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 韓國殉敎福者聖職修道會 [영] Order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方有龍) 신부에 의해 청설된 방인(邦人) 남자수도회. 당시 서울 제기동본당 주임신부였던 방 신부는 1946년 개성(開城)에서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곧 남자수도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서울 제기동본당 부속건물에서 순교자적(殉敎者的) 정신의 실천으로 보다 더 완전한 신앙생활 보다 더 완전한 구원에의 참여, 자아(自我)를 성화(聖化)하여 이웃을 성화시키려는 공동체생활을 5명의 창설회원과 함께 시작하였고, 1956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창설된 이듬해인 1954년 5월 명동성당의 부속건물을 임시로 빌어 이사한 뒤 1955년 7월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城北洞)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는 노기남(盧基南) 주교와 함께 첫 서원미사를 봉헌하고, 순교사적지(殉敎史蹟地)인 새남터를 본수도회에서 관리토록 하였다. 당시 시유지였던 이곳에 주변 빈민아동들을 위한 공민학교(公民學校) 운영을 하기 위해 가건물을 지어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불하받은 때인 1969년까지 학교운영을 해 왔다. 한편 1968년 3월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수도회유지재단 인가를 받고 1970년부터 새남터를 본격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나 재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1971년 복자유치원을 개원하여 복자수녀회에 그 운영권을 위임하였다. 이 밖에 지방의 분원설립에 있어서는 1958년 당시 대전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 주교의 요청으로 처음 충청남도 천안(天安)에 진출하여 실업계 남자중학교를 운영하다가 지역적인 여건에 따라 1960년 복자수녀회로 인계하여 복자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토록 하였다 1959년 8월에는 당시 광주교구장 헨리(Henry, 玄) 주교의 요청으로 제주도 서귀포(西歸浦)에 3명의 회원이 진출하여 밀감농장을 관리운영하며 마을에서의 전교활동도 시작하여 1976년에는 ‘피정의 집’을 마련하여 주민들과 피정과 연수활동 등에 제공하고 있다. 1961년에는 인천 만수동(萬壽洞)에 진출하여 1962년 소규모 수도원 건물을 마련하고, 1967년에는 수련소를 겸한 수도원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1969년에는 경기도 이천(利川)에 분원을 설치하여 농장과 회원들의 공원묘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965년 첫사제를 배출한 이후 현재 총원장 방유룡 신부 외에 4명의 신부 회원과 18명의 수사회원들이 서울 본원과 새남터 그리고 3개의 지방분원에서 1983년 12월말 현재 활동하고 있으며, 새남터 순교사적지의 개발이 아직 현안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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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대축일 [한] 韓國殉敎福者大祝日

1926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내던 고유축일. 날짜는 9월 26일. 1925년 7월 5일 기해(己亥) 및 병오(丙午)박해 순교자 79위가 시복(諡福)된 후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축일로 지정되었다. 그 후 1968년 10월 6일 병인(丙寅)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자 이들도 이 축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으며 1974년부터는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984년 5월 6일 103위 복자(福者)가 시성(諡聖)됨으로써 이 축일은 폐지되었고, 대신에 9월 20일에 시성된 103위 성인(聖人)을 기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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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인 [한] 韓國聖人

한국 교회의 103명의 성인을 총칭하는 말이다. 103명 중 79명은 1925년에, 그리고 24명은 1968년에 시복(諡福)된 후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5월 6일 모두 시성(諡聖)됨으로써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한국성인의 축일은 9월 20일이고, 축일의 명칭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이다. 103명의 성인 중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3명의 주교와 7명의 신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국적이 비록 프랑스일지라도 그들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으므로 그들 역시 당연히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들이다.

이상 10명의 선교사를 제외한 93명을 순교시기로 구별할 때 1839년 즉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가 67명, 1846년 즉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가 9명, 1866년 즉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가 17명이다. 기해박해의 순교자는 이호영 베드로, 정국보 프로타시오, 김아기 아가다, 박아기 안나, 이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한(韓)아기 바르바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장(張)성진 요셉,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김 로사,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장금(金長金) 안나, 이광렬(李光烈) 요한,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 루시아,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박 큰아기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박후재(朴厚載) 요한,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김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김제준(金濟焌) 이냐시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김 루시아, 이 가타리나, 조(趙) 막달레나, 유(劉)대철 베드로,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 김 데레사, 이 아가다, 민(閔)극가 스테파노, 정(鄭)화경 안드레아, 허(許)임 바오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이경이(李瓊伊) 아가다,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권진이(權珍伊) 아가다,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등이다. 이들 중에는 1839년을 전후하여 이미 1838년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1840년과 1841년에 순교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순교자라고 할 때 이들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병오박해의 순교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임치백(林致百) 요셉,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이간난(李干蘭) 아가다,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등이다.

병인박해의 순교자는 유정률(劉正律) 베드로, 남종삼(南鍾三) 요한, 전장운(全長雲)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장주기(張周基) 요셉, 황석두(黃錫斗) 루가, 손(孫)자선 토마스, 정(鄭)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르로, 손(孫)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한원익(韓元益) 요셉, 정(鄭)원지 베드로, 조윤호 요셉, 이윤일 요한 등이다.

순교 종류별로는 참수(斬首)가 77명으로 가장 많고, 교수(絞首)가 15명, 병으로 또는 매맞아 옥사한 이가 11명이다. 순교지별로는 서소문 밖 네거리가 44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 새남터가 11명, 당교개가 9명, 전주의 숲정이가 7명, 충청도의 수영(水營)인 보령(保寧)의 갈매못이 5명, 평양, 대구, 공주가 각기 1명이고 나머지는 서울 감옥에서 교수되거나 옥사하였다. 남녀별로 볼 때 남자가 56명이고 여자는 9명이 더 적은 47명이다. 연령별로는 13세의 유대철이 최연소자이고, 최고령자는 78세의 유 세실리아이다. 40대가 30명으로 제일 많고, 다음 50대가 23명, 30대가 20명, 20대가 19명, 10대가 4명, 60대가 4명, 70대가 3명으로 나온다. 출신지역별로 볼 때 서울이 27명으로 제일 많고, 다음 경기도가 모두 21명인데, 그중 수원, 광주, 시흥은 각각 4명, 이천은 3명, 용인은 2명, 양주, 고양, 양근, 개성이 각각 1명씩이다. 총청도는 15명인데,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면천의 솔뫼가 3명, 홍주가 3명, 진잠, 임천이 각기 2명, 정산, 덕산, 충주, 연풍이 각각 1명씩이다. 강원도는 회양이 1명, 황해도는 서흥이 1명, 평안도는 평양의 논재가 1명이다. 나머지 20여명은 출신지가 미상인데 개중에는 시골출신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서울로 이사해 와 살았다.

한국성인들의 신분과 직업은 아주 다양하다. 신분으로 말하면 양반, 중인, 상민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승지(承旨)나 선공감(繕工監)과 광흥창(廣興倉)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상업, 농업, 약국, 인쇄, 서사업(書寫業),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한 사람들이 많다. 집안 형편은 거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편이었으나 최경환, 김효주, 유진길, 김제준, 정화경, 김성우, 임치백 등과 같이 부유한 편의 집안도 있었다.

신앙경력에서 볼 때 태중교우, 즉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들은 모두 34명인데, 그 중 순교자의 자손만도 16명이나 된다. 이 16명은 김대건 신부와 그의 부친 김제준, 그의 당고모 김 데레사를 위시하여 정하상과 정정혜 남매, 현석문과 현경련 남매, 홍병주와 홍영주 형제, 박후재, 남이관, 최창흡, 조증이, 고순이, 박종원, 손소벽 등이다. 순교자의 자손이 아닌 단순한 태중교우로서는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최경환, 김 율리엣타, 이 가타리나, 정화경, 이문우, 최영이,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전장운, 최형, 손자선, 한원익, 정원지, 조윤호, 이윤일등 18명이다. 이른바 구교우는 11명 정도인데, 구교우란 이미 입교한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호경, 박아기, 이 아가다, 김업이, 한아기, 권득인, 김장금, 김 루시아, 조 막달레나, 조화서, 이명서 등인데, 그중 모친을 교우로 가졌던 사람이 5명, 부친을 교우로 가졌던 사람이 한 명이다. 이로써 보아도 어머니의 신앙적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문교우로서, 즉 새로 입교하여 순교까지 하게 된 이들도 45명이나 된다. 원귀임, 홍금주, 유대철, 이 아가다, 손선지 등처럼 어려서 또는 소년 소녀 시절에 입교한 이들도 약간 있으나 대부분은 장성한 후 입교하였는데 중년에 이르러 입교한 사람들이 제일 많다. 중년에 입교한 이들 중에 이광헌, 박희순, 남명혁, 장성집, 김 로사, 권희, 김효주, 김효임, 유진길, 허계임, 전경협, 조신철, 박봉손, 유 세실리아, 한영이, 민극가, 남경문, 장주기, 황석두, 정문호 등이 있다. 개종은 보통 가족이나 친척의 권고로, 또는 교우의 권고에서 이루어졌는데, 전자의 경우, 특 부모, 형제, 부부, 친척 등의 권고가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미신자로서 잡혀 옥중에서 영세한 사람도 2명이나 있는데, 김아기(아가다)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고, 임치백은 옥중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그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영세하였다.

한국성인 93명 중 성직자는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뿐이고 나머지 92명은 모두 평신도이다. 그러므로 한국성인의 교회활동과 순교는 그 자체가 한국 교회 평신도상이요 평신도적 영성(靈性)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교회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회장과 복사(服事)를 들어야 할 것이다. 회장은 이광헌, 남명혁, 최경환, 정하상, 김제준, 남이관, 정화경, 민극가, 홍병주, 홍영주, 박종원, 이문우, 김성우, 현석문, 한이형, 장주기, 손선지, 한원익, 이윤일, 정의배, 황석두 등 21명에 이른다. 물론 회장 중에는 동시에 복사를 겸했던 이들도 있다. 또 조화서, 남경문과 같이 단순히 복사로만 활동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회장들은 선교사를 대신하여, 또한 선교사와 같이 공소를 운영하고,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는 본연의 활동 외에, 이 시기에 있어서 특히 목자없는 교회를 돌보고, 성직자를 영입하고, 영입된 성직자의 신변을 보장하고 방인 성직자 양성 등을 도운 일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정하상과 현석문 등은 이런 일들을 솔선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이고 유진길, 조신철, 이광렬 등은 회장이 아니면서도 성직자 영입운동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최경환, 현석문과 같이 옥중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순교자의 행적을 수집하는데 진력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또 황석두 회장같이 선교사에게 글을 가르치고, 교리서의 번역과 편찬을 도운 이들도 있었는데. 남종삼, 전장운, 최형 등은 회장이 아니면서도 선교사들의 인쇄와 출판을 도왔다. 현석문의 누이 현경련은 유일하게 여회장으로서 교리를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고, 임종시의 유아에게 대세를 부치고, 순교자에 관한 증언을 수집하고, 선교사의 시중을 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연희, 권희, 유 세실리아, 정정혜, 조증이, 고순이, 한영이, 김 데레사, 권진이 등도 회장들의 부인 또는 친척이라는 입장에서 현경련과 비슷한 활동을 하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 시기의 순교 성인들에게 공통된 점은 재와 애긍, 기도와 묵상, 영적독서로써 자기 성화를 꾀하는 한편 외교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우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고, 가난한 자와 병자를 방문하고, 임종시의 유아에게 대세를 부치는 등 다양한 선행(善行)을 통해 사주구령(事主救靈)과 애주애인(愛主愛人)에 전념하였다. 또 증거자들 중 옥중에서 친척이나 교우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권고하기를 그치지 않은 순교자들도 많았다.

선교사 10명을 포함한 한국성인 103위는 모두가 순교 성인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성인이 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당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박해자들 앞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자 그들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러한 순교는 사랑의 최고의 증거이다(교회헌장 42항). 왜냐하면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요한 15:13). 그러므로 한국성인의 순교는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증거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그것은 한국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의의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을 국시로 삼았기 때문에 군부(君父)의 절대권을 내세워 군부에 대한 충효(忠孝)를 부동의 국민도덕으로 고수했었다. 이런 국가체제 아래서 하느님에 대해 최고의 충성을 나타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순교자들은 군부에게 최고의 충성을 요구하는 박해자들 앞에서 “사람에게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고 한 사도들과는 다른, 즉 “천지신인(天地神人) 만물을 조성하시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시는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천주를 결코 배신할 수 없습니다”는 특수한 형식의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무부무군의 종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천주교를 무군 뿐 아니라 무부의 종교로 낙인찍으려 한 것은 천주교인들이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효를 거부한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나 형제나 자녀들보다 그를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마태 10:35-37). 주님의 이 요구는 무엇보다도 한국 순교자들에게 가혹한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만큼 혈연과 가족공동체가 중시되는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보다는 육정을 못 이겨 배교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최대의 사랑의 증거, 즉 순교를 통한 애주만유지상(愛主萬有之上)은 오로지 이 육정을 이겨내느냐 못 이겨 내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육정을 이겨냈을 때 그것은 도리어 서로의 순교를 격려하는 초자연적 사랑으로 승화하였다. 한 가족에서 여러 순교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광헌과 권희, 남명혁과 이연희, 남이관과 조증이, 조신철과 최영이, 최창흡과 손소벽, 박종원과 고순이는 부부지간이었고, 김대건과 김제준, 유대철과 유진길, 조화서와 조윤호는 부자지간이었고, 이광헌과 이 아가다, 최창흡과 최영이는 부녀지간이었고, 유 세실리아와 정정혜, 허계임과 이정희 · 영희, 조 막달레나와 이 가타리나, 한영희와 권진이는 모녀지간이었고, 정하상과 정정혜, 이호영과 이 아가다, 이광헌과 이광렬, 박희순과 박 큰아기, 이정희와 이영희, 김효주와 김효임, 이영덕과 이인덕, 홍병주와 홍영주, 현석문과 현경련은 형제지간이었다. 3명 이상의 순교성인을 배출시킨 가족도 여럿이 있었으니, 정하상 가족은 모친과 동생 등 3명이 함께 순교하였고, 이광헌은 아내와 딸, 동생 등 4명, 최창흡은 아내와 딸, 사위 등 4명이 함께 순교하였다. 심지어 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가족도 있었으니 즉 허계임은 딸 둘과 시누이, 외손녀 등과 함께 순교함으로써 한국 성인 가족 중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시키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崔奭祐)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 下, 분도出版社, 1980 / 긔히일긔, 서울 1905 / 아드리앵 로네 원저 안응렬 옮김, 한국七十九위순교복자전, 가톨릭出版社, 1945 / 이병영, 어둠을 헤친 사람들, 성바오로출판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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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매리지엔카운터 [한] 韓國∼ [영] Marriage Encounter of Korea

부부의 만남으로 얻어지는 기쁨을 찾기 위하여 1958년 칼보 가브리엘 신부와 몇몇 뜻있는 부부에 의해 스페인에서 시작된 평신도 단체. 1976년 2월 한국 진출. 부부간의 진정한 만남으로 통하여 성가정(聖家庭)을 이루고 혼인성사의 참뜻을 재인식코자 하는 이 모임은 결혼한 지 2년 이상된 부부이면 회원으로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지도신부 1명과 세 쌍의 부부가 한 팀이 되어 2박 3일, 일반적으로 주말 동안 어떤 주제에 대하여 발표하고 질문을 하면서 대화의 내용을 더욱 진지하게 하고 이를 통하여 일치할 수 있도록 한다. 1976년 2월 한국에서의 첫 모임이 서울 분도회관에서 개최된 뒤, 1977년부터 현재까지 수원 ‘말씀의 집’에서 모임을 가져왔다. 또 모임 이외에 미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본부는 서울 옥수동(玉水洞)에 있고 전국적으로 1,800여 쌍의 부부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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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지도서 [한] 韓國敎會指導書 [라] 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

1931년 한국 공의회의 지시에 의하여 1932년에 간행된 한국 교회 공동지도서. 모든 지방교회는 우선 전체 교회에 공통되는 일반 교회법을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그 지방 고유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오랜 경험에 의거하여 그 지방 나름대로의 법을 제정하여 이를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회장직은 한국 교회 특유의 제도인데,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특수한 법과 국정을 수록한 책자가 한국 교회지도서이다.

한국 교회 최초의 지도서는 조선교구의 제4대 감목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1857년 8월 2일자로 반포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이다. 베르뇌 주교는 이 윤시를 통해, 신자 생활전반에 걸친 지침, 즉 칠성사(七聖事)를 받는 데 지켜야 할 규정과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해 세운 성영회(聖嬰會)에 대한 규식을 시달하였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교서를 회람형식으로 전달하였기 때문에, 이를 윤시(輪示) 또는 윤음(輪音)이라고 하였다.

1887년 9월 21일에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한국교회의 법규’(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ee)라는 표제를 붙여, 일종의 교회법전이라고 말할 한국 교회 지도서를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비로소 통일된 법전을 갖게 되었고 어느 지방에서나 같은 규칙에 따라 교회의 모든 행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1911년 대구교구가 탄생하기까지 유효하였다. 이 지도서는 3장으로 구성되어 제1장은 칠성사, 제2장은 선교사, 신자, 회장, 제3장은 공소와 신심회(信心會)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1912년에 대구교구 지도서가 나온 데 이어, 1922년에는 서울교구 지도서가 나왔고, 교구가 증설됨에 따라 각 교구마다 고유한 지도서를 발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 나름대로 교구를 관할하고 신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통일성의 결여는 한국 교회 전체를 지도하고 발전시키는데 여러 가지 모순을 가져와, 공통된 지도서 발간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이에 한국의 모든 교구장들은 1931년 한국공의회를 소집하고 ≪디렉토리움 콤무네≫(共同의 指導書)의 간행을 결의하였고, 그 명령으로 1932년 ≪한국 교회 공동지도서≫를 간행, 그 해 9월 26일 5교구장 공동명의로 전 한국 교회에 반포하였다.

이 지도서는 한국 공의회에서 의결한 총 74조의 법령을 바탕으로 이를 부연하고 체계화시켜 총 542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년간 한국 교회의 지도를 맡아 왔다.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디렉토리움’(Directorium)으로 불린다.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제42호, 제7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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