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지 [한] 鄭∼

정원지(1846∼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베드로. 일명 원지. 충청도 진잠(鎭岑)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전주(全州)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 지방으로 이사했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 조화서 집을 습격할 때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체포해 가는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감영으로 끌려갔다. 옥에서 지극한 효성으로 노모를 생각하며 여러 번 눈물을 흘렸으나 함께 갇힌 교우들의 위로와 권면으로 눈물을 거두었고 혹형과 고문도 이겨냈다. 12월 31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위로의 편지를 남긴 후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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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한] 情慾 [라] concupiscentia [영] concupiscence

하느님을 지향하지 않고 악에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내재적 성향. 정욕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구세사에서 연역된다. 구약성서 안에 인간의 죄의식에 관한 대목에서 인간을 악에로 이끄는 힘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적대하도록 충동하는(창세 8:21, 예레 17:9) 내재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아직은 죄로부터 연역되지 않았고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일부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사람을 통일체로 보는 히브리적 개념에 따라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서 역시 영과 육의 욕망을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의 욕망’이란 바울로의 표현이 헬레니즘적 이원주의를 연상시키나 그 뜻은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거스리는 전인의 자기주장이다. 이처럼 악한 욕망이 인간의 감각적 삶에서 표현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갈라 5:19-, 에페 2:3) 육체와 감각을 비관적으로 보는 안목은 지양되어 있다. 정욕은 하느님을 적대하는 힘이라고 할 때 정욕의 자연스러움과 그것이 인간 구원에 기여하는 순기능을 간과해 버리기 쉽다. 정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존재하며(로마 7:5, 8:8, 갈라 5:24), 구세사에서 아담의 죄와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할 때 정욕과 인간 본성과의 관계 및 정욕의 구체적 발생이 문제된다.

인간을 통일된 단일체로 보던 성서적 관점은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적 이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부들의 사상 가운데에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적 측면을 소극적으로 보는 태도로 채색되었다. 원죄이전 정욕이 없는 인간의 상태가 과성(過性)은혜의 상태인 한 정욕은 인간 존재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고 문제 삼는 교부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펠라지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정욕을 인간 본성의 결핍으로 보았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정욕이 ‘죄에서 연유하고 죄로 유인하는 것’(Denz. 792)이라 하였는데 이는 구세사적 관점에서 선언한 것이며 정욕의 구체적 발생과 실제적 강도가 죄에 의존한다고 본 것이다. 정욕은 초자연적인 것에 반대하는 인간의 자기주장으로 표현될 때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럴 때 구원 경륜 안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 정욕은 죄 중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초자연적 목적과 숙명을 거스리는 반동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초자연적 자기완성을 저지하는 소극적 실존이며 이 소극성은 감각 분야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성의 모든 분야에 미친다. 그러므로 정욕은 파괴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것은 인간을 절대자의 지위로 높이기도 하고 타락과 자기 파괴적인 의지, 여러 형태의 중독증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욕의 파괴적 성향을 과장해서는 아니 된다. 정욕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며(로마 7:8, Denz. 792) 정욕의 원인이 되는 죄는 인간의 본성을 본질적으로 부패시키지 않는다. 정욕이 지니는 소극성은 반대세력에 의하여 저지되기 일쑤이다. 그 반대세력에는 절대자인 하느님을 그리는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동경, 절대선(絶對善)에 대한 인간 의지의 영원한 지향성 등이 있다. 이러한 제동이 정욕의 한계를 규정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정욕은 하나의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하는 움직임이며 선을 지향하는 의지의 경향과 은총으로 인한 이 경향의 실현에 의하여 부단히 좌절되고 완화되는 움직임이다.

정욕은 또한 인간의 투쟁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정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통을 따르게 하고 구속에 참여하게 한다. 구세사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인간이 은총의 도움을 받아 정욕을 윤리적 질서에 맞게 점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마침내 정욕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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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 [한] 丁若鍾

정약종(1760∼1801). 순교자. 명도회(明道會) 초기 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아들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 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 성인 정하상(丁夏祥), 성녀 정정혜(丁情惠)의 부친. 일찍이 상호 이익(星湖 李瀷)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는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쏟아, 천주교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는 입교하여 더욱 천주교리를 연구함으로써 교리지식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냉담했어도,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명도회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 · 입교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다하였다. 더욱이 그는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한문본 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평민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 ≪주교요지≫라는 상 · 하 두 권의 교리서를 지어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책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교리서로, 주문모 신부도 이 책을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芻蕘)보다도 낫다고 칭찬하여 이를 널리 권장하였다. 그는 또한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책을 쓰던 중 박해를 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약종은 원래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살고 있었으나 1799년 기미년(己未年)에 서울로 이사하여 문영인(文榮仁)의 집을 빌어 살고 있었는데, 1801년 초부터 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성상(聖像)과 교리서적,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들을 고리짝에 넣어 임대인(任代仁)으로 하여금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 받아 포도청에 끌려가 진상이 탄로됨으로써 박해가 가열되었고, 자신도 2월 11일(음)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고리짝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 것임을 시인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에 관한 일은 함구하고, 끝까지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함은 오히려 부당하다고까지 항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1801년 2월 26일(음)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 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原著, 崔奭祐 · 安應烈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분도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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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한] 丁若銓

정약전(1758∼1816). 약현(若鉉), 약종(若鍾), 약용(若鏞)의 4형제 중 둘째로 일찍이 권철신(權哲身)에게 사사(師事)하였고 1779년 주어사(走魚寺) 강학회에 회원으로 참석하여 천주교를 연구하였다. 이어 1785년에는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집에서의 공동집회에 참석하는 등 초기 조선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1790년 33세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등 관계에 등용되었으나 점차 반대파로부터 천주교인이라는 모략을 받아 한때 관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는데,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사건으로 다시 서울에 잡혀왔다가, 간신히 사형만을 면하고 우이도(牛耳島)로 유배되어 1816년 59세로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수산학서(水産學書)를 써서 학계에 공헌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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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한] 丁若鏞

정약용(1762∼1836). 실학자(實學者). 세례명 요한.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輔),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庵)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다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정재원(丁載遠)의 사남(四男)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다. 양근(楊根)의 마재[馬峴]에서 출생.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實學)을 집대성하였다. 17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으로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만에 풀려 나왔다. 이어서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다가 천주교인으로 지목 받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보외(補外)되기도 하였다. 그 뒤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내고 규장각(奎章閣)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였고,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게 되었다.

그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그는 1770년 후반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기 시작하였고, 1783년에는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양근에서 서울로 향하는 배 안에서 이벽(李檗)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하였다. 1784년에는 수표교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직후인 1785년에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곧 다시 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1787년에는 이승훈 등과 함께 서학서(西學書)을 읽었다. 이 일이 정미반회사(丁未伴會事)를 통하여 문제시되고 있음을 보면, 그는 이때에도 신앙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있어서 1791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다. 이때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하여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죽음을 당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게 일어나자 그는 분명히 배교하는 자세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의 주변에는 중형(仲兄) 정약종(丁若鍾)을 비롯해서 많은 천주교인이 있었으므로 다른 척사론자와는 달리 교회에 대하여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런데 1797년 그가 다시 서학도(西學徒)를 지목 받자 그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이와 같은 비난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1799년에는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하여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고 한다. 한편 1801년에 이르러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그는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철저히 부인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權哲身), 조동섬(趙東暹), 황사영(黃嗣永) 등을 고발하였고, 천주교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奴婢)나 학동(學童)을 신문하여 정보를 밝히도록 제안해서 이것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는 1801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帛書)사건으로 다시 신문을 받았고, 그 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18년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하고 자주 대재를 지켰으며 고신극기(古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고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하였고, 이 그른 다블뤼(Daveluy) 신부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할 때 입수되어 초기 교회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 바 있으나, 그 원본은 1863년 주교댁 화재 때에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저술했던 ≪조선복음전래사≫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초기 부분에 상당 분량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는 1836년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그 자신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들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여러 기록을 통해서 그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확실히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이 저서에 나타난 기본사상을 분석하여 천주교신앙과 대비해 보는 방법을 통하여, 그와 천주교 신앙과의 관계가 좀 더 확연히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辛酉邪學罪人家煥等推案 / 달레 原著, 崔奭祐 · 安應烈 譯註, 한국천주교회사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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