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klos(410?~485). 그리스 철학자로서 신(新)플라톤주의자. 비잔티움 출생. 가톨릭 교회를 적대하였으나 중세기와 문예부흥기의 그리스도교 철학 및 신학에 큰 영형을 끼쳤다. 리시아의 산두스(Xanthus)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사학, 로마법, 수학, 철학을 공부한 뒤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원장 시리아누스(Syrianus)의 지도 아래 철학공부를 계속했고 시리아누스 별세 후 원장직을 계승, 그 때문에 디아도쿠스(Diadochus, 계승자)라고도 불린다.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현존하는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① 문학분야 : ≪헤시오두스의 노동과 나날 주석≫ ② 자연과학 : ≪유클리드의 Elements 주석≫, ≪일 · 월식론(日 · 月蝕論)≫, ≪물리학의 요소≫ ③ 종교 ≪성가수편(聖歌數篇)≫, ≪성용(聖用) 예술≫, ≪칼데아 철학론≫ ④ 철학 : ≪Parmenides 주석≫, ≪Timaeus 주석≫, ≪Alcibiades I 주석≫, ≪Catylus 주석≫, ≪공화국 주석≫, ≪그리스도교에 대립하는 세상의 영원성 옹호 18개 논증≫, ≪플라톤 신학≫, ≪섭리에 관한 열 가지 의문≫, ≪섭리, 운명, 자유의지론≫, ≪악의 존재≫, ≪신학의 요소(要素)≫. 이 가운데 중세와 문예부흥기의 저술가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것은 마지막 네 권의 저서이며 특히 ≪신학의 요소≫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그밖에 플라톤 얌블리쿠스(Iamblichus) 및 시리아누스의 영향을 받아 쓰여진 ≪Weltanschauung≫가 있다.
프레시디움 [라] praesidium [관련] 레지오 마리에
레지오 마리에의 가장 하부조직의 하나. 프레시디움이란 로마 군대용어로 어떤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거나 특별한 사명을 가진 군단의 한 부대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이것이 레지오 마리에의 조직용어로 되면서 세부조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평화의 모후’니 ‘바다의 별’과 같은 마리아에 대한 존칭을 조직명으로 채택하여 사용한다. (⇒) 레지오 마리에
프레몽트레회 [한] ~會 [라] Ordo Praemonstratensis [영] Premonstratensians
의전수도회 중의 하나로 성 노베르토(St. Norbertus)에 의해 1120년에 창설된 수도회. 전(前)세기의 관상적인 수도생활을 13세기 탁발수도회의 활동적인 수도생활과 조화시켰으며 성 아우구스티노 회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1126년에 교황의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서부 유럽, 특히 헝가리 지방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의 엄격한 규칙이 다소 완화되면서 개혁과 더불어 차차 독립적인 수도원들이 창설되었으나 프랑스혁명으로 19세기초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최근에는 복구의 노력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통걸루(Tongerloo)에 그 본부를 두고 있는 벨기에에서 강하다. 1984년 현재 1,32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혁명 [한] ~革命 [프] Revolution francaise
18세기말(1789~179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부르즈와 혁명. 프랑스혁명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이면서 동시에 앙생 레짐(舊體制, ancien regime) 아래서 꾸준히 성장해온 산업자본가가 봉건영주와 성직자들의 지배기반을 파괴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과정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봉건제도의 붕괴과정에서 찾아져야 되겠지만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국가재정의 궁핍, 조세부담의 불공평(귀족과 성직자는 면제, 농민과 시민은 과중한 세부담)과 함께 의회정치를 부르짖는 몽테스키외의 주장, 루소의 성선설(性善說)과 국민주권설, 계몽사상 등의 혁명적인 사상의 영향, 부르봉왕조의 실정(失政)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6세는 귀족(300명), 성직자(300명), 시민(600명)으로 구성된 ‘3부회’를 소집하여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자유주의적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개혁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습격 사건이 터지고, 전국적인 규모로 농민소요와 소생산자 폭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자유주의적 귀족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민의회는 봉건제도를 완전히 폐기한다”는 법률혁명(Revolution Juridique)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법률혁명의 한계는 농노제, 영주재판권, 교회의 십분의 일세 등을 폐지했지만 봉건적인 토지소유관계는 그대로 지속시켰다는 데 있다. 1792년 봄 농민봉기는 격화되었고 대외전쟁에 의한 위기의식이 심화되면서 혁명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적 귀족의 손에서 중산 생산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농민, 소생산자들과 연합하여 6월에 봉건지대의 무상폐지를 선언하고, 8월에 왕정을 폐지하여 파리 코뮌을 형성시켰다. 이러한 혁명은 1804년 제1제정의 시작과 함께 종언을 고하였다.
한편 혁명의 교회에 미친 영향 또한 대단히 크다. 앞서 말한 십분의 일세의 폐지, 면세특권(免稅特權)의 폐지에 뒤이어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국가가 감독 아래 재산목록이 작성되고 1790년부터 매각(賣却)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2월에는 수도원이 해산당하고, 수도자들은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성직자에 대한 연봉도 폐지되고, 7월의 성직자공민헌장(constitution civile)은 프랑스 교회를 로마에서 분리시켰고, 주교는 개신교와 유대교도 포함된 선거단체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들은 헌장에 선거하기를 거부하였고, 1791년 11월 프랑스 혁명정부는 선서거부자(insermentes)에게 국외추방령을 내리고, 1792년 9월부터 혐의자 1,400명을 파리감옥에서 학살하였다(소위 9월 살육).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시복되어 복자의 품에 올랐다. 또 1793년 11월 그리스도교는 폐지가 선포되고 ‘이성의 여신’에 대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1795년 2월 ‘전례의 자유’가 보장되어 종교의 자유도 촉진되었다. 그러나 1797년 다시 공포정치가의 손에 권력이 넘어가고, 외국에서 돌아온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 처형당하였다. 1799년 11월 이후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고, 1801년 콩코르다트협약에 의해 종교적으로 평화를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P. de La Gorce, Histoire religieuse de la Revolution francaise, 5v., Paris 1909~1923 / A. Latreille, L’Eglise catholique et la revolution francaise, 2v., Paris 1946~1950 / A. Aulard, La Revolution francaise et les congregations, Paris 1903; Christianity and the French Revolution, tr. Lady Frazen, London 1927.
프랑스학파 [한] ~學派 [영] French School [프] Ecloe Francaise
17세기 프랑스에서 발달한 영성(靈性)교리 학파. 프랑스 오라토리오회(會)의 창시자 추기경 베륄(Pierre de Berulle), 콩드랑(Charles de Condren), 그리고 올리에(Jean Jacques Olier) 등이 이 학파의 대가이며 이 밖에 성 에우데스(St. John Eudes)와 몽포르(De Montfort) 등이 이 학파의 신학을 가톨릭 영성생활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학파는 기초를 둔 특수한 사제 양성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프랑스학파를 통해 프랑스 성직자의 내적 쇄신을 위한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프랑스의 전 가톨릭 개혁에 고유한 특징이 부여되었다. 이 학파의 영성 교수법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원리들이 있는데, 명확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개념과 그리스도의 ‘천상의 희생’에 의한 신비체의 교리에 대한 통찰력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실지로 나누는 그리스도적인 생활과 기도를 권하는 것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