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제 [한] 正副祭 [관련] 부제

차부제가 아닌 정식부제란 말. ⇒ 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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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본당 [한] 丁峰本堂

황해도 신계군 고면 정봉리(黃海道 新溪郡 古面 丁峰里)에 위치한 이 본당의 전신(前身)은 삼차동(三次洞)본당이다.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을 경계로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에 인접한 신계지방의 공소들은 오랫동안 이천군 포내본당(浦內本堂, 1896년 설정) 부이수(Petrus Boyssou, 孫以變, 베드로) 신부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28년 5월 신계지방 공소들은 포내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삼차동(셋째골)에 본당이 설정되고(주보는 성모 마리아) 은율(殷栗)본당에서 전교하던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이 신부는 부임 후 첫사업으로 자모학원(慈母學院)을 설립, 원장을 겸임하면서 매년 300여원의 경비를 들여 학원을 육성한 결과 1932년 신학기에는 전임교사 2명, 학생수 60여명의 규모 있는 초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1933년에 부임한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삼차동이 본당소재지로서 부적합함을 깨닫고 1935년 거기서 30리 떨어진 장터인 정봉리로 본당을 이전, 그 해 가을에 기와집 성당건물이 신축 낙성외자 11월 제9대 서울교구장 라리보(Adrianus Larribeau, 元亭根)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당시(1937년)의 총교세는 689명, 교무금 총액은 2만 7,000원으로, 황해도내 11개 본당 중 1인당 평균 교무금 액수가 가장 많았다. 한편, 1936년 가을 성직자 피정에 참석차 상경한 칠순 나이의 김원영 신부는 서울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다시 정봉으로 귀임치 못한 채 10월 7일 주교관에서 별세하고 3대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신부는 일제 말기와 8.15광복 후 공산치하의 종교탄압 아래서 꾸준히 공소를 지키면서 사목활동을 해오다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10일 후인 7월 5일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당하여 해주(海州)에 이송, 수감되어 있던 중 유엔군 북진으로 공산군이 패주하던 그 해 10월 5일 동해주(東海州) 해변 모래밭에서 수감자들이 생매장될 때 학살당한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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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혜 [한] 鄭福惠

정복혜(?∼1801). 순교자. 세례명은 간디다. 이합규(李鴿逵)의 전교로 입교,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체포되어 이해 5월 14일(음 4월 2일)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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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 [한] 淨配 [라] sponsa [영] spouse [관련] 배필

교회를 상징하는 모상들 중의 하나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배 즉 배필이라는 뜻. 구약의 백성을 묘사하던 이 말을 바울로가 교회에 적용하였다. 그는 에페 5:23-32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견주어 부부가 일체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체이며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듯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한다. (⇒) 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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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반회사건 [한] 丁未泮會事件

정미년(丁未年) 즉 1787년 10월경에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등이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걸 목격하고 성토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미반회사건을 발설한 사람은 이기경(李基慶)으로, 원래 그는 이승훈, 정약용과는 친밀한 사이로, 그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대하며 보조를 같이했었다. 그러나 정미년부터 그들과 떨어져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고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이기경은 정미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서 서학서만을 보고 있는 걸 목격했었다고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낙안은 이를 왕에게 알려 그들을 벌주어야 한다고 극렬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직접적인 박해가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점차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라고 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장차 박해를 유발케 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 李晩采, 闢衛編, 闢衛社,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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