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톨릭문학 [한] 韓國~文學

한국 가톨릭 문학은 1860년대초에 조선조 실학파(實學派) 계열 학자들이 스스로 중국 북경(北京)에 왕래하며 당시 그곳에 이미 들어와 있던 가톨릭(Catholic)교, 동양에 번역된 이름으로는 천주교(天主敎)를 배워 들여온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민족은 고대에 토착신앙으로 샤머니즘을 지녀 왔으며 뒤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외국으로부터 들어와 한국 민족의 생활풍토에 융합되어 문화와 사상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천주교 신앙은 이 재래의 문화에 소통되고 접합(接合)되는 양상 안에서 존재 의의가 드러나게 된다. 샤머니즘은 나름대로 천신계(天神系) 국조(國祖) 의식과 제천(祭天) 행사를 통해 천심과 민심의 만남을 의식하였다. 불교는 영겁(永劫)의 사상을, 유고는 이기설(理氣說)로써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면이 있다. 조선조 천주교회 창설운동의 지도자였던 이벽(李檗)은 유교에 통달한 학자로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유교가 천주교의 신관(神觀) 내지 우주관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유교는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설을 통해 ‘보편’과 ‘영원’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일반윤리로 충효(忠孝)를 중시하는 바, 이러한 요소들이 천주교의 교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조선조 시대에 종교들이 민중 속에 소통되는 양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불교는 그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높은 수준의 달관(達觀)과 어려운 선문답(禪問答)이 개재되어야 하였다. 유교 그리고 실학까지도 한자(漢字) 대한 이해력이 있는 사대부(士大夫) 즉 양반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이르러 진리는 대중 속에 소통되어 들어갔다. 위로는 국왕(國王)을 초월하여 ‘만물(萬物)을 내신’ 한 분 창조주를 사랑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을 자기같이 사랑하며, 국왕으로서는 헤아리지 못하는 양심법(良心法)을 명시하며, 미신적 뭇 역신(疫神)에 의한 공포를 배제하고 악의 유혹을 극복하도록 가르쳤다.

여기서 우주의 참된 진리와 인간 구령(救靈)의 길이 학자와 평민 일반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진리의 생활화가 계급을 초월하여 대중의 바닥에 침투되었을 때 정치 세력들 사이의 분쟁과 편견에 의한 신앙 박해에 맞서 무려 1만여명의 순교자를 내는 역사적 이변이 생길 수 있었다.

이 천주교 신앙의 전파 과정에서 한국 문학사(文學史)에 한 장르를 차지할 만한 천주가사들이 나타났다. 이벽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정약전(丁若銓)의 <십계명가>(十誡命歌), 이가환(李家煥)의 <경세가>(警世歌), 최양업(崔良業)의 <사향가>(思鄕歌), <천당이라>, 조호식(趙顥植)의 <금침가>(金鍼歌), 김낙호(金樂浩)의 <자신책가>(自身嘖歌)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있다. 최양업 신부 개인의 작품만도 20여 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 4조(調) 2음보(音步)로 조선조 후기가사(後期歌辭) 형식에 한글로 된 이 천주가사들은 서민 대중 속에 쉽게 소통되어 들어갔다. 그 내용은 교회 개척기와 박해기에는 호교(護敎)와 순교의 정신을 내포하면서 정돈되고 세련된 언어 구사를 보여 준다.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이렇게 시작하는 <사향가>와 “가사이다 가사이다 천당으로 가사이다 / 천당은 어디던고 만복지소 여기로다” 이러한 능란한 표현을 담고 있는 <천당이라> 등이 교리 · 묵상 · 노랫가락인 동시에 시로서 대중 속에 전파되었다. 천주가사는 1910년대 이후까지도 창작되고 소통되었는데, 개항(開港)과 더불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후에는 천주가사의 내용이 호교정신을 벗어나 사회 대중 속에서 자신의 신앙 자세를 반성하는 데까지 이른다. “외교인중(外敎人中) 어떤사람 / 천주도리 모르건만 / 하는행위 살펴보면 / 내게비겨 초월하다”(<자신책가>). 이와 같은 자아비판 의식까지 이르면 천주가사가 오히려 사회 안에 활성화될 가능성도 지녔던 것이다. 박해시절의 산문문학 유산으로는 이 루갈다의 ‘옥중서한’(獄中書翰)이 조선의 세련된 규방문학(閨房文學) 문체로 평가되기도 한다.

1900년대 초에는 일본을 통해 서구의 문예 장르와 기법들이 밀려 들어와 재래 한국문학 장르들이 외형상 변모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1906년에 <경향신문>을, 1909년에는 <경향잡지>를 창간하여 천주가사류를 계속 게재 발표하였으며, 윤의병(尹義炳) 신부 작으로 박해시대 르포소설 형식인 ≪은화≫(隱花)을 연재하였다. 1933년에는 천주교회의 대사회(對社會) 문화매체로서 <가톨릭 청년>이 창간되는데 이 잡지의 문예란을 통해 정지용(鄭芝溶) · 최민순(崔玟順) · 윤형중(尹亨重) · 이효상(李孝祥) 등이 시 · 소설 · 수필을 발표하고, 이동구(李東九)가 가톨릭 문예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지용은 당시 문단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임종>(臨終), <은혜>, <갈닐레아 바다>, <또하나 다른 태양>을 비롯하여 가톨릭 신앙을 주제로 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나의 임종하는 밤은 /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 나종 죄를 들으신 신부(神父)는 / 거룩한 산파(産婆)처럼 나의 영혼을 갈르시라. / 나의 평생이요 나종인 괴롬! / 사랑의 백금(白金) 도가니에 불이 되라”(<임종>에서). 이러한 정치용의 시는 그가 종래에 향토적 서정시인이었다가 모더니즘 시로 자리를 옮기는 변모에 일치된다. 그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자로서 유치한(柳致環) · 신석정(辛夕汀) · 김기림(金起林) · 이상(李箱) 등 비신자 시인들에게도 작품 발표지면을 많이 제공하여 교회로 하여금 일반 문화계에 기여케 하였다. 정지용 · 김기림 등이 중심이 된 당시의 모더니즘 운동은 세계 문명의 장래가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가톨릭 창년>지는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파시즘 동맹권이 2차 세계대전으로 자유에 대한 폭압을 가중하자 1930년대 모더니즘의 시에는 언어의 세련만이 남고, 시에 역사상과 대중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무렵의 가톨릭 문예비평으로는 이동구의 <가톨릭 문학을 어떻게 취급할까>, <종교와 시 - 뿔 끌로뗄>, 최민순의 <프랑소아 모리악의 소설론> 등이 발표되었다.

이 일제시대부터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지에 글을 발표해 오던 윤형중, 최민순 두 신부는 뒤에 자신들의 시집을 묶어 내게 된다. 윤형중의 <사말(四末)의 노래>는 신앙 도리를 읊은 것이지만 한국 민요의 3음보 율격(律格)에 의탁한 것이 이채롭다. 최민순의 시집 ≪님≫, ≪밤≫ 등은 또한 자유시 형식으로 다채롭게 쓰여졌다. 두 성직자가 모두 광복 이후의 한국 문화계에서 활동한 문학인이기도 하였다.

1945년의 8.15광복 이후 1980년대 초까지의 한국문단에서 가톨릭 신자 문학인의 수는 가톨릭 인구의 대폭적인 증대에 따라 전국적으로 100여명을 넘게 되었다. 이 중에서 비교적 두드러지게 작품 활동을 해 온 이들을 보면, 시 부문에서 구상(具常) · 김남조(金南祚) · 홍윤숙(洪允淑) · 성찬경(成贊慶) · 김지하(金芝河), 소설에서 한무숙(韓戊淑), 아동문학에서 마해송(馬海松) · 박홍근(朴洪根) 등이다.

시인 구상은 한국 현대 문단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의 경지를 숙고하며, 한국 재래의 시가 자연서정(自然抒情)과 생활감정을 중심으로 함에 비해 회의와 고뇌를 통한 존재 인식에 이르고자 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 노상 무심히 보아 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 세삼 놀라웁고 / 창밖울타리 한구석 /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 사뭇 황홀합니다. / 창창(蒼蒼)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 실상으로 깨닫습니다”(<말씀의 실상>).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서의 화법을 연상케 한다. 또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므로 이 말을 다루는 시인은 사제(司祭)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한 것을 연상케 한다. 마치 사제와 같은 견지에서 시인 구상은 세속의 관념들이 원수 또는 죄인으로 규정하는 대상들에 대해 개방적으로 사랑을 표시한다. 그는 유물론적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현장에서 공산군 전사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며 통곡한다(<초토의 시> 7). 그러면서도 또 때때로 ‘무명(無明)과 허무(虛無)’에 갇혀 회의하고 고뇌함은 그의 사유(思惟)가 단순할 수 없으며 특히 동양적 사유의 심원(深遠)한 경지에도 눈길을 주고 있는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고뇌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 어떻게 일치하게 되는지는 현대 가톨릭 문학의 탐구 주제로 대두된다.

소설 부문에서 한무숙은 가톨릭적 사유의 외형은 드러내지 않으나 인간구원의 주제와 예술가적 장인의식(匠人意識)을 가지고 정신적 깊이가 담긴 소설들을 쓴다. 이 작가가 <감정이 있는 심연(深淵)>에서 섬세하게 추구한 어떤 ‘의미’의 문제, <어둠에 갇힌 불꽃들>에서 맹인 소녀 안나가 곁에서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도 불평이 있어요?”한 발언에서 독자가 삶과 구원에 관한 어떤 충격적인 일깨움을 받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한 감각이라든가 감수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깊이에서 한국 현대문단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

현대 한국인의 삶의 자리인 사회현실은 종래의 서구 가톨릭 문학이 지녔던 주제와 성과로써 충족되지 못한다. 여기에는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있다. 그것은 민족 공동체로서의 수난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문학에 가톨릭의 정신과 원리들이 문예 원리로 대입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 현대 한국 가톨릭 문학의 새 지표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지향에서 이미 지표 형성 노력은 시작되어 있다.

① 예술의 공리성(功利性) 시비에 대해 : “문학과 예술은 인간 본연의 자질과, 자신 및 세계를 이해하고 완성시키는 데에 요구되는 인간의 과제와 체험을 표현하며, 역사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발견하고, 인간의 보다 나은 운명을 개척하려고 노력한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62). 여기에서 창조와 완성의 의도로서 공리성이 인정된다.

② 분석주의 이론의 한계 : “현대의 분석주의 인문학은 학문을 빙자하여 인간전체를 이해할 수 없게 한다”(행동에의 부름, 38). 여기에서 분석주의 비평, 예로서 뉴크리티시즘과 더 나아가서는 구조주의까지도 일정한 한계를 지님이 지적된다.

③ 가치의 순위의식 : “언제나 가치의 차례에 대한 인식을 명백히, 생생하게 가져라”(어머니와 교사, 245). 창작과 비평의 실제에서 작중 인물들과 가치관에 있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점을 판별하도록 일깨운다.

④ 개발도상국의 정신적 가치 : “경제적 개발도상국 국민들은 묵은 전통으로 말미암아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간 가치’를 아직도 생생하게 인식하며 보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요소가 장차 진정한 문명의 기초가 되게 해야 한다”(어머니와 교사, 176). 이러한 지적은 현대 제3세계 문화운동 및 문예 작업을 고무하고 높이 평가하게 한다. 이러한 관찰은 1970년대의 한 문학평론을 통해 제시되었다(구중서, <한국사회 속의 가톨릭 문학인>에서).

1980년대의 한국 문학 안에서는 이른바 사회참여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계열로부터 신기할 만큼 ‘화해’와 ‘구원’의 목표가 제기되었다. 이 목표들까지가 진정한 리얼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와 ‘구원’의 원리에 배우 일치해 있는 것이 또한 가톨리시즘이다. 이 점에서 한국 현대 가톨릭 문학은 새로운 과제와 사명을 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보게 된다. (具仲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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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농민회 [한] 韓國∼農民會 [영] Korean Catholic Famers’ Movement [관련] 가톨릭농민회

1966년에 창립된 한국의 가톨릭 농민운동단체. 가톨릭 농민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믿음으로 깨어나는 농민들이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민 자신과 사회를 누룩처럼 변혁시켜 감으로써, 농민구원 · 겨레구원 · 인류구원을 지향하는 생활공동체 운동이다. 따라서 가톨릭 농민운동은 농민 안팎에 온갖 반(反)인간적 · 반공동체적 · 반생명적인 ‘세상의 죄’와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대결을 벌이면서, 인간답고 공동체다운 세계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농민들의 삶의 표현이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권익을 옹호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신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회칙 제3조).

1. 활동과제 : ① 현장활동 : 삶의 현장인 마을에서 부락민의 일상적 요구에 응답하면서, 마을을 생활공동체로 변화시킨다. 경제적 협동활동(생산, 소비, 유통, 신용, 이용 등의 협동화), ② 문화활동(생산과 문화, 일과 놀이와 전례의 일치를 시도함으로써 인간다운 공동체문화의 회복 및 창조), 봉사활동(특히 소외된 이웃과 고락을 나눔), 권익활동(반농민적 지배 등에 저항하며 농민 권익 옹호에 앞장섬), 마을민주화활동(평등구현 및 마을자치역량을 키움), 건강활동(무공해 농사 실천으로 땅과 식탁 살리기, 자연요법 개발 및 보급, 반공해활동 등), 연대활동(농촌 및 도시공동체와의 생활연대) 등을 추진한다. ③ 정책활동 : 농민을 비인간화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없애는 활동을 통해, 공동선(共同善)을 확장시킨다. 농지제도 개선 활동, 농축산물 가격보장 활동, 농민조합의 민주화활동, 부당한 농업세제시정활동 등을 추진한다. 현장활동과 정책활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운동의 저항성과 공동체성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2. 조직 : 조직 형태는, ‘분회’(마을, 공소단위) ⇒ ‘지역협의회’(생활권, 본당단위) ⇒ ‘연합회’(도, 교구단위) ⇒ ‘전국본부’(대의원총회, 회장단, 이사회, 감사회, 사무국)이다. 조직 운영은 다음과 같다.

3. 활동약사 : ① 태동기(1964. 10∼1971년)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농촌청년부로 출발해서 1966년 10월에 창립된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J.A.C)는, 농촌청년 중심으로 모범생활, 모범농사 등을 통한 마을 환경의 변화를 추구했으며, 주로 생활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농업 희생이 강요되기 시작한 1, 2차 경제개발계회(1962∼1971년)의 추진, 3선 개헌(1969년), 비상사태 선포(1971년) 등으로 나타남 권력독점의 심화, 농민개인과 정치경제 사회구조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한, 모범농촌청년, 모범농장도 불가능함을 인식, 농촌청년만으로는 농민문제 해결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여 운동의 새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가톨릭농민국제연맹’(M.I.J.A.R.C)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② 성장기(1972∼1980. 5. 17) : 자본주의의 농업 · 농민문제를 발견하고, 농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업 · 농민문제를 해결하는 새 운동방향을 확정, 1972년 1월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칭하면서 범농민운동체로 새출발하였다. 유신헌법(1972년) 긴급조치시대, 저노임 · 저곡가를 강제한 경제정책 강행 등으로 대외 의존이 심화되면서 기층국민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2차 경제개발계획에는 명목상으로나마 ‘식량자급’ 정책이 있었으나, 3차에는 ‘주곡자립’으로, 4차에는 ‘생산기반확충’으로 뒷걸음질 쳐 적자농사, 농가부채의 급증, 대량이농 등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1974년 민간단체로서는 최초의 ‘농지임차관계조사’를 통해 토지문제를 제기했으며(소작농 29.1%, 부재지주 39.8% 등), 1975년부터 쌀생산비 조사를 통한 농산물 가격 보장활동을 하였다. 현장에서 또는 전국단위로 외곡수입 반대운동, 강제농정 시정활동, 부당농지세 시정활동, 농협민주화활동 등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농협이 고구마 계약수매를 이행치 않음으로써 발단된 ‘함평 고구마사건’(1976∼1978)은, 사건 발생 2년 만에 농민의 승리로 끝났고, 이를 계기로 농협의 고구마 수매 80억원 부정이 폭로되었다. 또한 감자 계약수매 불이행으로 발단된 ‘안동 농민회사건’(세칭 오원춘사건, 1979년)은 숱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농민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두 사건은, 농민운동사에 길이 기억될 사례이다. 10.26사태 후,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전국 농민대회’, ‘농민관계법령공청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 ‘국제가톨릭농촌단체연합회’(I.C.R.A)에 가입하였고 1976년 가톨릭농민회 10주년기념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③ 성숙을 지향하며(1980. 5.17 이후∼1983년) : 농민의 복리를 위한 국내유일의 농민운동체로서 1970년대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운동의 미성숙함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운동의 역사성, 운동의 생명성의 결함을 깊이 성찰하면서 농민구원 · 겨레구원 · 인류구원 · 우주구원을 하나로 꿰뚫는 성숙한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그 새 출발을 시도하였다. ‘농촌사회의 민주화’, ‘공동체 삶의 실천’이 활동목표이다. 1981년 대전에 농민회관이 건립되었고, 1982년 충북 음성에서 ‘부당농지세 시정을 위한 농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농지임대차양성화 저지활동(1982년), 전국 천주교 농촌공소실태조사(1982∼1983년), ‘농협조합장 직선제실시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1983년) 등을 추진하였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이 땅 이 겨레에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고자, 그리하여 모두가 하나 되고자, 공동체적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대결과 건설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를 따르고자 전력하고 있다. (⇒) 가톨릭농민회 (鄭鎬庚)

[참고문헌] 한국가톨릭 농민회 보고서, 1966∼1983 / 농촌청년, 회지, 1968∼1974 / 농민회활동 사례집, 1, 2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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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한] 韓國∼勞動靑年會 [영] Korean Young Christian Workers(약칭 J.O.C.)

1. 설립목적 :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청년노동자들의 자발적 주체적인 운동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청년노동자의 전인적(全人的) 지속적 교육에 참여하고 노동계에 복음을 전도하며 정의와 사랑과 희망을 전파하고 실현하고자 한다.

2. 약사와 활동 : 가톨릭노동청년회(이하 한국 J.O.C.)는 1958년 1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간호원 10명이 J.O.C.에 관한 소개 책자를 연구하다가 당시 가톨릭 신학대학 교수인 박성종(朴成鍾, 프란치스코) 신부를 지도신부로 회합을 갖게 된 데서 출발하였다. 그 뒤 한국을 방문한 J.O.C. 창설자 조셉 카르딘 주교의 주례로 11월 17일 명동 대성당에서 첫 투사선서식과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투사 9명이 처음으로 탄생하여 섹션(팀)을 조직하고 각 본당과 직장에 조직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 12월 20일 서울교구 연합회가 결성되었고, 1961년부터는 점차 지방교구로 확장되어 10월 21일 서울 · 대구 · 전주 · 대전교구의 남녀 대표들로써 전국평의회가 조직되었다. 이 해 11월 2일에는 한국 주교회의에서 정식으로 가톨릭 평신도사도 단체로 인준을 받는 한편,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도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한국 J.O.C.의 초기 활동은 빈민촌 무료진료를 비롯하여 근로재건대 활동, 윤락여성 선도, 노동자를 위한 실비식당 운영, 서독파견 광부들을 위한 활동, 해외 이민문제에 대한 대책에 대한 활동, 가정부 생활실태조사 등이었다.

1964년에는 수원교구와 인천교구 연합회가 발족되어 한국 J.O.C.가 9개 교구로 확장되었고, 1965년 1월에는 성인 J.O.C. 팀이 발족되어 뒤에 가톨릭노동장년회(M.O.F.C.)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65년 10월 제5차 전국평의회에서 J.O.C. 농촌부를 창설하였다가 다시 1966년 8월 제6차 전국평의회에서 가톨릭 농촌청년회(J.A.C.)로 독립되어 농촌실정에 맞는 청년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였다(그 뒤 1972년 4월 한국가톨릭농민회로 재발족함). 또한 1966년 10월에는 춘천교구 연합회에서 원주교구 연합회가 분리, 독립하였다.

이 당시는 5.16후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정책의 수행과정에서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노사문제(勞使問題) 등 각종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이에 따라 한국 J.O.C.의 활동도 각 산업체의 노동조합 결성,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 활동, 직업여성 실태조사, 노동강좌, 버스 안내양 교육, 이향노동자 상담활동 등 노동자들의 인권신장과 복지향상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1968년 1월 경기도 강화에 있는 심도직물에서 J.O.C.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노동조합과 J.O.C.를 회사측이 탄압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J.O.C.는 물론 한구주교단이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리 옹호를 위한 성명서’와 공동교서 등을 발표하는 등 단호히 대처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였다. 이 사건은 그 뒤 한국 J.O.C.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전기가 되었고, 또한 한국교회가 인권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케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J.O.C.는 회원들에 대한 의식계발과 자질향상을 위한 교육훈련과 아울러 1971년 이향노동자상담소를 설치하여, 뒤에 노동문제상담소로 정식 발족케 하였다. 또한 한국 J.O.C.는 영창실업 사건(1971년), 동일방직 사건, 삼립식품 사건, 한국모방 사건, 태광산업 사건(이상 1972년), 삼립식품 사건, 광진섬유 사건(이상 1973년) 등을 통하여 노동자의 인권을 수호하고 신장하며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한국 J.O.C.는 정부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고, J.O.C.회원들은 직장에서 부당한 부서 이동, 출근 정지는 물론 심지어는 해고를 당하는 등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탄압은 유신체제 말기인 1970년대말까지 계속되었고, 10.26사태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선 뒤로는 더욱 심해졌다. 즉 신문 · 방송 등 매스컴은 J.O.C.를 불순단체로 왜곡한 선전을 계속하는 한편 1982년 한 해에만도 풍산실업 사건, 태창메리야스 사건, 코리아 스파이스 사건, 무궁화 메리야스 사건 등 J.O.C. 회원과 노동조합에 대한 차별대우, 부당한 해고 등 탄압 사례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 J.O.C.는 ‘비인간적 상황의 인간화’, ‘노동자들의 단결의식 강화’를 목표로 회원들의 의식계발 교육과 회원 · 노동자들의 개별적 분야별 조직 확대, 핵심 지도자 양성, 특히 지도투사의 자질 향상 J.O.C. 내적 역량 축적 등에 힘썼다. 이와 함께 한국 J.O.C.는 마산 수출자유지역 실태조사 및 체불임금 지불요구 활동, 이향노동자 실태조사(1983년) 및 대책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의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개선을 촉구하였다. 또한 구체적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할 때마다 이에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꾸준히 벌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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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노동장년회 [한] 韓國∼勞動壯年會 [영] Christian Workers Movement

1968년 한국 성인(成人) 그리스도교 노동운동을 위하여 발족된 평신도 단체.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동을 못하게 된 장년층 회원들이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면서 1964년 서울에서 그 모임이 시작되었고, 1967년에 발족한 수원 · 대전 · 대구 · 부산교구팀과 함께 1968년 8월 전국연합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중간관리층과 소규모 기업주가 주요 회원이었기 때문에 노동자 자신들의 문제를 실제로 다루지 못하고 본질적인 면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1971년까지 공백상태였다가 1971년 가을 안양 근로자회관에서 재결합되었다. 그 뒤 싱가포르, 일본 등과의 국제교류를 비롯하여 1979년 프랑스에서의 정기총회에 처음 참석함과 동시에 아시아집행위원국이 됨으로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국제가톨릭노동장년회는 1966년 5월 교황 바오로 6세의 윤허와 함께 발족하여 세계 그리스도교노동자 운동체들의 방향 및 실천을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그 본부를 벨기에 브뤼셀에 두고 있고, 한국본부는 서울 도림동(道林洞)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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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한] 韓國∼癩事業家聯合會 [영] Catholic Leprosy Workers Association of Korea

나병으로 신음하는 형제들의 자립 갱생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 1967년 10월 18일 발족된 연합회. 1968년 5월 한국 주교회의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주요 사업내용으로는 신용조합 육성을 통한 자활 지원, 부랑나환자들을 위한 정착마을 지원, 환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 등으로 전국 37개의 정착마을과 3개의 불구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운영 지원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비롯한 11개 수도단체와 가톨릭피부과병원 등 11개 회원기관들이 진료와 정착사업을 돕고 있다. 1984년 현재 제5대 회장으로 이경재(李庚宰) 신부가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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