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임(1741∼1801). 문신. 천주교인, 세례명은 미상. 자는 숙도(叔道), 본관은 풍산(豊山), 영의정 봉한(鳳漢)의 아들. 176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고 그 뒤 정언(正言), 문학(文學), 사서(司書)를 거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윤행임(尹行恁)의 권유로 입교,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제주도(濟州島)로 유배되었으나 곧 사사(賜死)되었다.
홍낙안 [한] 洪樂安
홍낙안(1752∼?).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풍산(豊山), 후에 희운(羲運)으로 개명, 경북 안동(安東)에서 홍복호(洪復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이듬해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이 일어나자 공서파(功西派)의 선봉에 서서 신주(神主)를 불사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을 고발하는 장서(長書)를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올리는 한편, 진산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에게 사건의 전모를 수사하게 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시키게 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서 권일신(權日身)을 사학(邪學)[천주교]의 교주라 고발하고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학서(西學書)를 반촌(泮村)에서 강습(講習)한 사실[丁未泮會事件]을 고발하여 권일신과 이승훈을 체포케 하였다. 아들 원모(元謀)도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김순성(金順性)과 결탁하여 많은 천주교인을 고발, 처형당하게 하였다.
홍낙민 [한] 洪樂敏
홍낙민(1740∼1801). 순교자. 세례명 루가. 충청도 예산(禮山)사람으로 일찍이 진사(進士)고시에 합격하여 서울에 이사하여 살고 있으면서, 이승훈, 정약용 등과 가까이 지내는 가운데 1784년에서 1785년 사이에 입교하였다. 그는 교리에 밝은 교우로 이름이 나, 1791년 정조(正祖)의 강압에 못 이겨 한때 배교했으나, 그 뒤 계속 기도를 드리고 대소재(大小齋)를 드려 1795년에 체포되어 15일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바 있었다. 1797년에 정조에게 천주교에 대한 보고를 올릴 때, 그 보고가 모호하다는 책망을 들은 뒤, 천주교를 모함하고 교인들을 가혹하게 처단해야 한다는 소(疏)를 다시금 올렸다.
그러나 1801년 대박해로 모든 천주교인에게 역률죄(逆律罪)를 적용하여 체포토록 하니, 홍낙민에게도 2월 9일 체포령이 내려 금부(禁府)에 수감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무수한 고문을 받았지만,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를 달게 받았다. 그는 이러한 고문과 죽음을 전날의 배교에 대한 벌로 기꺼이 받는 듯했으며,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이제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4월 8일 이승훈(李承薰), 최창현(崔昌顯), 정약종(丁若鍾), 홍교만(洪敎萬)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홍금주 [한] 洪今珠
홍금주(180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페르페투아. 서울 교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조모에게서 자랐다. 10세경 입교하여 15세 때 외교인과 결혼한 뒤 냉담한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사망하자 교우들의 권면에 힘입어 다시 신앙을 찾았고 그 뒤 신앙생활을 위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 열심히 수계(守戒)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3월 행랑살이하고 있던 최 필립보의 집에서 최 필립보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했으나 이겨 내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형이 집행될 때까지 6개월 동안 형조옥에 갇혀 있으면서 함께 갇힌 교우들과 죄수들을 돌봐 주며 오직 사랑과 봉사로 옥살이 하다가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홍교만 [한] 洪敎萬
홍교만(1737∼1801). 순교자. 세례명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즉시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아들 홍인(洪鏔)의 권고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다. 입교한 뒤 더욱 열심히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전교에도 힘써 교회 발전에 공헌하였다. 박해가 일자 그는 1800년 12월 아들과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는데 1801년 3월 27일(음 2월 14일)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서울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무수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므로 1801년 4월 8일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