2회의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필요시에는 임시총회를 열며, 상임위원회는 총회를 준비하고 필요 긴급시에는 총회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는데, 주교회의 의장단과 상임위원회는 의장에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부의장에 윤공희(尹恭熙) 대주교, 총무에 김남수(金南洙) 주교가 각각 맡고 있다. 또한 총회 안에는 교리(敎理), 성직(聖職), 사목(司牧), 사회(社會) 등 상설 주교위원회가 있어 관계분야에 대한 문제들을 연구 심의하여, 그 산하 전국위원회 및 단체들의 활동을 지도 감독하고 있다. 한편 특별 주교위원회를 때에 따라 구성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는 모든 업무를 지도 감독하기 위한 ‘200주년기념주교위원회’ 등이 그것이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처는 현재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의 15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은규(鄭恩圭) 신부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총재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감독 하에 많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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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한] 韓國天主敎正義平和委員會 [영] Justice and Peace Comnittee [라] Comnissio a Ju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설립되었다. 한국 주교회의에서는 가톨릭구제위원회 한국지부장인 캐롤(George Carroll, 安) 주교에게 설립을 위임, 1970년 8월 24일 대전 성모여고에서 전국 가톨릭 대표 24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초대회장에 유홍렬(柳洪烈)을 선출하였다. 한국 주교회의는 초대 총재에 황민성(黃旼性) 주교, 2대 총재에 지학순(池學淳) 주교, 3대 총재에 윤공희(尹恭熙) 주교를 각각 임명하여 지도, 육성해 왔다.

위원회는 한국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인간의 존엄과 정의, 평화를 구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체적 활동으로는 ① 국내외적으로 현존하는 심각한 위기에 관한 요인을 조사 분석하고, 그 예방책을 강구하며, ② 사회저변에 산재되어 있는 소외 민중의 애환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하는 한편 교황청과 국제기구에 청원하며, ③ 정의와 평화를 저해하는 요인에 대한 문제의식의 동질화, 또는 대중화를 위하여 전개하는 수련회, 세미나, 강연회 등을 개최하며, ④ 출판 및 유인물의 배부와 매스컴의 활용, 그리고 정보의 수집과 교환 등을 통하여 계층 간의 충돌을 피하게 하는 홍보, ⑤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충실하기 위한 봉사 등이 있다. 위원회의 산하기구로는 지역별 분회, 직능별 분회를 두고 있다.

1971년 가톨릭과 개신교 쌍방이 모여 창립한 소데팍스(SODEPAX) 한국위원회에는 이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가톨릭측 대표로 참여하였다. 1975년부터는 부정부패 · 사회부조리 척결, 인권유린 고발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정치질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1976년 소위 명동 3.1사건이라 알려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인해 가톨릭 사제 및 개신교 성직자, 저명인사 등이 구속되면서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구속자 석방을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회를 개최함으로써 신자들의 의식화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후에도 사회의 구조악에 의해 발생한 많은 사건들에 대한 실태조사, 구속자 서방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원춘사건, Y.H.사건, 광주사태에 대한 공개조사 요구, 김지하 · 김대중 등 신자들의 석방 및 연금해제 요구 등 인권유린사태에 대해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한국 민권운동사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83년 현재 총재주교에 윤공회 대주교, 회장에 유현석(변호사)이 맡고 있으며, 평신도와 사제들로 구성된 11명의 이사와 23명의 위원이 있다. 한편 매년 <뉴스레터>, <정평백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민권운동의 성격이 강하지만 아직 대중 조직화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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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 [한] 韓國天主敎殉敎者顯揚會

1946년 9월 16일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높이 현양하기 위하여 발족된 단체. 원래 1939년 9월 24일 약현본당(현 중림동) 김윤근(金允根) 신부를 중앙위원으로 하여 발족하여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당시만 하여도 종교의 본질에 어긋나는 미신적인 행동이 난무함으로써 종교의 그릇된 관념을 갖게 되어 일반대중이 종교라 하면 으레 그렇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천주교의 본질을 밝히는 데 교리상 설명이나 변론이 아니라 숭고한 ‘순교사실’로써 천주교의 본질을 밝히기 위하여 천주교순교자현양회를 발기코자 하였다. 1946년 9월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 경축행사 때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대미사를 시작으로 본회의 발회식(發會式)을 가졌다. 당시 중앙위원으로는 정원진(鄭元鎭) · 이완성(李完成) · 장금구(裝金龜) 신부 및 조종국(趙鍾國) · 장면(張勉) · 박병래(朴秉來) · 박대영(朴大英) 등 모두 7명이었으며 윤형중(尹亨重) 신부가 위원장이었다. 회원으로는 한 번에 1만원의 회비를 납부하는 유공회원, 1년에 500원을 납부하는 특별회원, 1년에 50원을 납부하는 통상회원으로 구분하고 각 회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도록 하였다. 사업으로는 우선 순교기념지를 조사할 것, 군난(窘難) 때의 유물을 수집할 것, 순교비를 건립할 것 등으로 하여 20여 종의 유물들이 접수되는 한편 많은 회비가 접수되었다. <경향잡지>에서도 이 사업을 적극 지원하여 순교자현양회 고정란을 통하여 본회의 주요 지출내역 및 기념품진열장 설치를 강조하였다. 6.25동란 후에는 유물의 유실 및 재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54년 성모성년경축대회 때 한국복자수도회와 함께 한국 가톨릭 사료전시회(史料展示會)를 개최하고, 1956년 11월에는 양화진(楊花津) 순교사적지(殉敎史蹟地)를 매입하였다. 1958년 10월에는 이효상(李孝祥)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현양회 대구지부가 결성되었지만 1960년이 지나면서 차츰 침체되어 갔다. 1963년 5월 최석우(崔奭祐) 신부가 운영책임을 맡으면서 본회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체를 갖는 동시에 전문가에 의해 학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운영되어야 함을 기본방침으로 병인년 순교자 100년제(丙寅年殉敎者百年祭), 박물관 설치, 순교사적지 확보, 교회문화재 전시, 교회고전출판 등의 사업계획을 주교회의에 건의했으나 현행대로 서울교구 산하에 소속되고 각 교구에서 필요한 현양사업을 각 교구에 일임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본회는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다만 본회에서 제의했던 병인순교 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각 교구에서 복자성당(福者聖當)이 건립되고 서울교구에서는 양화진순교기념성당과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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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위원회 [한] 韓國天主敎殉敎者顯揚委員會

신앙을 증거하다 죽음을 맞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얼과 뜻을 기리고 현양하여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 신앙의 모범을 제시한다는 취지 아래 발족된 단체. 원래 순교자 현양사업은 1946년에 결성된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에서 추진해왔으나 1970년대 이후 그 활동이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서울 대교구가 교구차원에서 이 사업을 추진키로 하면서 1983년 6월 30일에 발족한 단체가 바로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이다. 이 위원회는 발족과 동시에 ‘순교기념지와 교회사적지 확보 및 개발’, ‘순교자 기념박물관과 기념성당 운영 및 지원’, ‘순교자의 유물과 관계자료 수집 · 보존 · 연구’, ‘시성시복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으로 확정하고 우선 서소문에 순교기념비를 건립하고, 황사영의 묘소를 개발하는 한편, 새남터의 재개발에도 착수하였다. 이로써 순교자 현양 및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은 이 위원회가 계획, 조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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