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인본당 [한] 新泰仁本堂

1914년 호남선 철도 개통 당시까지도 ‘서지말’ 역촌(驛村)이었고, 1935년에 신태인읍으로 승격되기 전에는 이곳이 전북 정읍군 용북면(井邑郡 龍北面)이었다. 전북 정읍군 산내면 능교리(山內面 菱橋里)는 원래 신성리본당(新城里本堂) 소속 공소가 있었는데, 교세가 날로 발전하여 나감에 따라, 1925년 5월 초대(1925~19330년) 주임신부인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를 맞아 본당이 설립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눙다리[菱橋里]본당’으로 호칭되는 20여평의 목조 성당과 초가 5간의 사무실로 출발한 뒤, 평야부인 태인(泰仁)으로 옮기려고 대지 400여평을 매입하였다. 2대(1933~1938년) 허일록(許日錄, 다두) 신부가 1933년 정읍군 태인면 태창리에 새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본당을 옮기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구태인(舊泰仁) 시대가 시작되었다. 3대(1938~1939년) 김기봉(金基奉, 필립보) 신부, 4대(1939~1942년) 김동욱(金東旭, 마티아) 신부, 5대(1942~1947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를 거쳐 6대(1947~1954) 김영일(金永鎰, 아우구스티노) 신부 때 성당 대지를 확장하였다가 6.25전쟁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구태인 시대는 막을 내리고, 7대(1954~1960년) 이대권(李大權, 바오로) 신부는 1954년 5월 신태인읍 평화동 546번지에 대지를 마련, 1955년 11월 20일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하여 신태인으로 본당을 옮겼다. 1957년에 와서는 건평 120평의 현 신태인본당과 250평 규모의 부속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4개 공소에도 아담한 강당을 지었다. 8대(1960~1968년) 서정수(徐廷壽, 알릭스) 신부, 9대(1968. 5~1968. 10)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 신부, 직무대리로서(1968. 10~1968. 12) 이상호(李祥浩, 아우구스티노) 신부, 10대(1968~1969년) 안복진(安福-, 요셉) 신부, 11대(1969~1973년) 김병엽(金炳燁, 베드로) 신부, 12대(1973~1974년) 안용기(安龍起, 가브리엘) 신부, 13대(1974~1976년) 이상호(李祥浩, 아우구스티노) 신부, 14대(1976~1979년) 이종원(李鍾源, 토마스) 신부, 15대(1979~1981년) 김병운(金炳韻, 베네딕토) 신부, 16대(1981~현재) 성민호(成珉浩, 야고보) 신부로 이어지면서 전교의 내실화에 힘쓰고 있다.

성모무염시태(12월 8일)를 주보로 하는 전죽교구 관하의 신태인 본당은 현재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태인리 546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1984년 6월 현재 신자수는 본당이 422명(남자 208명, 여자 214명), 공소에 973명(남자 486명, 여자 487명), 도합 1,315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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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보 [한] 申太甫

신태보(1768~1839).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그의 인적 사항(人的事項)은 기록상에 자세히 나타난 것은 없으나, 구전(口傳)에 의하면, 그는 입교하기 전부터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고 굳은 신앙을 간직해 왔다고 한다. 박해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한국 교회의 재건을 위해 중국 북경 주교에게 신부 영입을 위한 서한을 보내고, 자기 친척인 이여진에게 여비를 마련해 주어 북경을 왕래케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하는 한편, 경상도 · 전라도 · 경기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면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케 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 지게 되었다. 이에 1827년에 상주(尙州)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진영(鎭營)에 수감 되었는데, 혹독한 형벌에도 끝내 배교치 않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곧 집행되지 않고 13년간이나 옥중생활을 하다가 1839년 5월 29일 70세의 고령으로 전주 감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쓴 옥중수기(獄中手記)는 당시의 옥중생활의 진상을 전하는 동시에 그의 불요불굴의 신앙심이 후세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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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조당 [한] 神親阻擋 [관련] 혼인장애

세례성사에 의해서 발생하는 혼인무효장애의 하나. 세례를 받은 자와 세례를 준 자 및 대부모간에 혼인을 금하는 교회법적 조건(구 교회법 제1079조, 제768조). 지금은 이 장애가 교회법에서 삭제되었다. (⇒) 혼인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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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 [한] 神親 [관련] 대부모 신자2

영적(靈的)인 인척관계(姻戚關係) 즉 성세성사(聖洗聖事)와 견진성사(堅振聖事)로써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인척관계로 대부모(代父母)와 대자녀(代子女), 그리고 성사를 집행한 신부(神父)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옛 교우들은 위의 의미 이외에 대부모만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했고 또 대자녀(代子女)를 의미하는 말로는 신자(神子)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 대부모, 신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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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본당 [한] 信川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사직리(黃海道 信川郡 信川邑 社稷里). 신천읍에서 50여리 떨어진 산골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斗羅面 淸溪洞)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방문하여 공소를 열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행한 것은 1864년이었고, 청계동본당이 개설된 것은 1898년이었다. 이 때 신천읍에도 청계동 본당 관할 하에 들어갔다. 1900년 신천읍의 신자수는 60여명을 헤아렸다. 1912년 청계동본당이 폐지됨에 따라 신천읍 공고는 1921년부터 재령(載寧)본당 관할 하에 들어갔다. 1930년 신천면 척서리(信川面 滌署里)에 성당이 세워지고 재령본당의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신부가 초대 본당사제로 부임함으로써 신천본당은 발족되었다. 신 신부는 1931년 해주(海州)본당으로 전임되고, 강원도 약사리(藥司里)본당에서 전교하던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2대 사제로 부임하였다. 황해선(黃海線) 철도의 개통과 함께 인구 급증으로 1933년 읍내 신자수가 400여명이나 되었다. 1935년에 부임한 3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는 본당을 사직동으로 이전, 1936년에는 미화(薇花)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37년 4대 신인식(申仁植, 바오로) 신부가 부임, 1938년 동성(東星)신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고, 5대 박원영(朴垣英,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1년 충남 당진(唐津)본당 사제로 전임되었다. 그 후임으로 곡산(谷山)본당 사제로 있던 구천우(具天祐, 요셉) 신부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 가중되는 일제 탄압 하에 어렵게 성당을 운영해 나갔다. 8.15후 북한 당국에서 유치원 건물을 접수하려는 속셈을 눈치 챈 구 신부는 1946년 유치원을 자진 폐원, 그 건물을 성당으로 개축함으로써 접수당하는 것을 모면하였다.

1949년 2월 구 신부는 어느 학생에게 월남을 알선해 준 일과 성당의 등사기로 반공비라를 제작 살포한 일 등의 혐의로 신천 내무서에 연행되어 신문을 받게 되었다. 신문 중 용변을 보러갈 허락을 얻은 구 신부는 내무서 벽의 뚫어진 틈으로 기어 나와 탈출하는데 성공, 1주일 후 취야(翠野) 공소에서 해주본당의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의 도움을 얻어 옹진(甕津)으로 월남,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 서울에 도착하였다. 구 신부는 1950년 11월 유엔군 북진으로 자유를 찾은 신천으로 가서 신자들과 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감격어린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유엔군의 후퇴 때 구 신부가 다시 월남함에 따라 신천본당은 목자 없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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