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한] 進化論 [라] evolutionismus [영] evolutionism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생물이 극히 원시적인 생물로부터 진화하여 고등한 것이 되었다는 이론인데 라마르크(J. Lamarck, 1744∼1829)와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대표적인 창시자이다. 우주 속의 만물은, 영계(靈界)를 포함하여, 저급한 상태에서 고급한 상태로 자연스러운 체제 바꿈을 하는 필연적인 진화발전을 통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는 학설로서, 기본적으로는 생물의 ‘종’(種)이 오랜 세월동안에 변화한다는 입장을 전제로 하고, 그 변화의 기구(機構)에 설명을 부여하려는 시도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자료에서 살필 때, 17세기에 근대 과학적인 세계상(世界像)이 구축되어 감에 따라, 우주나 지구의 역사도 그 세계상 속에 포함되느냐의 여부가 자연 철학자의 관심이 되었다. 이 경우 자연관(自然觀)에 있어 두 개의 태도를 나누어졌는데 ① 자연은 신의 계획과 창조에 의한 것이므로, 본래 ‘완전’인 것이며, 창조 이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고정적인 자연관’과 ② 노아의 홍수를 비롯하여 당시 산중에서 발견된 수생동물의 화석(化石) 등을 근거로, 신은 창조 이래 몇 차례나 자연에 큰 변동을 안겨 주었다고 보는 ‘변동적인 자연관’이다. 18세기에 오자, 전자의 사고방식은 현재의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정적(靜的)인 질서를 ‘속’(屬)과 ‘종’으로 철저하게 분류 정리하여 ≪자연 분류사≫(自然分類史, Systema naturae, 1735)를 저술한 린네(K. von Linne, 1707∼1778)를, 후자의 경우는 정적인 질서를 역사상의 동적인 발전으로서 바꿔 읽으려는 비풍(G.L. de Buffon, 1707∼1788)의 대저 ≪박물지≫(博物誌, Histoire naturelle, genearale et particuliere, 1749∼1804)를 남겼다. 전자에선 ‘종’의 보존 즉 ‘유전’(遺傳)현상의 탐구를 열었음과 동시에, 후자가 ‘종’의 변화 즉 ‘진화’(evolution)의 탐구를 열기 위한 전제가 되었다. 이러한 사정 속에 19세기 초, 라마르크는 ≪동물철학≫(動物哲學, Philosophie zoologique, 1809)을 통하여 종의 변화를 환경에의 적응과 결부시켜, 적응의 기구를 생물체와 욕구나 내적인 감정에 바탕하는 체제의 변화로서 파악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나온 다윈은 ≪자연도태법(自然淘汰法) 혹은 생존경쟁에 있어서 적자생존(適者生存)에 의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1859)을 통해 ‘자연선택설’을 주장, 환경에의 적응을 종의 변화의 원동력으로 보는 점에선 동일하나, 그 기구를 ‘환경의 체’로 골라내는 데서 찾고, 생물체는 수동적으로 ‘피선’(被選)일 따름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윈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자연경쟁’의 이념에도 친근성을 갖는 경우도 있고, 인간의 진화가 그리스도교 교리와도 병립되는 점도 있고, 또한 스펜서(H. Spencer, 1820∼1903)에게서처럼, 사회와 생물체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즉 사회가 동질인 것으로부터 이질인 것으로, 분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분화한 것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관념으로서의 진화론과 ‘사회유기체설’이 결부되는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20세기의 사회 · 종교 진화론을 낳게도 되었다. 진화의 기구로서는, 오늘날 원리적으로 돌연변이(突然變異)와 자연선택설의 합친 형태가 수용(受容)되어지고 있으나, 유신적(有神的)인 진화론이, 인간의 신체와는 별개로 각 개인의 영혼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는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유물적(唯物的)인 진화론의 경우 만물의 창조를 즉 그 기원을 하느님께 귀속시키는 그리스도교적인 계시에 반하는 까닭은, 모든 생물 · 식물 · 동물 · 인간의 신체와 영혼의 출현을 자연의 진화발전이라는 경과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는 데 있다. 더구나 영혼의 기원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A. Wigand, Darwinismus, Aufl.3, 1874∼1877 / E. Nordenskiold, The History of Biology, tr. L.B. Eyre, 新版, New York 1935 / F. Thilly, A History of Philosophy, ed. L. Wood, Now York 1951 / R.J. Nogar, The Wisdom of Evolution, New York 1963 / R.N. Bellah, Religious Evolution Beyond Belief, New York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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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본당 [한] 鎭海本堂

진해시 중앙동(鎭海市 中央洞) 소재 마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현 명칭은 중앙동(中央洞)본당이다. 1930년 충무동(忠武洞)에 마산(馬山)본당 관할의 공소가 설립되었으나 1933년 태풍으로 공소 건물이 파괴, 경화동에 새 공소건물이 건립되었다. 8.15 광복 후 본공소에서 미 군종 드레크 신부가 미사성제를 드리게 된 인연으로 현 위치인 중앙동의 일본 사원(寺院) 안국사(安國寺) 건물을 불하받아, 1946년 3월 대구 교구장으로부터 본당 설립인가를 받았고, 초대 담임으로 김경우(金慶佑, 알릭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4년간 재임하면서 유치원, 사제관, 수녀원을 신축하고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50년 4월에 부임한 2대 장병보(蔣炳輔, 베드로) 신부는 6.25전쟁을 겪은 후 성모동굴과 자선업체인 성모병원을 설립하고 1953년 전임되었다. 5대 장병화(蔣炳華, 요셉) 신부는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재임하면서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9대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가 1962년 부임, 현 강당과 유치원을 신축하고 1965년 말 진해시내에 경화동(京化洞)본당을 분할 창설시킴과 동시에 본당명을 중앙동본당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81년 성심회관, 1983년 200주년 회관이 각각 준공되었다. 현재 주임사제는 4대 이종창(李鍾昌, 바르톨로메오) 신부, 신자수는 3,469명(1983년말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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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본당 [한] 晋州本堂

1925년 창설된 마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그리스당의 도움이신 성모. 현 명칭은 옥봉동(玉峯洞)본당이다. 진주본당의 초기 교회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1896년에 입국한 프랑스인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1898년 진주 배나무골에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전교를 시작하였으나 관헌들과 부랑배들의 악의적인 방해로 전교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변두리 지대인 비라실[장재동]로 옮겨갔다가 1901년 마산(馬山)으로 전임되고 말았다. 10년이 지난 1911년 대구교구가 신설됨에 따라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의 주선으로 미국의 한 열심한 교우의 희사금을 얻게 되어 옥봉동 산 밑, 일명 순천당이라고 불리는 땅에 120평 대지를 매입하고 첫 공소를 열었고 남해 창선에서 이사온 이낙종(스테파노)이 공소 회장직을 맡아 전교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그의 아들 이상석(가브리엘)이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결과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공소를 설치한 뒤 15년이 지난 1926년에 옥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문산(文山)본당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정수길(鄭水吉,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3년에 새 성당을 축성한 이래 사제들의 후생에도 힘을 기울여 1943년 사제관을 신축하고 몇 차례 증 · 개축이 있었다. 교세도 날로 확장하여 1959년에 삼천포를 분리시켜 신설 본당을 설치하고, 이 이듬해 1960년에는 사천(泗川)본당이 분리 독립되었고, 이어 1961년 진주시내에 칠암동본당을 분리시킴과 동시에 본당명을 옥봉동본당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일찍이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1920년에는 해성학원을 개설하였고, 1926년에는 해성유치원을 열었으며, 1961년에는 칠암동(七岩洞)에 천사유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초대 정수길 주임신부 이래 14대 박재근(朴在根, 아우구스티노) 주임신부에 이르기까지 13명의 신부가 봉직하였으며 현재 관할공소 3개소, 신자수는 2,580명(1984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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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본당 [한] 進永本堂

경남 김해군 진영읍 진영리 230번지 소재 마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진영본당 초기의 복음 전파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마산본당 소속 정산리[창원군 길곡면] 공소에서 박수창(시몬) 일가족 7명이 베르몽(J. Bermond, 睦世榮)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1923년에 진영면 철하리로 옮겨 살면서 포교를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해 11월 14일 김해군 이북면 속칭 노루목[현 大項里]에서 공소 헌당식이 있었고, 여기에서 81명의 남녀에게 고백성사가 베풀어졌다. 3년 뒤인 1926년에 밀양 명례본당이 세워짐에 따라 명례본당 관할지역이 되었다가 이곳에 본당 소재지로서 적당하지 않는다는 여론에 따라 1930년 6월 밀양군 삼랑진면 우곡리로 본당을 이전하여 노루목 공소도 이에 소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 가을에 진영읍 철하리의 김 베네딕토 사가(私家)에서 파르트네(Parthenay, 박덕로) 신부가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진영 공소가 정식 발족하게 되어 초대 전교회장으로 장 마티아가 활동하였고 공소회장으로는 신덕순(바르나바)이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진영읍 서구(西歐)에 아연 지붕의 건평 18평의 아담한 목조건물을 세워 비로소 공소의 면모를 갖추었고 1934년 본당으로 승격하여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가 초대 본당담임으로 부임하였다.

초대 정재석 주임신부 이래, 현대 16대 강윤철(姜允喆, 요한 보스코) 신부에 이르도록 본당 발전을 위하여 사제와 신자들이 합심 노력한 결과 현 성당 신축(1956년), 연령회 조직 및 교회 신자 묘지 확보(1960년), 사제관 신축(1971년), 수녀원 축성(1975년) 등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진영본당은 현재 유치원(소화유치원)과 성모병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 발전과 유대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10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1983년 2월 현재 본당 신자수는 2,200명이고, 공소는 10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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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본당 [한] 鎭安本堂

1900년 창설된 전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성심. 진안지방은 원래 전주본당 관할지역으로 전주본당 신부들의 순방을 받다가 1900년 9월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 진안군 마령면 어은동(鎭安郡 馬靈面 魚隱洞)에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의 본당명은 어은동본당이었으나 1952년 본당이 어은동에서 진안읍 군하리(郡下里)로 이전되면서 진안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어은동에 부임한 초대 주임 김양홍 신부는 부임한 해에 성당을 건축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1911년 교우자녀와 빈민아동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였다. 1917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하던 중 1921년 마령군 연장리(延章里)에 한들본당을 신설, 어은동본당을 한들본당 공소로 편입시키고 자신은 한들본당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1931년까지 사목하였다. 그 후 1947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가 부임,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했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본당은 다시 폐쇄되었다가 1952년 진안읍 군하리에 다시 본당을 창설되었고, 1954년 성당신축과 함께 한들본당을 병합하였다. 1956년 성모의원, 1957년 소화유치원이 개설되었고 이후 계속 발전하여 1983년 말 현재의 교세는 교우수 2,541명, 공소 9개소에 이르고 있다. 역대 주임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1900∼1917년) 김양홍, 2대(1917∼1921) 이상화, 3대(1947∼1950) 송남호, 4대(1952. 4∼1960. 3)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5대(1960. 3∼1961. 7) 이태규(李泰圭, 요셉), 6대(1961. 7∼1966. 7) 황인규(黃寅圭, 마태오), 7대(1966. 7∼1968. 2)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 8대(1962. 2∼1968. 10) 석해천(石海天, 마르첼리노), 9대(1968. 10∼1971. 3) 이현석(李鉉錫, 미카엘), 10대(1971. 5∼1975. 1)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11대(1975. 1∼1978. 10) 서석구(徐錫九, 요한), 12대(1978. 1∼1982) 김윤섭(金潤燮, 안셀모), 13대(1982∼현재) 강덕창(姜德昌,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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