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라] Epistola Beati Pauli Apostoli ad Philippenses [영] Epistle to t

1. 집필상황 : 바울로의 옥중 서간의 하나이며 내용과 집필상황으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와 연결된다. 필립비는 마케도니아주(州)[현재의 그리스 북부지방]의 로마인들의 식민도시였다.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50~51년경) 때 처음으로 유럽에 건너가 이곳에서 교회를 세웠다(사도 16:12-40). 바울로는 이 교회와 특별히 친선관계를 맺어 이 교회에서만은 물질적 도움을 받아들였다(필립 4:15-16). 이런 도움에 대한 감사가 이 편지의 집필 동기가 되었다. 필립비 교회에서 옥중에 있는 바울로에게 에파프로디도를 통해 영치금을 보냈는데 에파프로디도는 바울로와 함께 있는 동안 중병을 앓게 되었다. 이제 바울로는 그를 이 편지와 함께 필립비 신자들에게 돌려보낸다(2:25-30). 이때에 바울로가 어느 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옛날에는 사도행전을 근거로 하여(사도 28장) 로마를 집필장소로 보았다. 그렇다면 집필연도는 63년경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자들은 에페소를 집필장소로 본다. 그들은 바울로가 머무르고 있던 장소와 필립비 사이의 잦은 왕래(에파프로디도, 그 병에 대하여 소식을 전한사람, 디모테오, 바울로의 계획 등)를 그 이유로 든다. 본서를 에페소에서 썼다고 전제하면 이 사실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는 말이 없다. 그러나 바울로가 2~3년간(사도 19:8-10, 20:31) 지냈던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설을 받아들이면 집필연도는 56년경이다.

2. 내용 : 바울로는 편지의 시작에 수신인들을 위해 기도드리고(1:3-11)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다음(1:12-26) 신자들을 훈계한다(1:27-2:18). 훈계 중에서 주로 일치와 겸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공동체 안에 싸움과 분열이 생긴 것 같다. 2장 19-30절에서 바울로는 에파프로디도와 디모테오의 파견과 함께 자신의 여행 계획을 밝힌다. 그리고 3장에서 그는 열렬하게 이단자들을 경고한다. 끝에 그는 다시 신자들을 훈계하며(4:1-9), 그들이 보낸 도움에 감사한다(4:10-20). 본서 가운데서 소위 ‘그리스도 찬미가’라 부르는 2장 6-11절의 구절은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는데 신학과 전례에 큰 영향을 주어 왔다. 바울로는 여기서 이미 교회에서 사용된 그리스도 찬가를 약간 수정하여 옮겨 쓴 것 같다. 본서는 바울로가 옥중에서 기록한 것이지만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가깝게 지냈던 교회에 보낸 편지이기에 바울로의 서간 중에서 가장 인정이 넘친다.

어떤 학자들은 본서의 단일성을 의심한다. 그들은 어조의 차이, 연결의 부재와 상황의 차이를 들면서 사도가 쓴 두 통이나 세 통의 편지를 어떤 제자가 한데 모아 마치 한 통의 편지처럼 편집했다고 한다. 그 중에 1장 1절에서 3장 1절까지, 4장 2절에서 7절까지와 10절에서 23절까지의 부분이 바울로가 56년경에 에페소에서 보낸 편지이며 3장 2절에서 4장 1절까지와 4장 8, 9절의 부분이 그가 그 뒤에 고린토에서 보낸 편지라고 주장하는 설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晋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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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 네리 [원] Filippo de Neri [관련] 네리

⇒ 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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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 [라] Philippus

Philippus(?~?). 12사도의 한 분. 축일은 5월 3일.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으로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를 따라 12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나타나엘을 예수에게 소개했고(요한 1:43), 주로 예수와 12사도의 식량공급을 맡아 하였다(요한 6:5-7). 사후 그의 유해는 로마의 12사도 성당(Dodici Apostoli)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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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원] Philippines

적도의 약간 북쪽, 아시아 대륙 남동쪽의 서 태평양에 산재하는 섬들로 구성된 도서국가. 면적은 30만㎢, 총 인구는 5,074만명(1982년 현재)이다. 1521년 마젤란의 스페인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소국(小國)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사들을 파견했으며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도미니코회 수사 살라자르(Salazar)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되어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교회행정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의 그리스도화에 힘썼다. 1898년 미서(美西)전쟁에서 패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의 각 교파에서도 이 지역에 선교활동을 폈다. 1902년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필리핀 독립교회’가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G. Aglipay) 대주교에 의해 설립되었다. 교의나 전례는 모두 가톨릭과 같으나 교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로마 가톨릭과 다르다. 현재 필리핀의 가톨릭 신자수는 4,272만 3,000명(1982년 현재)이며 66개의 교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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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라] Pilioque [관련] 동방이교

‘그리고 그 아들’이라는 뜻의 라틴어. 성령의 이중적 발출을 표현하는 교의적(敎義的) 문구. 원래의 니체아 신경(信經)에는 없었으나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서방교회에 의해 삽입되어 “아버지와 그 아들로부터 나신 성령…”이라고 쓰이게 되었다. 제3회 톨레도(Toledo) 교회회의(589년)에서 처음 삽입되었으며 796년 프리울리(Friuli)의 시노드에서 아킬레이아의 파울리노(Paulinus of Aquileia)에 의해 그 삽입이 옹호되었으며 전(全)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암송되기 시작한 800년경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847년 프랑크왕국의 수도자들에 의해 이것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 위에 있는 그들의 수도원에 소개되었을 때 성 사바스(St. Sabas)의 동방교회 수도자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다.

이 문제가 레오 3세에게 알려졌을 때 그는 교의적인 문제에서는 동의하였지만, 신경에 필리오케를 첨가하는 것은 막으려고 하였다. 그는 이 신경을 필리오케가 없는 원래의 형태대로 성 베드로의 묘지에 기탁된 2개의 은제 테이블에 새겨 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필리오케는 미사에서 계속 불려졌고 1013년경에는 로마 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신경에 첨가되었다.

이 문구를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던 포시우스(Photius) 시대 이후로 필리오케는 정교회가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필리오케를 둘러싼 이들 양 교회 사이의 논쟁은 리용(1274년)과 피렌체(1439년)에서의 동서방 재결합 공의회 때 그리스 정교회측이 비록 신경에 필리오케를 첨가하는 것은 거절하지만 그 교의는 승인함으로써 중단된 듯 보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1874년과 1875년에 본에서, 1912년에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구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그리고 동방교회의 대표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긍정적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 동방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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