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자유 [한] 宗敎∼自由 [라] libertas religionis [영] freedom of religion

자기가 원하는 종교를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신앙할 자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이 종교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한다 … 종교문제에 있어서 그 누구도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되지 않으며 …” 하였다(종교자유선언 2항). 이 자유의 근거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있으므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지는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헌법에서 이를 규정한 것은 선언적인 의미를 지닌다. 종교의 자유의 내용은 한 인간이 자기의 양심적 판단에 따라 어느 신앙을 선택하거나 배척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뿐 아니라, 이 태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외부의 강압을 받지 아니할 소극적 권리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종교행사, 종교결사, 선교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교리에 위배되는 행위를 거부할 권리 등을 포함한다(선언문 4항).

종교의 자유의 효과는 국가에 대한 권리일 뿐 아니라 제3자적 효력을 아울러 지닌다. “각 사람이 개인이나 사회적 단체나 그밖에 온갖 인간적 권력의 강제를 받지 말아야 한다”(선언문 2항). 그러나 하느님께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수락하든지 배척하든지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을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믿고 실천해야 구원된다는 교리를 양보한 것은 아니다. 종교의 자유는 공동선을 손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한계와 공공질서를 교란해서는 아니 되는 법적 한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선언문 7항). 그러나 그 제한은 종교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정치와 종교는 구분된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사목헌장 74항). 한편 “종교행위는 그 성질상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과 직접 관계짓는 자유로운 내적 행위에 있을”뿐 아니라 “지상 및 현세의 질서를 초월하는 것”이다(선언문 3항0. 그러므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 간섭할 수 없다. 다만 종교의 자유의 한계를 넘는 행위를 정치가 규제하듯이, 정치의 윤리적인 측면은 종교가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가야 할 대상이다. 종교인은 착실한 신앙생활로써 종교가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유익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증거해야 할 임무가 있으며 그 결과 종교자유를 신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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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음악연구소 [한] 宗敎音樂硏究所 [영] Institute of Sacred Music

1981년 1월 1일 전례음악을 역사적으로 수집 · 보호 · 발전 · 교육시키는 한편 토착화와 통일성가집 등 제반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발족된 연구소. 1980년 3월 31일 ‘가톨릭음악인협회’가 창립되어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성가통일문제, 소규모 가톨릭 오케스트러 구성문제 등을 논의하다가 1981년 1월 이 연구소의 발족을 보았다. 성음악 담당자들을 위한 교육, 옛 성가의 수집 정리를 주요활동으로 하고, 대축일을 위한 라틴어 미사곡집 · 오르간곡집도 발행하였다. 현재 가톨릭 오케스트러를 위한 연습과 아울러 통일성가집 간행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연구소는 서울 중구 명동 사도회관 내에 소재하고 있고, 대표자는 차인현(車仁鉉)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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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법 [한] 宗敎法 [라] lex religionis [영] religious law [독] Religionsrecht

일반적으로 종교에 관한 법이론 및 법질서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교회법(Kirchenrecht)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종교법이란 원래 종교적 법(religioses Recht)이란 뜻으로 법의 종교철학 내지 법신학(法神學, Rechtstheologie)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원시법과 이슬람, 불교법 등 종교적 색채가 강한 법체계와 법이론에서는 물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1913년 라파포르트(M.W. Rapaport) 이래로 좀(Rudolf Sohm), 홀시타인(G. Holstein), 리어만(Hans Liermann), 볼프(Erik Wolf), 돔브와(Hans Dombois)로 이어지는 법신학(法神學, Rechtstheologie)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의 자연법론(自然法論, Naturrechtstlehre)과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 법사상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법이란 말은 더욱 구체적으로 종교복수국가(宗敎複數國家, religion pluralistic society)에서 국가와 종교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률로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도 점점 그리스도교 일변도의 교회법(Kirchenrecht)이란 개념으로는 협소하여 발터 지몬(Walter Simon), 파울 미카트(Paul MIkat) 같은 학자들이 종교법이란 용어를 강조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적 교회법, 이슬람, 불교, 유태교적 사원법(寺院法) 등이 포괄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종교법의 영역은 매우 광범하고, 그 개별종교영역에 따라서 독자적인 원리와 적용영역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아직까지 서양학자에 의해 종교법의 체계적 이론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종교법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고조선, 삼국시대부터 국가는 종교행사와 단체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법적으로 규율하였으며, 고려시대에도 불교를 국교화(國敎化)하면서 종교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조선조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종교정책에 따른 법적 조치가 있었다. 승려는 도첩을 받아야 하며 도성에 입성하지 못하였고, 수시로 무격(巫覡)을 퇴치하려는 종교입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이러한 차별적 종교법이 철폐되었지만, 식민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종교단체법(1927년)을 적용하고 종교단체에 대한 특별한 규제가 실시되었다. 광복 후 종교자유와 국교 금지가 헌법적으로 보장되고 미국의 영향으로 종교의 자유설립 및 행사가 이루어지면서 종교계는 상당한 무질서를 야기하였다. 정부는 1962년 5월엔 ‘불교재산관리법’을, 1962년 1월에 ‘향교재산법’을 제정하여 불교와 유교에 대한 특별규제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하여는 아직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 조치는 없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일반적 종교법인법(宗敎法人法)을 제정하여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종교법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단체로 1981년 12월에 한국종교법학회가 창립되어 <법과 종교>라는 학술지를 간행하고 있다. (崔鍾庫)

[참고문헌] 韓國宗敎法學會 編, 宗敎法文獻集, 韓國敎會史硏究所出版部, 1981; 同學會 編, 宗敎法判例集, 育法社 1982; 同學會 編, 法과 宗敎, 弘盛社, 1982 / 崔鍾庫, 國家와 宗敎, 現代思想社, 1983 / 崔鍾庫, 現代프로테스탄트 法神學의 動向, 金亭錫敎授 回甲論集, 1981 / Chongko Choi, Staat und Religion in Korea, Freiburger Piss, 1979 / Paul Mikat, Religionsrechtliche Schriften, 1974 / A. Hollerbach, Staatskirche und Staatsreligion, in Staatslexikon, 6 Aufl. Bd. 11, 1970. Sp.298∼304 / U. Steimmuller, Evangelische Rechtstheologie,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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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권 [한] 宗敎改革權 [라] ius reformandi

종교개혁 시대에 영주들이 주장한 권리로서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의 원칙에 따라 영내(領內)의 모든 사람에게 영주 자신의 의사대로 신앙을 정하려고 한 것. 즉 “영주의 종교는 곧 국민의 종교”(Cujus regio ejus religio)라는 원칙에 의한 영주의 종교 결정권을 말한다. 하지만 이 원칙이 공식화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개혁권을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면에서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 대표적인 이론은 다음과 같다. ① 영주 주교직설(領主主敎職說, Episkopalsystem) : 영주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1555년)에서 가톨릭의 주교들로부터 이양 받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재치권(裁治權)을 관리자로서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영주가 재치권을 교회의 종사자에 의해 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17세기의 이론. ② 영주 교회주권설(領主敎會主權說, Territorialsystem) : 군주는 영주로서 교회권도 갖는다는 주장. 즉 교회권은 영주권의 일부라고 하는 17세기말에 나타난 이론. 따라서 이 학설은 교회권을 갖는 것은 영주 자신의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③ 교회 결사설(敎會結社說, Kollegialsystem) : 교회를 하나의 결사로 보고, 또 영주 교회주권설의 견지에서 결사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는 국가에 최고권이 위임된다는 18세기에 주장된 이론.

이런 주장은 모두 개혁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학설이었는데, 그 이론들은 인간의 자연법과 상충되기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종교개혁권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웨스트팔리아조약(1648년)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시 실제적으로 관용되고 있는 관습을 승인했을 뿐, 영주의 임의로 정하는 신앙의 결정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유예기간을 설정하여 그것으로 장래에 대한 제한을 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종교 개혁권이라는 말이 종교단체의 결정과 그 제식(祭式)에서 부정을 없애려는 국가의 권리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국가는 이것으로 국가 자체를 위한 교회의 통치권을 요구하게 된다.

[참고문헌] B.V. Bonin, Die praktische Bedentung des jus reformandi, 1929 / E. Emmert, Cujus regio ejus religio, Nurnberg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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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한] 宗敎改革 [라] Reformatio [영] Reformation [독] Reformation

1. 어원적 의미 :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속화되었을 때에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혁신 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 사건 자체는 교회 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여러 갈래의 분파로 분열시켰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Reform)과 교회 밖에서의 개혁(Reformation)으로 구분된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가톨릭 종교개혁으로서 가톨릭 교회 쇄신(Catholic Reform) 또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교회 밖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서 단순히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개신교의 탄생을 초래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에 따른 유럽 대륙에서의 종교개혁, 즉 츠빈글리의 종교개혁,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 등이 있다.

2. 역사적 원인 : 정치적으로 볼 때에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 체제의 군주제로 발전하여 각 국가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전체 이익보다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반대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지방 분권화의 정치상황에 놓여 있어 황제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에 지방 제후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여기서 중앙집권 체제는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국교회 사상을 초래하여 교권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었고 지방분권은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경제 및 사회적으로 볼 때에 도시와 지방의 빈부 차이가 심하였다. 도시인의 배금사상은 인간 구원도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이는 대사부(大赦符)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 주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일부의 귀족과 몰락한 기사, 농민들이 가난과 불만 속에서 어떠한 혁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성적 배경에서는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16세기에 영국, 스페인, 프랑스에 번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북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로 발전하면서 교회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생활에 있어서 초대 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사도시대의 교회로의 복귀를 확신하는 데에 길을 마련하였다.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대사, 구원, 미사성제, 성사, 교회, 교황의 수위권 등 핵심적 신학문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여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하였고, 이는 루터의 신학적 공격과 논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또한 14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동요, 전염병, 농민 반란 등의 사회적 불안 속에 있었다. 이는 불행에 허덕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세속적 관심을 제거하고 영혼이 신과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켰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심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교회의 성사 신학을 비판하므로 반(反)성직자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실천적 신비주의는 ‘새로운 신심’(Devotio Moderna)이란 운동을 일으켰고, ‘공동생활의 형제회’라는 신심단체를 탄생케 하였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당시의 속화된 교회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선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다. 뒤에 ‘공동생활의 형제회’에서 운영한 학교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이들 중에 루터, 칼빈, 츠빈글리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들어 있었다.

교회 상황은 14∼15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와 ‘서구의 대이교’는 교회의 영향력을 상실케 하였고 교황권을 약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러한 교황청의 분규는 ‘공의회 지상주의’의 운동과 위클리프 및 후스의 이단 운동을 일으켜 교황의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그들의 시대적 사명인 교회 쇄신과 이슬람교도에 대적하는 서구의 단합을 완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 교황은 족벌주의 정책을 감행하였고 자기 중심의 배타심에 물들어 있었다. 특히 개인주의는 교황 취미의 소산인 문화적 업적에 공헌하였지만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한 대사부 판매는 종교개혁의 직접 동기가 되었다. 아울러 주교직은 귀족의 독점물이 되었고 이는 정신적 직책보다는 세속적 직업의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그들의 영신적 사명감을 망각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반면에 하급 성직자들은 제대로 신학 교육과 영신도자를 받지 못하였다. 참다운 수도 성소를 갖고 입회한 수도자가 적었고, 수도회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신도들의 신심은 너무 외적인 면에 치중하였고 자주 미신과 결부되었으며 이기적이며 물질적 효과에 밀착되어 있었다. 이는 대사부의 판매를 가능케 하였다.

3. 루터의 종교개혁 : 교황 레오 10세는 선임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1507년에 반포한 전대사를 다시 선포하였다. 그리고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대사 설교가 필요하였다.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대사위원회가 설립되어 설교 지침서가 발간되었고 설교가들이 임명되었다. 이 지침서는 대사에 대한 교리를 약술하였고 반면에 모금 목적을 위해 대사를 과찬하여 상품화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남용하도록 오도하였다. 루터가 거주하는 비텐베르크에서는 대사 설교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의 교우들이 이웃 지방에서 활동하던 요한 테첼의 설교를 듣고 대사부를 사오는 광적인 소란에 충격을 받고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일련의 신학명제(95개 조목의 명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그의 주교와 동료 교수들에게 발송하였다. 이는 후에 출판업자들에 의해 간행되어 세상에 나옴으로써 문제화되었다.

1518년에 이르러 루터의 명제는 신학자들의 반박을 받았고 그는 수도원 참사회에 소환되었으며 로마에서 파견된 카예타노 추기경의 심문을 받았지만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1518년 11월 9일에 반포된 대사에 대한 교회 입장과 1520년 6월 15일에 공포된 <교회 교서>에 불복하여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받았다.

루터 문제는 이제 정치문제로 번져 1521년의 보름스 국회에서 이단자로 단죄되어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전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루터는 반(反)교회적 개혁 저술 활동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152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독일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기 위해 국회를 열었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반기를 들어 일어나므로 1529년에 그리스도교계는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수많은 회담과 충돌을 거쳐 루터가 사망한 뒤에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일차적 타결을 보았으나 다시 충돌이 일어나 ‘30년 전쟁’ 끝에 ‘베스트팔리아 평화회담’에서 종교 분쟁은 최종적으로 일단락되었다. 1570년에 이르러 독일 북부지방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나 그 외의 유럽지역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4.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 스위스에서는 츠빈글리가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취리히에서 교회설교가로 활동하면서 1519년부터 루터의 개혁 정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523년에 시의회의 지지를 받아 그의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는 성당 안에 있는 성화상의 제거, 수도원의 폐쇄, 국가의 교회 성직록 관리, 국가 혼인 제도의 신설, 교회 전례와 강복의 폐지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1524년에 12명의 성주들이 가톨릭 동맹을 맺고 항의하여 취리히 시의회는 일단 개혁운동을 정지하였으나 1525년부터 츠빈글리는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신 · 구교의 종교전쟁(카펠리전쟁)이 일어나 1531년에 츠빈글리는 전사하였고, 취리히와 남부 독일에 미치던 영향력도 점차로 약화되어 갔으며 칼빈파로 흡수되었다.

한편 1524년에 츠빈글리가 가톨릭 동맹에 굴복하자 그의 일부 과격한 추종자들은 반발하였다. 그들은 ‘신앙에 의한 의화’라는 개혁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신상을 받을 수 있는 성인이 되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아의 세례를 금지하고 성인(成人)의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1525년에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의 집회를 금지하고 이들을 박해, 추방하였다. 추방된 재세례파는 서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자리를 옮겨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교회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다가 1535년에 뮌스터에서 지도자들이 처형됨으로써 재세례파가 건설하려는 그리스도 왕국은 종지부를 찍었다.

제네바에서는 1534년 초에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으로 ≪기독교 강요≫(1536)를 저술한 칼빈이 시의회의 지지를 받고 종교개혁에 착수하였다. 그의 과격한 신자생활의 혁신은 시민들의 반발을 받았으나 칼빈은 가혹한 처벌로 대응하므로 1555년에 이르러 모든 저항은 제거되었고, 제네바는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칼빈의 사상은 프랑스에 들어가 ‘갈리아 신앙 고백서’가 작성되었고 여기에 정치적 개입으로 위그노전쟁(1562∼1598년)이 발발하여 이는 ‘낭트 칙령’으로 칼빈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칼빈교는 성장하여 북부지방에서는 국교가 되어 개혁교회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도 들어왔다. 당시에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식민지 건설과 함께 칼빈 사상을 해외에 쉽게 확대할 수 있었다.

5. 영국의 종교개혁 : 헨리 8세(1509∼1547)는 본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칠성사(七聖事)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을 때에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미 교황 율리오 2세에게 관면을 받고 과부가 된 형수인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결혼하였지만, 뒷날 앤 볼랜과의 사랑에 빠져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교황 글레멘스 7세와의 이혼문제에 대한 절충이 결렬되자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여 의회로 하여금 영국 왕의 영국교회에 수위권을 인정하도록 조치하였고, 영국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수위권에 굴복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로써 영국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었다. 1533년부터 로마 교회에 충실한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해 박해를 가하였고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6개 신앙 조항’을 공포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준수하였다.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1547∼1553)는 10세의 어린 왕이었기 때문에 외삼촌 에드워드 세이모어(Edward Seymour)가 섭정을 하면서 칼빈 사상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여 교회개혁에 착수하였다. 1547년에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가 거부되고 ‘6개 신앙 조항’이 파기되었다. 1548년에는 성직자의 독신제가 폐지되었고, 1553년에는 영국 교회의 ‘42개 신앙조항’이 반포되었다. 이제 영국의 성공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사망한 뒤에 가타리나의 소생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매우 환상적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등극하게 된 것은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자행된 섭정 독재정치를 종식하고 전통적 튜더(Tudor)왕가의 계승을 의회와 국민이 갈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리는 이를 오해하여 국민이 여왕의 가톨릭 신앙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는 1554년에 스페인의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의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켜 의회와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점차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그래서 메리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잔인한 보복행위를 감행하였다. 아울러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화형에 처하면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결국 1558년에 메리는 사망하였고, 이로써 영국에서의 가톨릭 부활의 희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메리를 계승한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는 볼랜의 딸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헨리 8세의 결혼을 단죄한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가톨릭 신앙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박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베드의 치하에서 영국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국 성공회의 교계제도를 설정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황 비오 5세가 1570년에 엘리자베드 여왕을 파문하였을 때에 심각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영국 성공회는 대륙의 어느 개신교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대륙의 개신교도가 박해로 피난하게 될 때에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金聖奉)

[참고문헌] Owen Chadwick, The Reformation, Harmondsworth 1968 / Harold Grimm, The Reformation Era 1500-1650, 2nd ed., New Your, London 1973 / John M. Todd, Reformation, London 1972 / Thomas M. Lindsay,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2 vols. (2nd ed.); Edinburgh 1963 / E.G. LEonard, Reformation, Paris 1969 / H. Tuchle, C.A. Bouman, J. Le Brun, Reforme et contre-Reformation, Paris, 1968 / H. Daniel-Rops, L’Eglise de las Renaissance et de la Reforme, Paris 1955 / Joseph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2 vols. Freiburg I. Br. 1939∼1940 / Erwin Iserloh, Joseph Glazik, Hubert Jedin, Reformation. Katholische Reform und Gegenreformation, Freiburg I. Br., Basel, Wien, 1962 / Franz Lau, Reformationsgeschichte 1532 bis 1555, Gottingen Zurich 1964 / 金聖奉,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 역사안의 교회, 서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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