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환(1892∼1964). 교리교사. 호(號)는 두봉(斗峰), 세례명은 요한. 본관은 창녕(昌寧). 충남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 교우촌에서 부친 조병학(曺秉學, 요셉)과 모친 유정혜(柳貞惠, 바르바라)의 아들로 출생. 1895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잠시 인천으로 피신하였다가 3년 뒤 합덕으로 이주, 그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914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부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일어(日語) · 박물(博物) · 수학 등을 가르쳤고 1919년 재판소 서기, 1921년 경기도청 사회과 주사로 근무하다가 1935년 사임하고 만주 봉천으로 일터를 옮겨 한국인 천주교회의 창설에 참여, 창설 후 총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봉천의 한국인 학교연합회 이사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8.15광복 후, 일제 아래서 관리생활을 한 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反民特委)에 기소되어 수감 중, 대한감리교 총리사 정춘수(鄭春洙) 목사에게 전교, 석방된 뒤 감리교 신자들의 극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 목사를 개종하게 하였다. 1954년 명동본당 총회장을 지내고 1960년 조선기계제작소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2년 명동 성모병원에 개설된 지성인 교리반의 강사로, 또 개인적 접촉을 통해 많은 지식인, 정치인, 학자, 법조인들을 영세, 입교시켰다. 1964년 5월 17일 노환으로 사망, 금곡본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역서(譯書)로 ≪예수전(傳)≫이 있다.
조원동본당 [한] 棗園洞本堂
수원교구 주교좌 본당. 주보는 평화의 모후. 수원시 조원동 676-6번지에 자리 잡은 이 본당은 북수동본당에서 분할되어 1976년 11월 19일 배영무(裵英武, 라우렌시오)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설정되었다. 본당 출범과 동시에 이 성당은 수원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설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것은 수원 일대의 교세 신장을 위하여 주교좌를 고등동보다 교통편이 편리한 도심쪽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고조되어, 처음에는 북수동본당이 대상에 올랐으나, 이왕이면 새로 짓게 된 조원동성당이 가장 합당하다는 교구 사제단의 의견을 모아 주교좌로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차(車) 수산나 교우가 희사한 3,000평의 대지 위에 현대식 성당을 지어 1977년 5월 18일 축성식을 가졌고 그해 9월에는 주일학교와 수녀원도 지어 낙성식을 가졌다.
본당으로 설정된 지 10년도 안되지만 교세의 발전은 주교좌성당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처음 본당이 되었을 때 1,906명이던 신자수는 1981년 6월 3,450명으로 늘었고, 1983년말 현재 5,206명에 달하고 있다. 성 빈첸시오 수녀회의 분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의 주임은 한종훈(韓鍾勳, 스테파노) 신부이다.
조용삼 [한] 趙∼
조용삼(?∼1801).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경기도 양근(楊根)의 양반 가정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하여 아버지 조제동, 동생 조호삼과 함께 여주(驪州)의 임희영(任喜永) 집에 얹혀살면서 교리를 배우던 중 1800년 4월 조제동, 임의형과 함께 체포되었다. 여주 옥(獄)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이겨냈고, 옥중에서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한 후 1801년 3월 27일(음 2월 14) 옥사, 순교하였다.
조안노 [원] Joanno, Pierre Marie
Joanno, Pierre Marie(1832∼1863). 조선교구 선교사. 1832년 2월 9일 코트 뒤 노르(Cote du Nord)의 멜이오네(Mellionnee)에서 태어나, 1856년 1월 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1857년 12월 19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858년 3월 21일 한국으로 떠난 그는 1859년과 1860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861년 세 번째만에 비로소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성모영보구역인 충청도 공주(公州) 지방에 파견되어 전교활동을 계속했으나, 불과 2년 후인 1863년 4월 13일 충청도 둠벙이[公州郡 新下面 造平里]에서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