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하(?∼?). 영조(英祖) 때의 처사(處士)로 ≪대동정로≫(大東正路) 권5(券之五)와 권6(卷之六)에 수록되어 있는 ≪증의요지≫(證疑要旨)의 저자. (⇒) ≪대동정로≫
홍재영 [한] 洪梓榮
홍재영(1779∼1839). 순교자. 세례명 프로다시오. 충청도 예산(禮山) 출신. 홍낙민(洪樂敏)의 아들. 홍봉주(洪鳳周)의 부친. 그의 부친이 입교하자 가족 전부가 함께 입교하여 천주교인의 가정을 이루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부자가 함께 체포되자 부친은 순교하였으나 그는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여 광주(光州)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전날의 배교를 회개하여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의 부인이 유배지로 그를 찾아왔을 때, 자식들의 신앙심을 북돋아 줄 것을 당부하였고, 1832년에 대사령(大赦令)이 내려 그를 석방하려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순교하기를 고집하였다. 그리하여 1840년 1월 4일(음 1839년 11월 30일) 전주 감영에서 60세로 참수치명하였다.
홍인 [한] 洪鏔
홍인(1757∼1801). 순교자.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 홍교만(洪敎萬)의 아들. 아버지에게 교리를 설명하고 권고하여 함께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1800년 12월 박해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그 이듬해 2월 14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체포되었다. 아버지는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나, 그는 포천으로 이송되어 그 뒤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802년 1월 30일(음 1801년 12월27일) 44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홍익만 [한] 洪翼萬
홍익만(?∼1802). 순교자, 세례명은 안토니오. 서울의 양반 출신으로 유업(儒業)을 닦다가 1785년 김범우(金範禹, 토마스)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빌어 읽은 뒤,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薰), 황사영(黃嗣永) 등에게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였고, 그 뒤 자신의 집이 귀양간 왕족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폐궁과 붙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강완숙(姜完淑)과 함께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이인의 처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소개,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여주(驪州), 이천(利川) 등지로 피신해 다녔으나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형으로 순교하였다.
홍의호 [한] 洪義浩
홍의호(1758∼1826).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양중(養中), 호는 담녕(擔寧), 본관은 풍산(豊山),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수보(秀輔)의 아들. 1784년 정시문과 병과(庭試文科丙科)에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지평(持平), 집의(執義), 응교(應敎),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호조 · 예조 · 공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목만중(睦萬中)과 함께 남인(南人)의 공서파(攻西派)의 영수로서 남인 신서파(信西派)와 천주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그 뒤 1803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淸)에 다녀와서 대사간, 동지장연사, 의주부윤(義州府尹), 강화유수(江華留守), 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고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814년 형조판서로 금주령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으나 181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복직되었고 1823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에 다녀온 뒤 1825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정헌(正憲). 저서로는 ≪청구시지≫(靑丘詩誌), ≪담녕집≫(澹寧集)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