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특히 로마 교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8∼9세기경 프랑크 왕국에서 조작된 문서. 중세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따르면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1세(재위 : 314∼335)에게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및 예루살렘에 대한 수위권과 로마와 서방의 여러 주(州) 및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통치권, 그리고 성직자들에 대한 최고 재판권을 부여하였다. 이 문서는 위서(僞書)와 교회법령집 속에 있었는데, 교황권의 반대자들에게까지도 권위를 지녔었다. 1054년 교황 레오(Leo) 9세가 케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처음 사용된 뒤부터 그의 계승자들에게 의해 같은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15세기에 들어서야 이의 진실 여부가 의심받게 되었으며, 쿠사의 니콜라오(Nicholas of Cusa)와 주교 페콕(R. Pecock) 및 발라(L. Valla)에 의해 그것이 거짓 문서임이 밝혀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영] Councils of Constanti
① 제1차(381년) : 제2차 세계공의회.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1세에 의해 381년 소집, 주된 의제는 니체아 공의회 이후 지속되어 오던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논쟁을 니체아 신경에 의거하여 결말짓고 동로마 교회를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시오(Melitius)의 주재로 150명의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하였다. 서로마제국의 주교나 교황대사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양교회에서 모두 제2차 세계공의회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스도 교리에 관련하여 니체아 공의회의 합의들이 확인되었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아폴리나리아니즘(Apollinarianism)을 단죄함으로써 보위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소위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이 공의회와 직접 관련은 없는 것 같다.
② 제2차(553년) : 제5차 세계공의회.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에 의해 삼헌장(三憲章)에 관련된 오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소집되었다. 참석자는 거의 동방교회의 주교들이었으며 이들은 삼헌장을 단죄하고 저자들, 즉 테오도로(Theodore of Mopsuestia), 테오도레트(Theodoret of Cyrus), 이바스(Ibas of Edessa) 등이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물든 것으로 인하여 파문하였다. 그 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참석을 거부하였던 비질리오(Vigilius) 교황은 이에 항의하였으며 교황과 황제는 서로 불목하였으나 황제는 교황과 반목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은 마침내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삼헌장에 대한 이전의 우호적인 결정들을 철회하였다.
③ 제3차(680년) : 제6차 세계공의회. 동방교회에서 오랜 논쟁거리가 되었던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4세가 소집하였다. 680년 로마 시노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의지가 있다는 교리를 확정한 교황 성 아가토(St. Agatho, 재위 : 678∼681)는 황제에게 사절들을 파견하여 이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이들 사절은 18회기의 이 공의회를 거의 주도하다시피 하였다. 그 결과 전(前) 교황 호노리오(Honorius) 1세(재위 : 625∼638)를 비롯한 단성론자들은 파문되었다. 공의회에서 발표된 교령들은 주로 칼체돈 신앙 고백의 재판(再版)이었다. 공의회는 여러 공의회에 걸친 그리스도론(論)을 일단락지었는데, 그리스도 안의 두 의지의 물리적인 일치는 반대하지만, 신과 인간의 의지를 지닌 신인(神人) 사이의 완전한 조화에서 오는 도덕적 일치의 존재는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 공의회
콘스탄츠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Constantiense [영] Concil of Constance
1414년에서 1418년까지 3년 5개월간에 걸쳐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개최된 중세 최대의 공의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그문트(Siegmund)의 제안으로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하였고, 전 회기 동안 300명 이상의 주교, 100명 이상의 대수도원장, 다수의 고위 성직자, 신학자, 교회법학자, 재속 통치자들이 참석하여 서구대이교(西歐大離敎, 1378∼1417년)를 종식시켰고, 이단을 추방하였으며,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 교회는 로마계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계 베네딕토 13세, 공의회파 요한 23세 등 3파로 분열되어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열린 공의회는 당연히 교회의 일치를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세 교황은 각자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무리 없는 교회일치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마침내 공의회 참가자들은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퇴위시켜야만 일치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버리고 샤프하우젠으로 도망, 공의회를 비난하였다. 공의회의 속개를 지원해 온 황제 지그문트는 공의회는 교황 없이도 속행될 것임을 선언하고, 요한 23세를 소환하였다. 한편 공의회에서도 라는 교령을 발표하여 공의회를 계속하여 1415년 요한 23세를 폐위시켰고, 그레고리오 12세를 설득하여 자진 퇴위케 하였으며(1415년), 베네딕토 13세도 폐위시켰다(1417년). 이로써 서구 대이교는 종식되었고 마르티노 5세가 후임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공의회는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J. Huss)의 이단문제를 취급하여 위클리프의 명제 <200개안>을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후스의 명제 30개를 이단으로 단죄한 후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1415년).
공의회는 이밖에도 공의회 우의에 관한 , 10년마다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규정한 등 교회개혁에 관한 5개의 교령을 발표하였다.
콕토 [원] Cocteau, Jean
Cocteau, Jean(1899∼1963). 프랑스의 작가. 소설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 등 많은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알려졌다. 한때 가톨리시즘에 심취되어 마리탱(Jacques Maritain)과의 신앙에 관한 서신왕래를 남기었다.
