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 [한] 丁亥迫害

1827년(丁亥年) 전라도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尙州),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지역에 일어난 박해. 1801년 신유(辛酉)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乙亥)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정하상(丁夏祥)을 주임으로 교회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6년 일본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우리나라에 서신을 보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도망친 6명의 천주교인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 관헌들의 천주교인 밀고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정해박해는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포졸들이 경상도의 상주에서 신태보(申太甫)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의 단양(丹陽)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忠州)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 이일언(李日彦) · 정태봉(鄭太奉)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朴甫祿) · 김사건(金思建) · 김언우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명중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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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 [한] 丁夏祥 [관련] 기해박해 정약종

정하상(1795∼1839). 성인. 축일은 9월 20일. 본관은 나주(羅州),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柳∼)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情惠)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峴, 京畿道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 마재부락]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 집에 의지하며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왕국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 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인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전교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Brugiere) 주교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마침내 1931년 9월 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로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로 장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의 극(極)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 기해박해, 정약종 (李元淳)

[참고문헌]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鞫案 / 右捕盜廳謄錄 / 憲宗實錄 /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 A. Launay 原著, 安應烈 譯, 한국 79위 순교복자전, 京鄕雜誌社,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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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봉 [한] 鄭太奉

정태봉(1795∼1839).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충청도 덕산(德山)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그 뒤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게 되자 1824년 내포(內浦) 지방을 떠난 전라도 용담(龍潭)에 정착,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순교(殉敎)하기를 원하여 가끔 자신의 턱을 도마에 갖다 대고 참수(斬首)당하는 연습을 하곤 하였다. 1827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용담 아문(衙門)에서 심문과 형벌을 받은 뒤 전주(全州)로 압송되었고 전주감영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난 의정부(議政府)에서 사형선고를 확정판결을 내리지 않아 전주옥에서 12년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 여파로 사형이 확정되어 이해 5월 29일(음 4월 17일) 그 동안 함께 옥살이했던 이일언(李日彦), 신태보(申太甫), 이태권(李太權), 김대권(金大權) 등과 함께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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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한] 政治神學 [영] political theology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신학의 한 흐름으로, 신앙의 제재(題材)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을 가리킨다. 정치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전개한 사람들은 메츠(J.B. Metz), 몰트만(J. Moltman), 콕스(H. Cox) 등이다. 이들은 이전까지 신학이 사회와는 단절된 개인의 신앙만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앙이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하여 신앙의 실천이 사회와는 무관한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어 왔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은 사회와 밀접히 결속되어 있는 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신학은 올바른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신앙에 함축되어 있는 정치적인 역량을 개발하여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정치신학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종말론적인 약속들, 예컨대 정의, 자유, 평화, 화해 등을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 교인들은 사회의 온갖 구조악과 맞서 싸워 이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구원에 동참하는 행위임을 정치신학자들은 신앙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신학자들은 정치와 신앙을 혼동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신앙인인 살아가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현실에 책임을 지는 신학일 따름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은 서유럽 신학자들에 의해 태동한 정치신학은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차별받는 흑인들에게 수용되어 흑인신학으로,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가 해방신학으로, 여성운동가들에게 수용되어 여성신학으로 발전되어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신학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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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한] 政治 [영] politics [관련] 권력

정치라는 현상은 본래 인간의 사회성 또는 공동체성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홀로 외롭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고 타인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 여기에 인간은 타인과의 어떠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인간관계는 서로 협력하고 상조하고 사랑을 나누는 우호적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서 서로 분열하고 다투고 투쟁하는 관계가 될 수가 있다. 여기서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개인 또는 집단사이에 조화를 이루고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할 필요가 생긴다.

정치는 바로 인간관계의 조정이 그 목적이다.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힘과 조정기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국가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집권자(군주 · 국왕 · 황제 · 대통령)다. 따라서 집권자는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력의 정치사는 집권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인간을 억압하고 압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환언하면 정치권력의 본질적 가치를 전도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았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때로는 정치권력과 화합하고 때로는 대립하여 왔다. 정칙권력이 교회의 독자적 존재를 옹호하고 교회활동을 보장하고 교회의 자주특권을 인정할 때는 정치권력과 협력하였으며 정치권력이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거나 간섭할 때는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였다. 정치권력이 교회를 억압함으로써 국가권력과 교회가 서로 투쟁한 대표적인 경우가 초대 교회였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초대 교회는 정부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았다. 로마의 군주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에 반항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간주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살해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국사범이나 대죄인에게만 지워지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에도 약 300년간 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가 반체제적 집단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과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투쟁은 부정과 불의에 대한 진리와 정의의 투쟁이었다.

교회와 정치권력이 서로 협력하고 공존한 시대는 중세교회였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황제가 됨으로써 교회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로마의 평화로 번영을 이룩하는데 공헌하였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 교회의 권위가 정치적 권력보다도 우위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지나치게 강화됨으로써 교회 자체가 세속적 문제에까지 간섭하여 복잡한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근대초기에 와서도 교회는 정치권력과 야합함으로써 특권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사회문제를 외면하여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못하여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치와 교회는 서로 독자성을 존중하면서 공존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정치와 교회가 나라에 따라 상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톨릭 교회는 인류 구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정치의 본질과 목적과 사명에 대해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교회의 기본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레오 13세는 “정치권력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공익을 위하여 그것을 행사해야 하며 공익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지막 법이다”라고 말하였고, 비오 11세는 “통치자는 사회구성원을 보호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정의에 합당해야 한다. 따라서 정의가 없는 곳에는 정당한 정치권력도 없다. 부정한 법이 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의 본질은 힘의 균형에 의해서 정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를 위협하는 위기는 부단히 계속되므로 폭력으로 정의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정치권력은 부단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정치권력은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해야 한다. 공동선은 개인과 가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의 법에 맞고 값있고 행복한 생활을 쉽게 할 수 있는 정상적이며 안정된 공적 조건의 실현을 말한다. 이 공익은 국가의 목적이며 규준이다. 따라서 국가의 숭고한 특권, 즉 정치권력의 사명은 국민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활동을 조절하고 또한 원조해서 이들을 조화 있게 공동선으로 합류시키는 데 있다(비오 12세). 공익은 멋대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 번영을 그 최고법칙으로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조화적 발달, 자연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공동선은 공동생활에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 질서 있게 상호 상통하느냐 하는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정치공동체의 시민들과 공권력간의 관계를 조정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어떤 방법으로 개인과 정치 공동체가 상호간에 상호 조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과 단체들은 공동선을 위하여 해당된 공헌을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의 권익을 타인의 권익과 조화시켜야하고 이러한 목적으로 자기의 재물과 노력을 제공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은 정치권력이 한 시민으로 하여금 용이하게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성이 요구하는 것은 국가의 위정자들이 시민들의 권리를 조정하고 보호함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개인이나 사회단체의 권리에 치중한 나머지 그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인간다운 정치활동을 확립하려면 저의와 선의의 공동선에 봉사하려는 정신을 길러주고 정치 공동체의 성격, 공권의 목적, 그 바른 행사, 그 한계 등에 관한 기본적 신념을 확립해야 한다. 요컨대 공동선은 개인이나 단체로 하여금 질서 있는 협동에 의하여 하느님이 바라는 뜻을 위해서 노력하게 할 수 있는 제도나 상태를 말한다.

공동선의 첫째 특성은 재분배하고 하는 것이다. 공동선은 모든 인간에 재분배되어야 할 것이며 모든 인간의 발전을 조장시켜야 한다. 둘째 특성은 공동선은 정치권력의 기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공동체를 공동선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 가운데 특정한 사람이 그 책임자가 되어야 하며 그 사람이 내린 명령이나 결정은 공동체 구성원이 지키도록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복지를 목표로 하는 정치권력은 특수선을 위하여 행사하는 독재권력과는 다르다. 셋째 특성은 공동선은 단순히 이익과 효용의 총체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바른 생활, 즉 대중의 선량하고 공정한 인간적 생활을 증진시켜야 하다.

정치의 목적인 공동선은 국민대중 사이에 덕성의 발전을 요구한다. 정의와 진리를 거스르는 모든 정치행동은 그것 자체가 공동선에 해로운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공동선의 요구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최대다수의 노동자가 고용될 것, 불우한 계급이 나타나지 않도록 할 것, 임금과 물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 재물과 시설이 국민 다수에 의해서 이용될 것, 산업 간의 불균형이 없을 것, 경제발전과 공공시설의 발전 간에 균형이 취해질 것, 생산방법이 최대한도로 과학화될 것 등이다. 정치적이란 말은 입법 · 사법 · 행정을 통해서 국가를 통치하는 기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총체적으로 어떤 목표를 지향하도록 조정하는 기능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라는 것은 목적의식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고 공동체 이념에 바탕을 둔 행동적인 것이다. 정치적 행동은 인간이 하느님께 소명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체험할 때 비로소 바른 길이 드러난다. 만일 정치적 행동이 그렇게 실천된다면 그 행동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근본적인 무능을 수긍할 태세, 자기 힘과 지혜만으로 무엇을 건설하려는 고집을 포기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행동은 반드시 이성적 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정치체제가 어떠하든지 정치적 권위 즉 지도하고 명령하는 권리는 인민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인민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원천도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정치란 인민을 위한 정치다. 정치제도와 사회제도가 그리스도 교인의 목적자체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어는 특정 정치제도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은 어떠한 정치형태도 정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부수적인 것은 오랜 관습에 의해서 결정된다. 교회는 어떠한 정치제도가 가장 합당한 것인지를 정할 수 없다. 교회는 정부의 기구나 법률을 결정함에 있어서 그 정치사회의 역사적 상황을 참작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삼권분립을 취하는 것은 인간본성에 합당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정부형태에서는 국민들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정치권력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그리스도적 사랑의 정신으로는 이것이 가능하다. 교회는 정의와 진리를 존중하면서 정당을 만드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회가 정쟁에 휘말려 들거나 교회의 지지에 의해서 자기 정당의 승리를 가져오려고 하는 것은 종교의 남용이다.

세계관적으로 다원적인 현대사회에 있어서 교회는 때때로 신앙과 윤리의 수호자로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정당의 강령에도 직면할 것이다. 이럴 경우는 예언적인 판단으로 이를 비난 · 배격할 수 있다. 과거에 있어서 그리스도 교인은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거나 외면하는 것이 바람직한 수덕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교회는 완전사회이며 선을 독점하고 있는 반면 정치사회는 불완전 사회로서 대립과 투쟁만이 지배하는 악의 사회라는 성속 이원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인류의 구원과 인권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였다(사목헌장 76).

교회는 모든 정치체제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날 때 비판할 능력을 행사할 것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단서를 붙여야 한다. 분명히 그리스도교의 신앙자체는 상세한 정치적 강령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적 분야에서의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과 특유한 성격 미 주체성을 의식하고 인간실존의 모든 국면에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정치적 세계에서 적극성을 띠고 매일 매일 이 세계의 사건에 개입하여 자신을 이 세계와 동일시하거나 혼돈하는 일없이 인류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들 중에서 직업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활동의 복음적 의미를 명백히 하고 오늘날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그리스도 교인의 중대한 의무를 실천함에 있어서 어떤 요구들을 내세우는 하나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의 정치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폭력의 배제이다. 아무리 정치와 교회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공존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정치적 폭력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난한다. 그것은 폭력은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복음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교인은 평화적이다. 그러나 폭력과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다시 말하여 비폭력은 피동이 아니다. 교회는 정치를 비신성화하고 정치권력을 민주화하고 억압된 자의 편에 섬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 권력 (韓庸熙)

[참고문헌]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사목헌장, 제2부 4장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 H.J. Laski, A Introduction to politics,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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