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한] 平日 [영] ferial days [그] feria

일주일 가운데 주일(Dies Dominica)과 토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을 전례상(典禮上) 평일이라 부른다. 유태인의 관습에 따르면, 안식일인 토요일의 다음 날을 제1평일이라 불렀고, 월요일을 제2평일(feria secunda), 화요일을 제3평일(feria tertia), 수요일을 제4평일(feria quarta), 목요일을 제5평일(feria quinta), 금요일을 제6평일(feria sexta)이라고 불렀다. 그 뒤 제1평일인 일요일은 ‘주의 날’로 바뀌었고, 나머지 날들이 평일로 정착된 것이다.

지금은 주일 다음에 오는 주간일을 평일이라고 보면 된다. 각 요일은 고유한 중요성에 따라 경축된다. ① 재의 수요일과 성주간의 월∼목요일은 모든 다른 평일에 우선한다. ② 12월 17∼24일의 대림절 평일과 사순절 평일은 모든 의무적 기념에 선행한다. ③ 다른 평일들은 대축일과 축일에 양보하고 기념이 있으면 평일과 혼합해서 지낸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양본당 [한] 平壤本堂 [관련] 평양교구

1985년 창설된 평안도 최초의 본당. 1943년 이후 평양교구 주교좌 본당. 주보는 성 미카엘(1900∼1947년), 평화의 모후(1947년 이후).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는 1864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전교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교우들이 산산이 흩어지기도 했으나 1881년부터 전교회장 김기호(金起浩)의 3년간에 걸친 전교로 다시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뒤 차츰 교우집단이 생기게 되자 황해도 수안(遂安)본당 관할의 공소지역으로 되었다. 그러던 중 1895년, 수안본당 주임이던 르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평안도 담당신부로 임명되어 평양 외성(外城)에 부임함으로써 평양본당은 창설되었다. 이때 전국의 교우수가 3만여명이었음에 비해 평안도의 교우수는 고작 437명에 불과한 열악한 교세였다.

본당 창설 신부인 르장드르 신부는 평양 외성의 산명모루(山明隅)[平川里]에 주거를 정하고 사가(私家)를 사들여 임시성당으로 사용하며 교세 신장에 전념하다가 1898년 본당을 평양 시내의 장대재[將臺峴]로 옮긴 뒤 곧 전임되고, 후임으로 르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부임하여 1900년 봄에 폭 24척(尺), 길이 81척, 종각 높이 57척의 연와조 성당을 건축하였다. 르메르 신부는 이후 20여년간 사목하면서 1905년 기명(箕明)학교, 1906년 성모여학교 등을 개설하고, 1909년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을 초빙하여 교육과 전교를 전담케 하는 등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놓았다.

그 뒤 1923년 10월 르메르 신부가 수원(水原)으로 전임되자 보좌이던 김성학(金聖學)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평안도 일대에서 사목하며 평양교구 신설을 준비했고, 그 결과 1927년 평양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 신설되면서 본당 내에 교구본부가 설치되어 평양본당은 명실공히 평양교구의 중심본당이 되어 메리놀회 신부들이 주임신부로 부임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본당 운영의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를 통합한 6년제 성모보통학교가 정식인가를 받게 되고, 1932년에는 2대 평양교구장 모리스(Morris, 睦) 신부가 본당 주임신부를 겸하게 되면서 사제관의 신축, 성당의 증축을 보았고, 이때를 전후해서 본당 청년회에서는 많은 강연회를 개최하여 평양 일대에 천주교를 널리 소개하였다. 또한 1934년 본당에 양로원과 무료숙박소가 개설되었고, 이해 2월 평양 시내에 신리(新里)본당을 분할시킴과 동시에 본당명이 관후리(舘後里)본당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천주교 150주년 평양교구 기념행사를 본당에 유치하여 성대히 거행하였다.

1940년 평양시내에 기림리(箕林里)본당을 분할시켰고,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전쟁’ 발발 후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신부들이 일제에 체포 구금되자 보좌신부이던 홍건항(洪健恒) 신부가 잠시 본당을 사목하다가 1942년 2월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되면서 본당 주임신부를 겸하게 되었다. 1943년 3월 홍용호 신부가 정식으로 교구장에 임명되고 3월 21일 착좌식이 관후리본당에서 거행됨으로써 관후리본당은 평양교구 주교좌 본당이 되었다.

1944년 2월 일제에 성당과 부속건물을 징발당하여 산정현(山亭峴)의 예배당으로 성당을 옮겨야 했고, 8.15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과의 끈질긴 교섭 끝에 1946년 3월 성당을 다시 찾아 이듬해 전 교구민의 참여하에 대규모 성당 건축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납치되고 이어 6월에 본당 주임 김필현(金泌現) 신부가, 12월에 보좌 서운석(徐雲錫) 신부가 납치됨으로써 결국 관후리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는 1932년 조직된 부인회 · 성로회(聖路會) · 가톨릭 소년군, 1934년 조직된 가톨릭운동연맹 관후리 지회, 성가대, 성체회, 자치위원회 등이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는 성모보통학교, 성모유치원, 성모학원, 양로원, 무료숙박소 등이 있었다. (⇒) 평양교구

[참고문헌] 平壤敎區史編纂委員會 編, 天主敎平壤敎區史, 분도출판사, 1981 / 교회와 역사, 제83호,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6. 25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양교구신우회 [한] 平壤敎區信友會

8.15 광복 후 북한 공산당의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평안남북도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모여 1949년 11월에 발족한 평신도 신심단체. 6.25전쟁 동안에도 이 회의 활동은 활발하여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부산지부를 발족케 되었다. 1955년 12월에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新門路)에 회관을 매입 운영하여 회의 주요활동인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 후원사업 및 성소(聖召) 계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1960년 3월과 1962년 1월 서울 · 부산 교구장과 평양교구서리 캐롤(Carroll, 安) 몬시뇰과의 협약에 따라 평양교구 출신 사제들이 다른 교구에서 봉직하도록 하고, 또 1970년 4월 서울 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추기경과의 협약에 따라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이 서울대교구에 편입됨에 따라 회원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회관도 처분하였다. 1977년 12월 명동성당에서 평양교구 설정 50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1981년 1월 ≪평양교구사≫를 편찬해 냈다. 현재 사무실은 서울 도봉구 창동에 소재하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양교구 [한] 平壤敎區

북한 침묵교회에 속하는 교구의 하나. 1927년 3월 17일 서울교구에서 지목구(知牧區)로 분리되어, 이미 1923년부터 이곳에 진출하여 선교 중이던 미국 메리놀(Maryknol)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평안남북도 지방의 포교사업이 위임되었다. 평안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어, 1968년 시복된 22위 복자(福者) 중에 평양이 유정률(劉正律)과 황해도의 우세영(禹世英)의 2명이 끼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60년을 전후해서인 것 같다. 즉 황해도 출신의 김기호(金起浩), 이득보(李得甫) 등이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평안도 지방에까지 들어가 전교에 힘쓴 것이 그 시초였고, 이어 그 때 입교한 정태정(鄭泰正)이 평안도 지방 전교에 힘쓴 결과, 점차 여러 곳으로 전파되어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교세가 점차 늘어나자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1883년에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를 평양에 보내 정식으로 포교활동을 폈으나, 1년 뒤에 프와넬 신부가 서울로 전임되자 다시금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다가 10년 뒤인 1895년에야 르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평양외성에 기와집을 마련하고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포교활동을 재개하였고, 이어 1898년 르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부터 1909년에 평양 관후리(舘後里)를 비롯하여, 진남포(鎭南浦), 영유(永柔), 섭가지, 의주(義州), 신의주(新義州), 비현(批峴) 등에 연이어 교회가 신설되었다. 여기에 1923년부터 메리놀회원이 진출하여 선교활동에 힘쓰고, 1924년에는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마저 진출하니 교세는 날로 더해가, 1927년에는 지목구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초대 지목(知牧)에 전 교황사절이던 번(Byrne, 方) 주교가 취임하였고, 번 주교가 메리놀 전교회의 부회장으로 전임되자 모리스(Morris, 睦) 신부가, 그 다음으로 부드(Booth, 夫) 신부가 교구장서리로 재임 중 1939년 7월 1일에 로마 교황청은 평양교구를 대목구(代牧區)로 승격시켰다. 이에 따라 오셰아(O’Shea, 吳) 신부가 그 해 10월 29일에 주교승품식을 갖고 교구장으로 정식 취임했는데, 그 동안 평양교구는 문맹퇴치를 비롯한 출판 문화사업과 각종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42년 소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日帝)는 오세아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를 감금하고 끝내는 국외로 추방하기에 이르러, 한때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주교가 교구장 서리로 평양교구장을 겸임하였고, 1944년 4월 17일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두 번째 방인주교로 승품되어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홍 주교는 일제 말엽과 광복 뒤 공산 치하에서 천주성업을 위해 악전고투하다가 1949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1950년 유엔군은 평양이 수복되자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교회 복구작업에 착수했으나 중공군의 남하로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 다시금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다만 월남한 신자들만이 통일될 앞날을 기다리며 교구장서리인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교구 복구를 위한 기구와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天主敎平壤敎區史, 분도출판사, 1981.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신도위원회 [한] 平信徒委員會 [라] Pontificium Consilium pro Laicis [관련] 교황청위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고조된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교황청 안에 설치된 위원회. (⇒) 교황청위원회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